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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부흥 운동

2,992 바이트 추가됨, 2009년 1월 11일 (일)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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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고구려를 계승하거나 혹은 부흥 시키기 위한 군사적·정치적 행위를 총괄한다.
===[[요동]]에서의 부흥운동===
[[요동]]에서는 [[안시성]]과 [[요동성]], [[신성]] 등 11개 성이 [[당나라]] 군대에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였다. 이 중 특히 [[안시성]]의 [[양만춘]]과 [[고연무]] 등이 대표적이다. [[670년]], [[고연무]]와 [[신라]] 장군 [[설오유]]가 이끄는 연합군이 [[압록강]]을 넘어 [[당나라]] 군대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671년]] [[안시성]]이 함락되면서 요동 지역에서의 [[고구려]] 부흥운동은 위기를 맞게 된다. 이후 [[백수산 전투]]([[672년]]), [[호로하]] 저항선 붕괴([[673년]]) 등으로 인해서 요동 지역의 고구려 부흥운동은 쇠약해지게 된다. 패배한 고구려 군은 [[한반도]]로 내려와 [[안승]]과 합류하게 된다. 또한 이 시기 많은 유민들이 동만주로 이주하다 훗날 [[발해]] 건국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한반도]]에서의 부흥운동===
한반도에서는 [[검모잠]]과 [[안승]]의 부흥운동이 대표적이다. 검모잠은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추대하고 [[한성]](현재의 재령)을 근거지로 삼아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신라]]는 [[당나라]] 군의 분산을 위하여 이들 고구려 부흥운동 세력을 지원했다. 안승은 요동지역에서의 부흥운동이 실패하자 [[금마저]](익산)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신라]] [[문무왕]]은 안승에게 보덕국왕에 봉하고 고구려 유민들을 동원하여 [[나당 전쟁]]에서 승리를 이끌게 된다.
===[[당나라]]의 대응===
당나라는 장수 [[고간]], [[이근행]]을 보내어 요동과 한반도 지역을 정벌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끝내 신라-고구려 부흥군을 막아내지 못하고 한반도 정벌은 실패하고 말았다.
===[[고구려]] 부흥의식의 계승===
[[당나라]]는 [[요동]] 지역의 안정을 위하여 마지막 임금이었던 [[보장왕]]을 파견하였다([[677년]]). 그러나 보장왕은 요동성을 근거지로 고구려 부흥운동을 이끌려 했다는 것이 발각되어 본국으로 소환되었다. 이후 요동 지역에는 [[연남생]]을 보내어 안정을 꾀하려 하였으나 결국 실패하였고, 요동지역은 무주공산이 되었다. 이 지역은 역사학자들이 '[[소고구려]]국'이라고 부르게 된다.

한편 [[당나라]]에 끌려 갔던 고구려 유민들은 집단을 이루며 살았고, 상당한 기간 동안 고구려 의식이 남아 있었다. 이들 가운데 영주 지역에 끌려갔던 유민들은 [[대조영]]의 지휘 아래 탈출하여 발해를 건국했으며, 당나라 내륙에 있던 이들은 [[이정기]]의 [[제나라(이씨)]] 건국에 참여하였다.
[[분류:고구려]]
[[분류: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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