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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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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百濟)는 한국의 고대 국가이다. 후에 국호를 '''[[남부여]]'''라고 바꿨다.
==역사==
===건국===
백제는 [[기원전 18년]]에 [[부여]] 또는 [[고구려]] 계통의 유민 세력과 한강 유역의 토착 세력의 결합으로 성립되었는데, 우수한 철기 문화를 보유한 [[고구려]] 유민 집단이 지배층을 형성하였다.

백제는 [[한강]] 유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던 한나라 세력의 공격을 막아내면서 차츰 성장해 나갔다. 3세기 중엽 [[고이왕]] 때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하였고, [[중국]] 대륙의 선진 문물들을 받아들여 정치 체제를 정비하였다. 이 무렵 백제는 관등제를 정비하고 관복제를 도입하는 등(사실상의 [[율령]] 반포) 지배 체제를 정비하여 중앙 집권 국가의 토대를 형성하였다.

===발전===
4세기 중반 백제는 [[근초고왕]] 때 크게 발전하였다. 이때 백제는 [[마한]]의 나머지 세력을 모두 정복하여 그 영토가 [[전라도]] 남해안에 이르렀으며, 북쪽으로는 [[황해도]] 지역을 놓고 [[고구려]]와 대립하였다. 또한 [[낙동강]] 유역의 [[가야]]에 대해서도 지배권을 행사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오늘날의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와 [[낙동강]] 중류 지역, [[강원도]], [[황해도]]의 일부 지역을 포함하는 넓은 영토를 확보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점차 전제군주화가 되어가고 부자 상속에 따른 왕위 계승이 확립되었다. 아울러 [[침류왕]] 때에는 [[불교]]를 공인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사상적으로 뒷받침하였다.

===융성===
4세기 [[근초고왕]]은 [[마한]] 지역을 완전히 병합하고 [[고구려]]로 북진 [[평양성]]을 함락시키고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남제서]]와 [[북제서]]에 따르면, [[근초고왕]]은 [[요동]]과 [[산동반도]]까지 진출하였으며 [[일본]] 열도의 [[규슈]]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5세기 이후 [[고구려]]의 [[장수왕]]에 적극적인 남하 정책에 밀려 [[웅진성]]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대외 팽창이 위축되었다. 더구나 [[중국]]과 일본 지역의 정세 변화에 따라 무역 활동도 침체되어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 세력이 국정을 주도하였으며, [[문주왕]] 때는 [[해구]]와 같은 무인 실권자가 등장하여 정치혼란이 일어나는 등 어려운 상황에 빠졌다.

그러나 5세기 후반 [[동성왕]] 때부터는 다시 사회가 안정되면서 국력을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동성왕]]은 [[신라]]와의 동맹을 강화하여 [[고구려]]에 대항하였고, [[무령왕]]은 지방의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함으로써 지방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였다. 이로써 백제 중흥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성왕]]은 대외 진출이 쉬운 [[사비성]]으로 수도를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로 개명하면서 중흥을 꾀하였다. [[성왕]]은 중앙 관청과 지방 제도를 정비하고, 승려를 등용하여 [[불교]]를 진흥하였으며, [[중국]] 대륙의 남조(南朝)와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또한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기도 하였다. 한편, [[성왕]]은 [[고구려]]의 내정이 불안한 틈을 타서 [[신라]]와 연합하여 일시적으로 [[한강]] 유역을 수복하였지만, 얼마 안 가 배신한 [[신라]]에게 빼앗기고 [[성왕]] 자신도 [[신라]]군과 싸우다 [[관산성]]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쇠망===
[[고구려]]가 [[수나라]]·[[당나라]]의 침략을 막아내는 동안, 백제에서도 [[무왕]]과 [[의자왕]]이 [[신라]]에게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여, [[의자왕]] 2년에는 [[대야성]]을 비롯한 [[신라]]의 성 40여개를 점령하기도 했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와의 연합을 꾀했으나 회담이 결렬되자 [[당나라]]와 군사 동맹을 맺어 삼국를 통일하려 하였다. 이에 [[고구려]]와 백제는 남북동맹으로 [[나당동맹]]에 대항하려 하였다.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먼저 백제를 공격했다. 당시 백제는 [[의자왕]] 후기([[655년]] 이후)부터 시작된 정치적 혼란으로 결국 [[660년]]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허무하게 멸망하고 말았다.

