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뀜

이동: 둘러보기, 검색

디스맨 사건

507 바이트 제거됨, 2021년 8월 29일 (일) 02:21
잔글
판 1개를 가져왔습니다
<htmlet>adsense</htmlet> [[대한민국2001년]]3월 7일 미국을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은 처참하게도 [[조지 W.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this man...'이라는 욕설을 들어야 했다. 오만한 [[미국]]에 대항하지 못한 그때의 사건을 살펴본다.
===‘this man’ 사건의 발단===
여기서 우리는 당시의 언론기사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중앙일보]]2001-03-02 [ DJ 3·1절 화두/ 평화협정 추진 ]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1일 [[경남신문]], [[충청일보]]와의 회견에서 [[남북 정상회담]]과 관련한 언급을 했다. 우선 2차 정상회담 때 '평화협정 또는 선언' 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정부 당국자는 "평화협정은 남북한이 당사자가 되고 [[미국]]과 [[중국]]이 지지. 참여하는 형태가 될 것" 이라고 설명했다.(후략)
우리나라 [[국정원]]은 [[미국]]을 위한 2중스파이가 너무 많다. [[김대중]] 대통령의 발목을 잡은 것은 바로 [[국정원]]이었고, 한반도의 운명을 개척하는데 철저히 방해한 두 스파이가 모두 한국의 피를 지닌 인물이라는 사실은 놀랍고도 슬픈일이다. [[노무현]] 정부가 왜 [[국정원]]을 개혁에 심혈을 기울이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평화선언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
평화협정과 평화선언은 엄청나게 다르다.
이와 같이 분명히 다른 점이 있다. [[미국]]은 자기들이 손울 쓸 수 없는 [[평화선언]] 같은 것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왜냐하면 주한미군이 철수되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남-북 정상의 힘겨운 고뇌고민===
그런데 왜 김대통령은 평화선언을 추진하려 하였던가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94년]] 북-미간 [[제네바 협정]]은 한반도에 평화와 통일의 기운을 싹틔웠다. [[제네바 협정은협정]] 북-미간 적대행위를 중지하고 수교를 통해 서로 친구가 되기로 한 것이 주요 내용이다. 물론 이를 위해 [[북한]]의 핵은 동결되는 것이다. 이 협정의 물밑에는 [[주한미군]]이 철수하는 것도 포함이 되어 있었다.
우리민족으로서는 [[미국]]의 [[클린턴]] 정부가 한반도에 ‘동북아 확산정책’을 선택함으로서 가능 했던 천혜의 기회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 협정이 예정대로 진행된다면 남-북간 평화선언 따위는 필요조차 없는 것이었다.
주) 동북아 확산정책이란 냉전체제 붕괴 이후 미국이 동유럽 국가들에게 적용했던 우호적 국가의 확산을 추구하는 방식으로서 한반도에 같은 유형으로 적용하려 했던 정책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클린턴]] 정부는 [[북한]]의 [[조명록]] 차수의 방미를 마지막으로, [[클린턴]] [[대통령]] 방북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정권에서 물러나게 된다.
===평화선언은 어떻게 진행되려 했던 것인가?===
2001년 3월13일 [[요미우리신문]]』은 중요한 사실을 보도한다.
이 신문은 "남북한은 5월로 예상되는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 답방에 맞춰 평화선언을 발표하기로 합의하고, 그동안 수차례 선언 초안을 교환했다"고 보도했다. 요미우리는 이러한 정보를 제공한 뉴스 원(源)을 미 행정부 관리로 밝히며, 남북평화선언에는 남-북한군 감군 등을 포함할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이 기사의 내용은 한국 [[국정원]]의 안과장이 빼돌린 대북전략정보였고 미 첩보요원 윤씨를 통해 미국 정부로 전해졌고, 이는 다시 [[요미우리신문]]』으로 으로 전해진 것이었다.
<[[김대중]]-[[김정일]] 최후의 음모> 저자 손충무씨는 『일요시사』와의 인터뷰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참담한 마음을 안고 귀국하게 된다. 이후 한참이 지난 2001년 6월25일 6·25전쟁 51주년 참전용사 위로연에 참석해 미련의 말을 남긴다.
[[동아일보]]』 2001/06/26 ["김대통령 "평화협정 남북 주도로…" ]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25일 “한반도에서의 휴전상태를 최종적으로 종식시키기 위해 남북간의 평화협정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평화협정에 대해서는 남북 쌍방을 비롯해 [[미국]]과 중국이 지지해야 하고 유엔의 찬성도 필요하다”며 “그러나 평화협정은 어디까지나 남북간 당사자가 주도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평화선언이 성사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첫번째 이유는 [[국정원]]의 친미행각 때문이었다. 비밀리에 진행되던 남-북 정상간의 전략이 [[국정원]] 안과장과 [[CIA]]윤씨의 정보유출이 원인이다. 들켜버리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두번째 이유는 [[김대중]] 대통령이 대미 종속성을 벗어던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왜 김대통령이 단호하지 못했는지는 김대통령 자신만이 알 것이다. 무엇이 이토록 어렵고도 힘든 것인가? 도대체 평화를 선언하는 것도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미국]]의 협박에 당당한 대통령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인가?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2003년]]에 작성된 글이며, 딴지일보에서 퍼왔음.
두번째 이유는 [[분류:대한민국김대중]]대통령이 대미 종속성을 벗어던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분류:시사]]
[[분류:외교]]
[[분류:hdiconly]]
편집
370

둘러보기 메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