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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 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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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19대 임금. 재위([[391년]]~[[412년]]). 생몰연대([[374년]]~[[412년]]) 호태왕, 연호는 영락
광개토 대왕은 [[소수림왕]]대와 [[고국양왕]]대의 안정기를 거쳐 강력해진 [[고구려]]의 국력을 마음껏 쏟아낸 임금이다.
===대 [[백제]] 정벌===
광개토 대왕은 즉위 직후부터 [[백제]]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다. [[392년]] 7월 [[백제]]를 공격하여 석현성(石峴城)을 비롯한 10개 성을 빼앗고, 10월에는 난공불락이라던 [[관미성]](關彌城)을 함락시켰다. [[394년]] 7월 빼앗긴 땅의 탈환을 위해 침공해온 [[백제]]군을 [[수곡성]](水谷城)에서, [[395년]] 8월에는 [[패수]](浿水)에서 각각 격퇴하고 8,000명을 사로잡았다. [[396년]]에 광개토왕은 직접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공격했다. 이때 [[고구려]]군은 해로로 [[임진강]] 방면에 진출하여 한강 너머에까지 진격해서 58성 700촌락을 점령하고, [[백제]]의 [[아신왕]](阿莘王)에게 항복을 받고 많은 전리품과 [[백제]]왕의 동생과 대신 10명을 인질로 잡아오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후 [[백제]]는 [[가야]]와 [[왜]] 세력과 손을 잡고 신라를 공격하였다. 일부 왜 세력은 [[황해도]] 인근에 진출하기도 하였다. 광개토 대왕은 [[400년]]에 [[신라]]를 구원하기 위하여 5만 대군을 파견하였다. [[고구려]]군은 남부지방 깊숙히 쳐들어가 [[가야]]지역까지 공격하고 돌아왔다. 이 공격으로 [[가야]]연맹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407년]]에는 다시 [[백제]]를 공격하여 7개 성을 점령하고, [[백제]]를 완전히 굴복시켰다.
===[[후연]]과의 전쟁===
초기에는 [[후연]]과 휴전을 한 상태였으나, 서기 [[400년]]에 [[후연]]이 먼저 [[고구려]]를 공격하면서 전쟁에 돌입하였다. [[402년]] 광개토 대왕은 [[요하]]를 건너 [[대릉하]] 인근 평주지역을 평정하고, [[숙군성]]을 점령하였다. 이후 [[고구려]]군은 현재 [[북경]] 인근지역까지 진출하기도 하였다. [[404년]]에도 [[후연]]을 공격하여 요동성과 인근 지역을 점령하여 요동지역의 지배권을 확고히 하였다. 이후 [[405년]]과 [[406년]]에 걸친 [[후연]]의 반격을 무사히 막아내었다. [[후연]]은 [[고구려]]와의 전쟁의 패배로 멸망하고 만다. [[후연]]이 멸망한 이후 등장한 [[북연]](北燕)과는 우호관계를 맺으면서 [[요동]]지역의 공방전을 마무리지었다.
===기타 전쟁===
[[392년]]에는 [[거란]]을 공격하여 사로잡힌 [[고구려]]인 1만 명을 포함하여 [[거란]]부족을 복속시켰으며, [[395년]]에는 [[시라무렌강]] 인근의 [[비려]]를 토벌하였다. [[398년]]에는 [[숙신]]을, [[410년]]에는 [[부여|동부여]]를 정벌하여 복속시켰다.
===내치===
광개토 대왕은 장사(長史)·사마(司馬)·참군(參軍) 등의 중앙관직을 신설하고 역대 왕릉의 보호를 위하여 [[수묘인]](守墓人)제도를 재정비했다. [[393년]]에는 [[평양]]에 9개의 절을 창건하여 [[불교]]를 장려하기도 했다.
[[분류:고구려]]
[[분류:임금]]
*[[고구려]]의 19대 임금. 재위([[391년]]~[[412년]]). 생몰연대([[374년]]~[[412년]]) 호태왕, 연호는 영락
광개토 대왕은 [[소수림왕]]대와 [[고국양왕]]대의 안정기를 거쳐 강력해진 [[고구려]]의 국력을 마음껏 쏟아낸 임금이다.
===대 [[백제]] 정벌===
광개토 대왕은 즉위 직후부터 [[백제]]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다. [[392년]] 7월 [[백제]]를 공격하여 석현성(石峴城)을 비롯한 10개 성을 빼앗고, 10월에는 난공불락이라던 [[관미성]](關彌城)을 함락시켰다. [[394년]] 7월 빼앗긴 땅의 탈환을 위해 침공해온 [[백제]]군을 [[수곡성]](水谷城)에서, [[395년]] 8월에는 [[패수]](浿水)에서 각각 격퇴하고 8,000명을 사로잡았다. [[396년]]에 광개토왕은 직접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공격했다. 이때 [[고구려]]군은 해로로 [[임진강]] 방면에 진출하여 한강 너머에까지 진격해서 58성 700촌락을 점령하고, [[백제]]의 [[아신왕]](阿莘王)에게 항복을 받고 많은 전리품과 [[백제]]왕의 동생과 대신 10명을 인질로 잡아오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후 [[백제]]는 [[가야]]와 [[왜]] 세력과 손을 잡고 신라를 공격하였다. 일부 왜 세력은 [[황해도]] 인근에 진출하기도 하였다. 광개토 대왕은 [[400년]]에 [[신라]]를 구원하기 위하여 5만 대군을 파견하였다. [[고구려]]군은 남부지방 깊숙히 쳐들어가 [[가야]]지역까지 공격하고 돌아왔다. 이 공격으로 [[가야]]연맹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407년]]에는 다시 [[백제]]를 공격하여 7개 성을 점령하고, [[백제]]를 완전히 굴복시켰다.
===[[후연]]과의 전쟁===
초기에는 [[후연]]과 휴전을 한 상태였으나, 서기 [[400년]]에 [[후연]]이 먼저 [[고구려]]를 공격하면서 전쟁에 돌입하였다. [[402년]] 광개토 대왕은 [[요하]]를 건너 [[대릉하]] 인근 평주지역을 평정하고, [[숙군성]]을 점령하였다. 이후 [[고구려]]군은 현재 [[북경]] 인근지역까지 진출하기도 하였다. [[404년]]에도 [[후연]]을 공격하여 요동성과 인근 지역을 점령하여 요동지역의 지배권을 확고히 하였다. 이후 [[405년]]과 [[406년]]에 걸친 [[후연]]의 반격을 무사히 막아내었다. [[후연]]은 [[고구려]]와의 전쟁의 패배로 멸망하고 만다. [[후연]]이 멸망한 이후 등장한 [[북연]](北燕)과는 우호관계를 맺으면서 [[요동]]지역의 공방전을 마무리지었다.
===기타 전쟁===
[[392년]]에는 [[거란]]을 공격하여 사로잡힌 [[고구려]]인 1만 명을 포함하여 [[거란]]부족을 복속시켰으며, [[395년]]에는 [[시라무렌강]] 인근의 [[비려]]를 토벌하였다. [[398년]]에는 [[숙신]]을, [[410년]]에는 [[부여|동부여]]를 정벌하여 복속시켰다.
===내치===
광개토 대왕은 장사(長史)·사마(司馬)·참군(參軍) 등의 중앙관직을 신설하고 역대 왕릉의 보호를 위하여 [[수묘인]](守墓人)제도를 재정비했다. [[393년]]에는 [[평양]]에 9개의 절을 창건하여 [[불교]]를 장려하기도 했다.
[[분류:고구려]]
[[분류:임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