백제가 멸망한 이후 각 지방의 저항 세력이 들고 일어나 백제 부흥 운동을 일으켰다. [[복신]]과 [[흑치상지]], [[도침]] 등은 왕자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하고 [[주류성]]과 [[임존성]]을 거점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이들은 200개의 성들을 되찾고 [[사비성]]과 [[웅진성]]에 주둔한 [[당나라]]군을 공격하면서 4년간 저항하였으나, 결국 [[신라]]-[[당나라]] 연합군에 의하여 진압되고 만다.

이때 [[일본]]이 백제에 원군을 보내, [[신라]]-[[당나라]] 연합군과 [[백제]]-[[일본]] 연합군이 백촌강에서 격돌하였다 (백촌강 전투). 그러나 [[백제]]-[[일본]] 연합군은 대패하고, 최후의 거점인 [[임존성]]이 배반한 '[[흑치상지]]'에게 점령당함으로서 [[백제]]의 부흥운동은 실패하고 말았다.([[663년]])

===[[요서]] 및 [[중국]]대륙 영토에 대한 논란===
백제가 [[중국]]의 [[요서]]지방에 진출했었다는 이른바 ‘백제요서경략설’은 [[송서]], [[양서]] 등의 남조계 사서에서 비롯한 것이다. 다만 지리적으로 [[요서]]지방과 인접한 북조계 사서에서는 관련 기록이 나타나지 않아 학계에서 지속적인 논란이 되어왔다.

일반적으로는 백제의 [[요서]]진출에 대해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학계의 시각이 대세이지만(대표적인 예로 〈백제의 요서영유(설)〉(유원재, 1995년, 《한국사》 6, 국사편찬위원회, 132~150쪽), 최근에는 다시 백제의 [[요서]] 진출을 신중하게 실재한 것으로 바라보는 입장도 제기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는 〈4세기 백제의 遼西 지역 진출과 그 배경〉(강종훈, 2003년, 〈한국고대사연구〉30, 한국고대사학회, 5~37쪽)이 있다.

백제가 [[요서]]나 [[산동반도]] 지역을 직접적으로 지배했다기보다는 무역이나 기타의 이익을 위해서 주요 거점지역에 백제계가 상당한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할 수도 있다.

==백제의 정치==
백제는 일찍이 중국 [[주나라]] 육전(六典) 제도를 본떠서 삼국 중 제도정비를 가장 빨리 시작하였다. [[고이왕]] 때부터 왕 밑에 6[[좌평]]과 16관등급 제도를 두어 행정을 맡게 하고, 또 왕의 바로 밑에는 수상격인 [[상좌평]](上佐平)을 두어 임무를 수행하게 하였다. 그리고 각 관청의 장관들은 3년마다 선거로 뽑았다. [[성왕]] 때 사비로 천도([[538년]])한 이후에는 내관(內官:12부)과 외관(外官:10부)으로 이루어지는 22부의 중앙관서를 새로 두었다. 중앙의 행정구역은 상·하·전·후·중의 5부로 구분하고 부 밑에 항(巷)을 두었으며 각 부에는 500명의 군인이 주둔하였다.

