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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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원인

파일:샘물교회 출국사진.jpg
샘물교회 선교지원팀이 출국에 앞서 아프가니스탄 여행 경고문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 선교활동: 한국개신교는 공격적인 선교활동으로 유명하다. 샘물교회에서는 아프가니스탄에도 2007년까지 3명의 선교사를 포함하여 7명의 선교단이 고정적으로 파견된 상태이다. 이 선교단의 지원을 위하여 '선교지원팀'이 꾸려지고 2007년 7월 아프가니스탄으로 단기선교활동을 펴기 위하여 선교지원팀이 출발한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에서 이미 한국인들의 선교활동에 대한 우려가 있었고, 가즈니 주지사도 이에 대하여 우려를 표명하였다. 2006년 8월에는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한국개신교 계열이 대규모 기독교 행사를 펼치려다 아프가니스탄 정부와 한국정부의 만류에 의하여 취소된 적이 있다. 분쟁지역과 오지에 공격적으로 선교와 봉사활동을 하는 것은 한국개신교에서는 교회세력을 알리기 위한 좋은 명분이었다. 이런 공격적인 선교활동은 많은 분쟁의 여지를 안고 있었다.
  • 불안한 아프가니스탄의 정세: 2001년 미국아프가니스탄 침공을 필두로 하여 아프가니스탄에는 친미정권이 들어섰다. 미국의 대규모 소탕작전에 크게 패퇴한 탈레반 세력은 2005년 이후 중남부지역과 파키스탄 일대에서 힘을 다시 회복하여 아프가니스탄 정부와 미국을 위시한 다국적군과 대치하고 있다. 탈레반2007년을 기점으로 국제사회의 인정과 실질적인 이익(잡혀간 탈레반 전사의 석방, 활동자금 마련)을 위하여 인질피랍을 주요방법으로 삼고 있다. 이들에게 한국인 선교팀은 눈에 들어오는 확실한 타켓이었다.

사건의 경과

탈레반은 피랍된 23명 중 심성민과 배형규 목사를 살해했으나, 대한민국 정부와 탈레반의 협상 결과 다른 인질 21명은 8월 31일까지 단계적으로 모두 풀려나 피랍사태는 발생 42일만에 종료되었으며, 9월 2일 생존한 피랍자 19명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사회적 반향

사회적으로 기독교의 무분별한 선교활동과 이분법적인 주입식 종교강요가 큰 화두로 떠올랐다. 다수의 비기독교 사람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서 공감하였으나 여전히 다수의 기독교 신자들은 '선교는 절대 사명'이라고 생각하며 이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지 못하나 것으로 파악된다.

이는 훗날 우리 사회가 기독교-비기독교로 분열될 가능성이 큰 만큼 사회분열을 막기 위한 여러 종교적 대책들이 나와야 한다. 또한 우리 정부와 전문가 집단에서 이슬람과 아랍에 대한 체계적인 접근과 정보가 없다는 점에서 대외관계 및 기업진출을 위해서 이슬람과 아랍에 대한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