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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선왕

2,181 바이트 추가됨, 2009년 2월 13일 (금) 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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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고려 역대 왕계표}}
*[[고려]]의 27대 임금. 재위 ([[1298년]], [[1308년]]~[[1313년]])
[[원나라]]에 있을 때부터 학문에 관심이 많았다. 세자에 오른 그는 원나라에서 귀국하여 [[1295년]] [[충렬왕]]의 왕권을 대리하면서 개혁정치를 시도하였다. 그는 4개월 동안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다시 원나라로 돌아왔다. [[1295년]] 11월에 [[계국공주]]와 혼인하였다. 충렬왕이 잠시 물러나자 [[1298년]]에 일시 즉위하였다. 충선왕은 27개조에 달하는 즉위교서에서 탈법을 일삼는 권문세족들을 강력하게 공격하였다. 개혁추진을 위해서 [[한림원]]과 [[승지방]]을 통합해 [[사림원]]을 설치했다. 사림원은 개혁의 중추가 되었다. 이들은 [[박전지]], [[최참]], [[오한경]], [[이진]] 등의 젊은 학자들이었다. 그러나 충선왕의 두 번째 개혁정치도 실패하고 말았다. [[권문세족]]들의 반발도 강제로 퇴위당했다. 충렬왕이 죽자, 복위한 충선왕은 다시 개혁정치에 나서려 하였으나 복위 2달 만에 제안대군에게 왕권을 대행시킨 채 다시 원나라로 돌아갔다. 이후 충선왕은 고려로 귀국하지 않고, [[연경]]에서 전지를 통해 국정을 수행했다.

전지로 인한 통치는 효과적인 개혁이 힘들었을 뿐만 아니라, 매년 포 10만 필, 쌀 4000곡을 충선왕에게 조달됨으로써 폐해만 극심했다. 충선왕은 고려 신하들의 복귀 요청은 물론, [[원나라]]의 명령에도 응하지 않고 왕위에 있다가 [[1313년]]에 아들 강릉대군([[충석왕]])에게 양위하고 만다.

양위 이후 충선왕은 연경에 [[만권당]]을 지어 놓고 원나라의 저명한 학자들을 불러 고려의 [[안향]], [[이제현]] 등과 교류하도록 추진했다. [[만권당]]은 [[성리학]] 수용에 큰 역할을 하였다. 충선왕은 이후 원나라에 의해 [[티벳]]에 유배되었다가 [[1323년]]에 [[태정제]]의 즉위로 풀려난다. [[1325]]년에 51세로 생애를 마쳤다.

[[분류:고려]]
[[분류:임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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