백제의 지방통치조직은 웅진시대까지 [[담로]]제(擔魯制)였다. 《[[양서]](梁書)》의 <백제전>에 따르면 전국에 22[[담로]]를 두고 왕자나 왕족을 보내어 다스리게 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담로]]는 지방지배의 거점으로서 성을 뜻하는 동시에 그것을 중심으로 하는 일정한 통치영역을 나타내는 것이며, 일종의 봉건제라고 할 수 있다. [[담로]]의 설치에 대해서는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로 보기도 하지만 [[근초고왕]]이 지방지배조직을 정비하고 지방관을 파견하기 시작한 때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22개라고 한 것은 [[웅진]]에 도읍하던 때의 것으로 시대와 지역에 따라 변천이 있었으며 [[백제]] 영토가 확대되었을 때에는 50여 개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비성]]으로 천도 후, 백제의 지방통치조직은 5방제(五方制)로 변경되었다. 5방은 중앙인 고사성(古沙城), 동방인 득안성(得安城), 남방인(久知下城), 서방인 도선성(刀先城), 북방인 [[웅진]]성(熊津城)이었다. 각 방에는 방령(方領) 1명, 방좌(方佐) 2명이 파견되었다. 각 방은 6~10개의 군(郡)으로 이루어졌다.

===백제 16관등(삼국사기)===
*1품 [[좌평]]-2품 [[달솔]]-3품 은솔-4품 덕솔-5품 한솔- 6품 나솔(자줏빛 관복, 은으로 된 꽃을 관에 장식할 수 있음)
*7품 장덕-8품 시덕-9품 고덕-10품 계덕-11품 대덕(붉은 관복)
*12품 문독-13품 무독-14품 좌군-15품 진무-16품 극우(푸른 관복)

==백제의 사회, 경제==
백제는 일찍이 농업이 발달하여 [[삼한]]시대부터 벼농사가 발달하였고, 직조술 ·염색술 등 수공업이 발달하였다. 금속공업도 발달하여 무기 ·금관 ·금은 장식품 ·불상 등을 만들었다. 토지제도는 국유가 원칙이고 토지의 측량방법은 [[두락제]](斗落制)를 썼으며 조세는 조(租)를 쌀로, 세(稅)를 포 ·비단 ·삼베 등으로 바치게 하였는데 그 징수 방법과 수량에 대하여는 알 길이 없다.

백제는 기본적으로 해양민족적 성격을 지녀 [[중국]] 및 [[일본]]과 교역이 성행하였으며, 일본에 말·누에·직조법·양조법 등의 생산품과 그 기술이 전파되었다. 백제의 무역항으로는 [[영암]](靈岩) 및 [[당항성]](黨項城)이 크게 번성하였다.

한편 백제는 수도 [[고마성]]에 관설 시장을 만들었고 도시부(都市部)라는 시장감독관청을 두어 시장의 열고 닫음, 상거리 질서 유지, 분쟁 조정 및 불법 거래를 단속했으며, 세금을 징수하고 왕실에서 쓸 물건을 조달하게 하였다.
==백제와 일본의 관계==
백제는 [[근초고왕]] 때 최초로 [[일본]]에 한학을 전하고, [[근초고왕]] 또는 [[아신왕]] 때 [[왕인]] 박사가 [[논어]](論語)와 천자문을 전했으며, [[무령왕]] 때 단양이 ·고안무, [[성왕]] 때 유귀(柳貴) 등은 오경박사(五經博士)로서 한학과 유학 등을 전하였다. 그리고 [[무왕]] 때 관륵(觀勒)은 천문 ·역법 ·지리 등을 전하고, [[성왕]] 때(552년) [[노리사치계]]는 최초로 [[불교]]를 전했으며, 혜총은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 되고, 도장은 성실론(成實論)을 저술하였다. [[아좌 태자]]는 [[쇼토쿠 태자]]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그 밖에도 화공(畵工) ·와공(瓦工)과 경사(經師) ·율사(律士) ·의사들을 보냈다. 이와 같이 삼국 중 백제문화는 [[일본]]의 문화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또한 당시 주요 [[일본]] 왕족이 [[백제]]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문화적, 정치적'연결고리가 [[663년]], [[일본]]이 [[백제]]를 구원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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