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뀜

갑신정변

7,396 바이트 추가됨, 2008년 7월 26일 (토) 18:23
잔글
1 revision
[[1884년]] 강력한 개혁을 원하던 [[개화파]] 일부세력이 [[일본]]군을 등에 업고 일으킨 정변, 근대적인 강력한 개혁정책을 발표하였으나 [[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3일만에 끝나고 말았다.
===갑신정변 발발과정===

개화파들은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의 노골적인 내정간섭과 함께 온건파와 급진파로 갈라졌다. 온건파는 [[청나라]야말로 서양세력을 막아줄 수 있는 유일한 보호막이라고 하면서 [[청나라]]의 [[양무운동]]을 본뜬 점진적인 개화를 주장했다. 반면 급진파는 [[청나라]]와 그에 빌붙은 [[민씨척족]]세력을 제거하고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본따 급속한 개화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급진파는 스스로를 개화당 또는 독립당이라고 부르고 온건파를 수구당·[[사대당]]이라고 불렀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은 급진파.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이조연]], [[민영익]] 등은 온건파에 속했다.

[[개화파]]는 점차 요직에서 소외되어갔다. 재정난 타개책으로 [[일본]]에서 300만 원의 차관을 들여오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이들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이 같은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1884년]] 봄부터 [[개화파]]는 [[쿠데타]]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때 [[청나라]]는 [[프랑스]]와의 전쟁 때문에 [[조선]] 주둔군의 절반을 철수시키고 있었다. 한편 [[일본]]은 청의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조선]]에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공사 [[다케조에]]를 통해 [[쿠데타]] 지원을 약속했다. 본래 [[김옥균]] 등은 [[미국]]에 기대를 걸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한지라 [[일본]]의 접근을 선뜻 받아들였다.

[[1884년]] [[고종]] 21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저녁 7시, 우리나라 최초의 우체국인 [[우정국]] 개국 축하연회가 열렸다.

수구파의 거두 [[민영익]]을 비롯한 수구파들과 [[개화파]], 그리고 각국의 외교사절단이 참석하였다. 밤 10시경 [[개화파]]의 습격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큰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개화파]]들은 [[조선 고종|고종]] 임금을 찾아갔다.

===갑신정변의 실패===

곧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가 이끄는 일본군 200명이 [[경우궁]]을 호위했다. 이어 [[한규직]], [[이조연]], [[민태호]], [[민영목]], [[조영하]], [[유재현]] 등 [[수구파]] 인물들을 살해했다.

다음날인 12월 5일, 개화파는 개혁 정강을 발표했다. 그 중 14개조가 전해지고 있는데, 주요내용은 청나라와의 관계 단절, 문벌과 양반제도 폐지, [[지조법]] 개정과 재정기관 일원화, [[보부상]] 단체인 [[혜상공국]] 폐지 등이다.

[[창덕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6일 오후 3시, 혁신정치를 천명하는 조서를 내렸다. 바로 그때 청나라 군대가 궁궐로 들이닥쳤다.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는 사태가 불리해지자 재빨리 군대를 철수하였다.

일본군의 무력에 의지했던 [[개화파]]들은 바로 무너졌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은 일본공사관으로 피신했다가 [[인천]]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망명했으며 [[박영효]]의 형 [[박영교]], [[홍영식]]은 끝까지 왕 곁에 남았다가 청나라 군대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개화파]] 정권은 3일천하로 끝이 났다. 그들의 혁신 정강과 왕이 내리려던 조서 또한 휴지가 되어 사라졌다.

====개혁 정강 14개조====
#[[흥선 대원군]]을 즉각 환국케 하고 청에 대한 조공을 폐지할 것.
#문벌을 폐지하고 [[인민평등]]권을 제정하고 재능에 의해 인재를 등용할 것.
#[[지조법]]을 개혁하여 간리(간사한 관리)를 근절하고 궁민(궁핍한 백성)을 구제하며 국가재정을 충실히 할 것
#내시부를 폐지하고 그 중 재능 있는 자를 등용할 것.
#국가에 해독을 끼친 탐관오리를 처벌할 것.
#각도의 환자([[환곡]])를 영구히 폐지할 것.
#[[규장각]]을 폐지할 것.
#급히 순사를 두어 도적을 방지할 것.
#[[혜상공국]]을 혁파할 것.
#유배·금고된 죄인을 다시 조사하여 석방할 것.
#4영을 합쳐 1영으로 하고, 그 중 장정을 선발하여 [[근위대]]를 설치할 것.
#모든 국가재정을 [[호조]]에서 관할케 하고 그 밖의 재무관청은 혁파할 것.
#대신과 [[참찬]]은 매일 [[의정부]]에서 회의하여 정령을 공포, 시행할 것.
#[[의정부]] [[6조]] 외 일체 불필요한 관청을 혁파하고 대신과 [[참찬]]이 협의처리할 것.

===사후처리===
궁지에 몰린 일본은 역으로 공세적으로 나섰다. 조선에게 [[일본]] 공사관 훼손과 일본인 피해에 대한 책임을 지라며 '[[한성조]]'을 체결하였고, [[이토 히로부미]]를 보내어 [[이홍장]]과 담판을 짓게 하였다. 그리하여 [[천진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중요 내용은 '조선에 무슨 일이 생기면 [[청나라]]군과 [[일본군]]은 동시에 파병하고, 동시에 철수한다.'는 내용이다. 이것을 근거로 일본은 조선에 개입할 수 있는 작은 여지를 남겨두었다.

한편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 일행은 몹시 불우한 나날을 보냈다. 이미 이용가치를 잃었다고 본 [[일본]]은 이 망명객들을 냉대했다. 10년 후인 [[1894년]], [[김옥균]]은 [[청나라]]로 건너갔다가 [[미국]] 조계의 한 여관에서 수구파 [[홍종우]]에게 암살당했다. [[홍종우]]는 [[김옥균]]이 갑신정변 때 죄없는 사람들을 살해하고, 국왕을 선동하여 나라를 혼란케 하고, 외국군대를 이끌고 궁중에 들어오고, 아시아의 국제관계에 큰 해를 끼쳤기 때문에 살해했다고 밝혔다. 다른 망명객들은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1894년]] [[갑오개혁]] 이후에 조선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평가===
갑신정변이 실패한 가장 큰 원인은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한 데 있다. [[개화파]]는 농민이나 상인층의 지지를 얻으려는 어떤 구체적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 또 하나, 외세에 대한 인식 부족을 들지 않을 수 없다. [[개화파]]는 반청의식만 강했을 뿐 외세, 특히 [[일본]]의 침략의도를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문명개화=일본화라고 생각하여 [[일본]]을 모델로 삼는 데 그친 것이다.

당시 서울의 상인·빈민들은 [[개화파]]에 강한 적대감마저 품고 있었다. 자신의 생활기반을 위협해오는 [[일본]]에 밀착된 [[개화파]]가 좋게 보일 리 없었다. 실제로 [[일본]]은 [[조선]]에 침투하는 한 방법으로 늘 '내정개혁'을 외쳤다. 민중은 [[개화파]]의 [[근대화]]정책이 일본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개화파]]의 사상적 미숙함에도 불구하고 갑신정변은 그 지향으로 보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개혁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분류:조선]]
[[분류:사건]]
익명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