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리
고구려 남부 대사자를 지냈다. 294년에 국상이 되었다. 고구려에 큰 흉년이 들었지만, 봉상왕은 사치와 향락을 즐기고 왕족을 죽여 왕권강화에만 몰두하자, 다른 신하들과 함께 봉상왕을 폐하고, 미천왕을 즉위시켰다.(300년) 생몰연대는 알 수 없다.
삼국사기 기록(봉상왕과의 대화)
『三國史記 列傳 三國史記卷第四十五-倉助利 (삼국사기 열전 권제49 - 창조리』 ○<倉助利>, <高句麗>人也, <烽上王>時, 爲國相. 時<慕容 >爲邊患. 王謂群臣曰: "<慕容>氏兵强, 屢犯我疆 , 爲之奈何?" <倉助利>對曰: "北部大兄<高奴子>, 賢且勇, 大王若欲禦寇安民, 非<高奴子>, 無可用者." 王以爲新城太守, <慕容 >不復來. 九年秋八月, 王發國內丁男年十五已上, 修理宮室. 民乏於食, 困於役, 因之以流亡. <倉助利>諫曰: "天災 至, 年穀不登, 黎民失所, 壯者流離四方, 老幼轉乎溝壑. 此誠畏天憂民, 恐懼修省之時也. 창조리는 고구려인인데 봉상왕 때 국상이 되었다. 당시에는 모용 외가 변경의 걱정거리가 되어 있었다. 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모용씨는 병력이 강력하여 누차 우리의 강역을 침범하니 이를 어찌 할 것인가?" 하니, 창 조리가 대답하기를 "북부 대형 고노자가 현명하고도 용감하니, 대왕께서 외적을 막아 백성을 편안하게 하시려면 고노자가 아니고는 쓸 만한 자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고노자를 신성 태수로 삼으니, 모용 외가 다시는 오지 못했다. 9년 가을 8월에 왕이 15세 이상 되는 전국의 장정을 징발하여 궁실을 수리하자, 백성들이 식량이 부족하고 노역에 시달리게 되어 고향을 떠나 유랑 생활을 하였다. 창 조리가 간하여 말하기를 "천재가 거듭되고 곡식이 잘 익지 않아서, 백성들은 살 곳을 잃고, 장정들은 사방으로 유랑하고, 노인과 아이들은 구렁텅이에서 뒹굴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참으로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걱정하며 두려움을 가지고 자신을 반성할 때입니다.
○大王曾是不思, 驅飢餓之人, 困木石之役, 甚乖爲民父母之意, 而況比隣有强梗之敵, 若乘吾弊以來, 其如社稷生民何? 願大王熟計之." 王 曰: "君者, 百姓之所瞻望也. 宮室不壯麗, 無以示威重. 今相國, 蓋欲謗寡人, 以干百姓之譽也." <助利>曰: "君不恤民, 非仁也, 臣不諫君, 非忠也. 臣旣承乏國相, 不敢不言, 豈敢干譽乎?" 王笑曰: "國相欲爲百姓死耶? 冀無後{復} 言." <助利>知王之不悛, 退與群臣謀廢之. 王知不免, 自縊. 대왕께서는 이것을 생각하지 않으시고 기아에 허덕이는 백성들을 부려 토목공사에 시달리게 하시니, 이것은 백성의 부모된 사람이 할 일과는 크게 어긋나는 것입니다. 더구나 가까운 이웃에 강한 적이 있는데, 만약 우리가 피폐해진 틈을 타서 그들이 쳐들어 온다면 사직과 생민을 어떻게 하시렵니까? 원컨대 대왕께서는 깊이 생각하소서." 왕이 노하여 말했다. "임금이란 백성들이 우러러 보는 존재이다. 궁실이 장려하지 않으면 위엄을 보일 수 없다. 이제 상국은 과인을 비방함으로써 아마도 백성들의 칭송을 얻으려는 모양이구나." 조리가 말했다. "임금이 백성을 불쌍히 여기지 않으면 인한 것이 아니며, 신하가 임금에게 간언을 하지 않으면 충성이 아닙니다. 신은 이미 국상의 빈 자리를 이어받고 있으므로 감히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 어찌 감히 백성의 칭송을 바라겠습니까?" 왕이 웃으며 말했다. "국상은 백성을 위하여 죽으려는가? 다시 말하지 말기를 바란다." 조리는 왕에게 개선의 정이 없음을 알고 물러나와 여러 신하들과 함께 폐위시킬 것을 모의했다. 왕은 사태를 모면할 수 없음을 알고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