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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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시아 대륙의 다수를 차지하고 13억의 인구를 거느린 나라. 공식국호는 중화인민공화국. China, 지나 등으로 불린다. 대만과 관련된 항목을 보시려면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국가개요

중화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 of China) 아래 통계치는 CIA world-factbook에서 근거하였습니다.[1]

  • 인구: 1,321,851,888명(2007년 7월 추정치)
  • 면적: 957만 2900㎢(세계3위)
  • 수도: 베이징(북경)
  • 통화: 위안(Y)
  • GDP: 10조 1700억 달러(2006년 말, 세계2위)
  • 1인당 국민소득: 7,700달러(2006년, 109위)
  • 노동인구: 7억 9800만(2006년)

영토

북동쪽으로 북한·러시아 연방, 서쪽으로는 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타지키스탄, 남서쪽으로는 인도·파키스탄·네팔·부탄, 남쪽으로는 미얀마·베트남·라오스, 북쪽으로는 몽골·러시아 연방과 각각 국경을 이룬다. 행정구역은 22개성(省), 5개 자치구(自治區), 4개 직할시(直轄市), 2개 특별행정구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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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중국의 역사

하나라, 상나라(은나라) 시대

요임금순임금의 뒤를 이어 우임금이 치수에 성공하여 선양받은 하나라섬서성·감숙성 일대의 앙소문화에서시작하여 강력한 통치세력을 갖춘 부족 공동체로 발전한 중국 최초의 나라이다.

신석기 시대 말기와 청동기 시대에 해당하며 우임금이 사망한 후 그의 아들이 왕위를 이어 부자 상속을 기반으로 한 세습 왕조 체제를 열었다.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하나라의 실체가 서서히 밝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동기를 사용하였으나 여전히 석기가 보편적인 도구였으며 비교적 간단한 정치 체제를 유지하였고 역법을 최초로 사용하여 1년을 12개월로 나누었다. 하나라기원전 1988년 경에 시작하여 기원전 1579년 경까지 존속하였다.

중국은 상나라 시대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역사가 발전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는 청동기 문화가 고도로 발달하고, 갑골문자를 활용하였으며, 사회적으로는 씨족공동체와 신분제가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대규모 수리시설의 부족으로 농경지는 제한되어 있었으며, 주변에는 수렵민족이 농경민들을 노리고 있었다. 그들은 은족을 중심으로 연합하게 되고, 그 연합체가 상나라의 모태가 되었으리라 추정된다. 그러나 그 지위는 불안정하여 5번이나 수도를 옮긴 끝에 현재 은허(하남성 안양현 인근)에 정착하게 되었다.

상나라는 갑골을 불에 태워 신의 뜻을 묻는 신정정치를 통해서(갑골문자 형성) 나라를 운영하였으며, 10개의 태양이 매일 하나씩 나타난다고 믿었다.(10간의 탄생.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 신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피정복민을 수 백, 수 천 명씩 제물로 바쳤으며, 농경지의 확대와 제물의 확보를 위하여 끊임없이 정복전쟁을 펼쳤다. 상나라에서는 제사를 은족을 비롯한 각 부족이 공동으로 받들어, 그들의 동질성을 강조하여 나라를 유지하려 하였다. 이 시대에는 대규모 순장도 행해졌다.

상나라는 피지배층에 대한 잔혹한 지배와(대게 제사를 위하여) 끊임없는 정복전쟁으로 인한 국력소모, 지배층의 낭비 등으로 인하여 주나라에게 멸망을 당하였다.

상나라의 존속기간은 기원전 1600년경~기원전 1046년까지이다.

서주시대

주나라를 건국한 시조인 후직 이래 계속적인 발전을 계속하여 고공단보계력 때 그 세력이 크게 성장하였다. 주족은 목야에서 상나라 주왕의 대군을 격파하고, 주나라를 건국하였다. 수도는 호경으로 하였다. 천하를 장악한 주나라는 넓어진 영토와 많은 백성들을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한 방안을 고심하다 '봉건제'를 고안해 내었다.

