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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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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루마니아]] 인근의 옛 지명. Dacia
===상고시대===
지금의 [[루마니아]] 중북부와 서부지역에 해당한다. 다키아인은 일찍부터 [[도나우강]] 남쪽과 카르파티아 산맥 북쪽 지역에 살고 있었다. 나중에 다키아 지방이 [[로마]] 속주(屬州)로 편입되었을 때는 그 땅이 북쪽과 동쪽으로 더 넓어졌다. 다키아인은 농사를 지었고 은·철·금 광산을 개발했다. 이들은 기원전 4세기 [[아테네]] 노예시장에 처음 나타났으며, 그뒤 [[그리스]]인과 교역을 했고(특히 술을 수입했음) [[그리스]] 화폐를 썼다. 이들은 [[트라키아]] 방언을 사용했지만 문화적으로는 이웃 [[스키타이]]인과 기원전 4세기에 침략한 [[켈트족]]의 영향을 받았다.
===[[로마]]와의 충돌===
[[기원전 112년]], [[기원전 109년]], [[기원전 75년]]에 [[로마]]와 싸웠고 기원전 60~50년경 [[부레비스타]] 왕이 왕국을 통일하고 영토를 넓혔지만 그가 죽고 난 뒤 왕국은 4개로 갈라졌다.
다키아인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기원전 27년]]~[[14년]] 재위) 통치 때와 [[69년]]에도 [[로마]] 속주인 [[모이시아]] 지방을 침공했지만 패배했고, [[도미티아누스]] 때 일어난 다키아 전쟁([[85년]]~[[89년]]) 뒤에는 [[로마]] 지배를 인정해야 했다. [[트라야누스]] 황제는 다시 전쟁을 시작해([[101년]]) [[106년경]] 다키아 전역을 정복하고 많은 주민들을 몰살하거나 북쪽으로 쫓아버렸다
===[[로마]] 속주 다키아===
[[로마]]인은 엄청난 부(富)를 손에 넣었으며, 다키아 광산들을 직접 개발했다. [[로마]]는 주요도로를 닦아 영향력을 더욱 키웠고, 사르미제게투사와 치에르나(오르소바)는 [[로마]] 식민지가 되었다. [[하드리아누스]]는 다키아를 둘로 나누었는데 상(上)다키아는 대체로 트란실바니아 지방이며 하(下)다키아는 왈라키아 지방이었다.
[[159년]] [[안토니우스 피우스]]는 이 지방을 다시 3개의 속주로 나눠 트레스다키아이(다키아포폴리센시스·다키아알폴렌시스·다키아말벤시스)라 했고 총독 1명이 세 속주를 함께 다스렸다. [[168년]]경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이 속주들을 다시 하나의 군사지역으로 통합했다. 로마 영토의 경계선이 분명하게 정해졌던 적은 거의 한번도 없었지만, 로마인들은 다키아를 손에 넣어 군사적·물질적 혜택을 입었다.
후에 [[271년]]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게르만 민족의 남하를 막기 위하여 다키아를 포기하고 [[도나우강]] 아래로 [[로마]] 주민들을 이주시킨다. 그러나 다수의 [[로마]] 시민들이 다키아에 남아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로마시대 이후===
[[분류:서양사]]
[[분류:로마]]
[[분류:루마니아]]
[[분류:지명]]
===상고시대===
지금의 [[루마니아]] 중북부와 서부지역에 해당한다. 다키아인은 일찍부터 [[도나우강]] 남쪽과 카르파티아 산맥 북쪽 지역에 살고 있었다. 나중에 다키아 지방이 [[로마]] 속주(屬州)로 편입되었을 때는 그 땅이 북쪽과 동쪽으로 더 넓어졌다. 다키아인은 농사를 지었고 은·철·금 광산을 개발했다. 이들은 기원전 4세기 [[아테네]] 노예시장에 처음 나타났으며, 그뒤 [[그리스]]인과 교역을 했고(특히 술을 수입했음) [[그리스]] 화폐를 썼다. 이들은 [[트라키아]] 방언을 사용했지만 문화적으로는 이웃 [[스키타이]]인과 기원전 4세기에 침략한 [[켈트족]]의 영향을 받았다.
===[[로마]]와의 충돌===
[[기원전 112년]], [[기원전 109년]], [[기원전 75년]]에 [[로마]]와 싸웠고 기원전 60~50년경 [[부레비스타]] 왕이 왕국을 통일하고 영토를 넓혔지만 그가 죽고 난 뒤 왕국은 4개로 갈라졌다.
다키아인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기원전 27년]]~[[14년]] 재위) 통치 때와 [[69년]]에도 [[로마]] 속주인 [[모이시아]] 지방을 침공했지만 패배했고, [[도미티아누스]] 때 일어난 다키아 전쟁([[85년]]~[[89년]]) 뒤에는 [[로마]] 지배를 인정해야 했다. [[트라야누스]] 황제는 다시 전쟁을 시작해([[101년]]) [[106년경]] 다키아 전역을 정복하고 많은 주민들을 몰살하거나 북쪽으로 쫓아버렸다
===[[로마]] 속주 다키아===
[[로마]]인은 엄청난 부(富)를 손에 넣었으며, 다키아 광산들을 직접 개발했다. [[로마]]는 주요도로를 닦아 영향력을 더욱 키웠고, 사르미제게투사와 치에르나(오르소바)는 [[로마]] 식민지가 되었다. [[하드리아누스]]는 다키아를 둘로 나누었는데 상(上)다키아는 대체로 트란실바니아 지방이며 하(下)다키아는 왈라키아 지방이었다.
[[159년]] [[안토니우스 피우스]]는 이 지방을 다시 3개의 속주로 나눠 트레스다키아이(다키아포폴리센시스·다키아알폴렌시스·다키아말벤시스)라 했고 총독 1명이 세 속주를 함께 다스렸다. [[168년]]경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이 속주들을 다시 하나의 군사지역으로 통합했다. 로마 영토의 경계선이 분명하게 정해졌던 적은 거의 한번도 없었지만, 로마인들은 다키아를 손에 넣어 군사적·물질적 혜택을 입었다.
후에 [[271년]]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게르만 민족의 남하를 막기 위하여 다키아를 포기하고 [[도나우강]] 아래로 [[로마]] 주민들을 이주시킨다. 그러나 다수의 [[로마]] 시민들이 다키아에 남아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로마시대 이후===
[[분류:서양사]]
[[분류:로마]]
[[분류:루마니아]]
[[분류:지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