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

전한(서한)

진나라가 멸망하자, 유방은 파촉과 한중 지역에서 힘을 길러 기원전 202년 항우를 깨뜨리고 천하를 통일하였다. 수도는 장안으로 하였다. 진나라가 너무 완고한 법치주의를 실시하다가 실패하였으므로 한 고조는 법제를 느슨하게 하고, 부분적으로는 봉건제를 부활하고 주요 지역에는 군현제를 실시하는 `군국제`를 바탕으로 나라를 안정시켰다.

3대 황제인 한 문제와 4대 황제인 한 경제 시대 착실하게 국력을 닦았다. 한편 봉건 제후세력의 힘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추은령`을 내려, 그들의 세력을 분할하고 삭감하였으며, 이에 반발하는 오초칠국의 난을 잘 막아내어 중앙집권체제 강화의 기회를 맞이하였다. 한 무제 때에 이르러서는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고, 유교를 중시하며, 법치주의를 부활시켰다. 또한 제후들의 힘을 지속적으로 약화시켰다.

한편 한 무제는 서역 원정 및 남방, 고조선 원정으로 한나라의 국력을 떨치고, 흉노족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났다. 하지만 이때부터 시작된 재정난과 황권이 강해짐에 따라 황제 측근에 위치한 외척과 환관들의 발호가 시작되었다. 이후 계속된 정치적 혼란으로 외척세력이 정권을 장악하였고, 기원전 8년에는 외척 출신인 왕망이 정권을 탈취하고 신나라를 세우게 된다.

후한(동한)

왕망의 통치는 호족세력과의 충돌로 인해서 오래 가지 못하고 한 광무제 유수가 후한을 건국하고, 낙양을 수도로 하였다. 후한 왕조는 사실상 호족 연합체 왕조였다. 따라서 황권은 한계가 있었다. 서기 100년이 지나면서 다시 외척들이 정치에 간섭하기 시작했으며, 황제는 외척을 견제하기 위해서 환관을 등용하는 등 정치적인 악수가 이어졌다. 이에 유교적 교양을 지닌 관리와 학자들의 대반격이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당고의 화`이다. 이때 환관들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게 되었고, 한나라의 정치는 엉망이 되어갔다.

또한 이민족의 침입과 힘겹게 살아가던 농민들의 반란(황건적의 난)은 비틀거리는 한나라에 일격을 가했다(180년 무렵). 그리하여 중앙정치는 사실상 상실되었고, 지방 호족들이 군웅을 겨루게 되었다. 치열한 군웅쟁탈전 끝에 중국 중북부를 통일한 조조와 남동부를 장악한 손권, 서부를 차지한 유비가 대립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중국 삼국시대이다.

한나라는 이미 190년 무렵에 멸망한 것이나 다름 없었지만 공식적으로 멸망한 것은 서기 220년 조조의 아들 조비가 황위를 찬탈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