당시의 지배체제로서는 애초에 중앙에서 북중국 전역을 통치할 수 없으며, 그러면 그나마 믿을 수 있는 왕실의 혈통에게 전국토를 제후로 임명하고, 다스리게 하였다. 제후는 주나라 왕에 의해서 봉해졌으며, 공물과 병력을 바쳐서 충성을 맹세했다. 반면 주나라 왕실은 제후들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혈연과 제사를 강조하여 공동의 조상을 섬기는 한 집안임을 계속 인지시켰다.

아울러 천명사상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유포하여 주왕실의 전통은 '하늘의 명령'이라고 강조하였다. 주나라상나라와 마찬가지로 제사의식으로 지배체제를 확고히 하였으나, 상나라와 같이 대규모 인신제물은 사라졌다.

주나라기원전 770년 유목민 견융의 침입을 받았다. 주나라 유왕은 여산 기슭에서 살해당하고, 주나라는 도읍을 동쪽의 낙읍(낙양 인근)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 때부터 '동주시대'라고 부른다. 호경에 비해서 낙읍은 상대적으로 동쪽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유목민의 침입으로 쫓기듯 수도를 옮긴 주나라 왕실은 이 사건으로 인해서 명백하게 한계를 드러내었고, 이는 힘있는 제후국들에게 '기회'를 제공하였다.

춘추전국시대(동주시대)

주나라 왕실의 나약함을 본 제후국들은 주나라 왕실에 대한 경외감이 사라지고, 사실상 주나라 왕실을 무시한 채 제후국들이 실력대결을 펼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춘추전국시대이다.

춘추시대에서는 그나마 아직까지 주나라 왕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지켰으며, 이웃 나약한 제후국들에게도 '먼 친척'이기 때문에 국권을 유지해주었으나, 전국시대에 이르면 그마저도 사라지고 약육강식의 실력사회로 성장하게 된다.

또한 이 시기에는 철기문화가 도입되어 부국강병을 꿈꾸는 여러 나라들에 의해서 적극적으로 보급, 활용되었다. 그로 인해서 우경의 시작한 것을 비롯하여 농업생산력이 크게 발전하였다. 그리고 강력한 제후국들은 넓어진 영토와 많은 인구, 대규모의 군대를 관리하기 위하여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정비하게 되었고, 이는 후에 중앙집권국가인 '진나라'의 등장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춘추시대는 기원전 770년~기원전 453년(혹은 기원전 403년)이며, 전국시대는 기원전 453년(혹은 기원전 403년)~기원전 221년 진나라의 천하통일 시점까지이다. 춘추시대를 대표하는 제후국들은 '제, 진(晉), 초, 송, 진(秦), 오, 월'이며 이들 중 5개 나라를 일컬어 '춘추 5패'라고 부른다. 전국시대에는 대다수의 제후국들이 큰 제후국들에게 흡수되고 최종적으로 7개국이 남는데, 이는 '진(秦), 한(韓), 위, 조, 초, 제, 연'이다.

이 시기에는 다양한 사상들이 나와서 중국문명의 밑거름을 형성하는데, 이를 '제자백가'라고 한다.

진나라

진나라중국 대륙에서 전반적으로 서북지역에 치우쳐 있는(섬서성 일대) 제후국이었다. 이 지역은 주나라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진나라기원전 362년 효공이 제위에 오르자 실적에 따라 신분을 조정하고, 군사조직과 토지제도를 혁신하여 조세(租稅)를 공평하게 했으며, 병농(兵農)을 일치시켰다. 그리하여 종래의 '읍'이 아닌 '현'이라는 행정단위가 발생하게 되었다. 현은 임금의 힘이 현내의 일반 백성과 직접 미칠 수 있으므로 중앙집권체제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이 당시 이와 같은 개혁안을 내놓은 사람이 상앙(商鞅)이다.

