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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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판자촌에서 지독하게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65년 재단사 자격을 얻어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의 재단사로 들어가게 되었다.

당시 평화시장은 청계천 복개공사로 상가와 의류제조업체 등 800여 업체가 상주하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상상도 못할 정도의 노동착취가 연일 이어지고 있었다.

현실에 문제점을 느낀 전태일은 1969년 '바보회'를 결성하고 근로기준법을 공부하면서 현실에 대한 깊은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 근로기준법과 노동현장은 너무나 차이가 있었다.

전태일은 작업환경과 노동착취에 대한 민원과 진정을 수 차례 하였으나, 정부와 업체 측에서는 무성의로 일관하였다.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와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1970년 8월 9일의 일기) 

결국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 6가의 평화시장 구름다리 앞에서 500여명의 노동자들은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시위를 벌였고, 이때 22살이던 전태일은 근로기준법 책을 안은 채 분신자살하며 "근로기준법을 지키라", "일요일은 쉬게하라", "노동자들은 혹사시키지 말라" 고 외쳤다. 병원으로 옮겼으나 당일 사망하였다.

이 사건은 큰 사회적 파장을 낳게 된다. 일단 경제개발이라는 미명 아래에 눈감았던 노동착취에 대해서 사람들이 자각하게 되었으며, 노동운동에 씨앗을 뿌리게 되었다. 이후 청계피복 노동조합을 비롯한 노동운동이 이어졌으며, 지식인들은 정치적 이슈에서 벗어나 소외된 계층으로서 경제개발의 그늘에 가려진 노동자들의 어두운 현실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전태일은 2001년민주화 운동 보상법에 따라 정부에 의해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공식 인정됐다.

1995년엔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제작되기도 했으며, 1990년 조영래 변호사는 전태일의 일대기를 정리한 <전태일 평전>을 출판하려 하였다. 이 책은 조영래 변호사가 죽고 난 후 출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