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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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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중국사}}
*[[중국]] 고대 통일왕조. 존속기간([[기원전 206년]]~서기 [[220년]])
===전한(서한)===
[[진나라]]가 멸망하자, [[유방]]은 파촉과 한중 지역에서 힘을 길러 [[기원전 202년]] [[항우]]를 깨뜨리고 천하를 통일하였다. 수도는 [[장안]]으로 하였다. 진나라가 너무 완고한 [[법치주의]]를 실시하다가 실패하였으므로 한 고조는 법제를 느슨하게 하고, 부분적으로는 봉건제를 부활하고 주요 지역에는 군현제를 실시하는 `[[군국제]]`를 바탕으로 나라를 안정시켰다.

3대 황제인 [[한 문제]]와 4대 황제인 [[한 경제]] 시대 착실하게 국력을 닦았다. 한편 봉건 제후세력의 힘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추은령]]`을 내려, 그들의 세력을 분할하고 삭감하였으며, 이에 반발하는 [[오초칠국의 난]]을 잘 막아내어 중앙집권체제 강화의 기회를 맞이하였다. [[한 무제]] 때에 이르러서는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고, [[유교]]를 중시하며, [[법치주의]]를 부활시켰다. 또한 제후들의 힘을 지속적으로 약화시켰다.

한편 한 무제는 [[서역]] 원정 및 남방, [[고조선]] 원정으로 한나라의 국력을 떨치고, [[흉노]]족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났다. 하지만 이때부터 시작된 재정난과 황권이 강해짐에 따라 황제 측근에 위치한 외척과 [[환관]]들의 발호가 시작되었다. 이후 계속된 정치적 혼란으로 외척세력이 정권을 장악하였고, [[기원전 8년]]에는 외척 출신인 [[왕망]]이 정권을 탈취하고 [[신나라]]를 세우게 된다.
===후한(동한)===
왕망의 통치는 호족세력과의 충돌로 인해서 오래 가지 못하고 [[한 광무제]] 유수가 후한을 건국하고, [[낙양]]을 수도로 하였다. 후한 왕조는 사실상 [[호족]] 연합체 왕조였다. 따라서 황권은 한계가 있었다. 서기 [[100년]]이 지나면서 다시 외척들이 정치에 간섭하기 시작했으며, 황제는 외척을 견제하기 위해서 [[환관]]을 등용하는 등 정치적인 악수가 이어졌다. 이에 [[유교]]적 교양을 지닌 관리와 학자들의 대반격이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당고의 화]]`이다. 이때 환관들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게 되었고, 한나라의 정치는 엉망이 되어갔다.

또한 이민족의 침입과 힘겹게 살아가던 농민들의 반란([[황건적의 난]])은 비틀거리는 한나라에 일격을 가했다([[180년]] 무렵). 그리하여 중앙정치는 사실상 상실되었고, 지방 호족들이 군웅을 겨루게 되었다. 치열한 군웅쟁탈전 끝에 중국 중북부를 통일한 [[조조]]와 남동부를 장악한 [[손권]], 서부를 차지한 [[유비]]가 대립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중국 삼국시대이다.

한나라는 이미 [[190년]] 무렵에 멸망한 것이나 다름 없었지만 공식적으로 멸망한 것은 서기 [[220년]] 조조의 아들 [[조비]]가 황위를 찬탈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분류:한나라]]
[[분류:동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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