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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후국

3,347 바이트 추가됨, 2008년 10월 6일 (월)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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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8년]] [[고구려]]의 멸망과 더불어 [[당나라]]는 본격적으로 고구려 지배체제를 갖추었다. 평양성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고구려 본토를 46주로 나누어 실질적인 지배를 꾀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당나라의 의도와는 달리 [[요동]]의 많은 성들은 여전히 [[당나라]] 군사에 맞서 항전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는 소고구려국의 형성으로 이어진다. 또한 [[안승]]은 [[금마저]]에서 [[신라]]의 지원아래 소국을 형성하였다. 고구려 후국이라고 하면 이 "소고구려국" 과 "[[금마저]]"를 주로 얘기한다.

[[보장왕]]과 [[고보원]]은 [[한반도]] 서북지역~[[요동]]에 이르는 지역에서 일어나는 [[고구려]] 부흥운동을 이용하여 [[고구려]]를 회복하려 하였으나 실패했다. 하지만 이 지역의 [[당나라]] 영향력은 계속해서 줄어갔고, 이 지역은 그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는 무주공산이 되었다. 그리하여 이 지역에 [[고구려]] 후국인 소고구려국(혹은 고려후국)이 형성되었다.

이후 [[발해]]가 강성해지자, [[발해]]의 영향력 아래 귀속되었지만, 《[[책부원귀]]》나 《[[당회요]]》와 같은 사료에 8세기부터 10세기 초까지 소고구려국의 독자적인 활동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발해]]가 완전히 직접 지배하기보다는 간접지배지역으로 둔 것으로 짐작된다.

이들은 [[발해]]와 일접한 관계를 맺어 [[발해 무왕]]의 등주 정벌 시에도 큰 협력을 하였다. 특히 수군은 [[발해]]가 전적으로 소고구려국에 의존하였으리라 짐작한다.

또한 [[중국]]의 [[산동 반도]]와 [[발해]]의 [[압록강]]구 사이에 상권이 형성되어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것으로 미루어보아, 소고구려국의 수도인 [[국내성]](오늘날의 [[신의주]]. [[고구려]]의 [[국내성]]과는 구별됨)을 중심으로 강력한 해상세력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해상세력은 최대 [[중국]] 남서부와 동남아까지 활발하게 교역하였는데, 9세기 중엽 월주 등에서 활약한 [[발해]]계 국제상인 '[[이연효]]'가 그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을것이다.

10세기 초 [[요나라]]와의 전쟁에서 [[요동성]]이 함락되자, 자연스럽게 소고구려국은 세력이 약화되었다. 남부에서는 [[궁예]]의 [[후고구려]]가 북진하여 [[평양]]을 비롯한 [[평안도]]의 일부를 점령하자 소고구려국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발해]]의 쇠락과 더불어 급속도로 세력이 약해진 소고구려국은 결국 [[요나라]]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후 이 지역은 잠시 요나라의 지배를 받다가, [[발해]] 부흥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929년]]에는 대씨(大氏)의 [[후발해]]국(後渤海國)이 건국되었고, [[936년]]에는 열씨(烈氏)의 [[정안국]](定安國)이 성립했다. 이 중 [[정안국]]은 한때 [[송나라]]과 연합하여 [[요나라]]를 공격할 태세까지 보이며 부흥국으로써는 최대기간인 60년간 [[발해]]의 맥을 이어갔다.
[[분류:고구려]]
[[분류:한국사]]
[[분류: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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