기원전 325년 혜문왕은 스스로 '왕'을 선언하였다. 진나라는 주나라를 멸망시키고(기원전 256년) 대대적인 팽창정책을 펼쳤다. 또한 내부적으로는 법가사상을 모태로 강력한 중앙집권책을 완성해 나갔다. 기원전 230년 (韓)나라를 시작으로 기원전 221년에는 제나라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모든 나라를 멸망시키고 최초로 중국대륙을 통일하였다.

진나라는 천하를 통일한 이후 강력한 법치주의를 실천했으며, 봉건제를 폐지하고 전국을 군(당시 36개군)과 현으로 재편하여 황제 직속으로 하였다. 또한 법가사상과 실용성 있는 학문을 제외하고는 모두 배척하는 분서갱유를 단행하였다. 영토를 더욱 넓혀서 흉노를 몰아내고 각국의 장성을 연결하여 '만리장성'을 구축했다. 남쪽으로는 북 베트남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현재 중국대륙의 기본적인 영역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천하를 통일한 시황제가 죽고 나서, 가혹한 통치에 반발하는 농민들의 봉기, 옛 봉건제후들의 봉기, 궁정내부의 혼란 등으로 나라가 흔들리다 진왕 자영기원전 207년 유방에게 항복함으로써 멸망하였다. 진나라의 이름은 중국을 일컫는 '차이나(china)'의 어원이 되었다.

한나라

기원전 206년유방에 의해서 장안을 도읍으로 하고 건국되었다. 한나라는 당장 진나라와 같은 획일적인 중앙집권제를 실시하지 않고, 장안 인근의 지역에는 황제의 직속령을 설치하고, 나머지 지역에는 제후들에게 분봉하는 소위 '군국제'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한나라 황제는 유방 이후 50년 간의 제후들과의 갈등을 극복하면서 끊임없이 중앙집권화를 시도하였고, 한 무제시대에는 통일된 중앙집권국가를 공고히 하였다. 한나라 전기에는 정치적으로는 전국적으로 고도의 집중과 통일을 실현하였으며, 경제적으로는 대규모의 수리공사를 일으켜 농업기술과 수공업 상업이 크게 발전하여 많은 중요한 도시가 출현하였다. 군사적으로는 북방의 흉노를 물리쳐서 서역으로 통하는 무역로를 개척하였으며, 영토를 확장하고 국제무역을 촉진시켰다. 과학 문화적으로는 많은 발명가와 사상가 문학가 역사학가들이 출현하였다. 이는 중국문명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잦은 전쟁과 강력한 황제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재정이 필요하였으며, 이를 위해서 농민들에게 과도한 세금과 전매제를 통한 경제통제가 이루어졌다. 결국 농민들은 지방 호족들에게 경제력을 의탁하게 되었고, 호족들이 지방권력을 장악함에 따라 중앙권력은 약해졌다. 게다가 강력한 황제권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키운 외척과 환관세력들은 곧 권력을 장악하여 허수아비 황제 아래 치열한 정쟁을 일삼는 등 정치, 사회, 경제적인 혼란이 이어졌다. 이를 기회로 삼아 왕망한나라를 일시적으로 폐지하고 신나라를 건국하였다.(서기 8년)

그러나 신나라의 급진적인 정책은 호족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고, 한나라 부흥세력과 호족세력의 연합으로 신나라는 붕괴되고, 다시 한나라가 복권되었다.(후한 건국: 서기 25년)

후한왕조가 통치한 195년간 중국의 봉건사회는 계속적으로 발전하였지만 여러 가지 모순도 더욱 심화되었다. 후한 후기에는 중앙집권 세력이 약화되고 군웅할거 세력이 강대해졌으며, 군웅들 사이에 격렬한 권력쟁탈이 일어난 동시에 황건적의 난이 발발하였다. 후에 군웅들은 황건적의 난을 무력으로 진압하였지만 중앙권력은 유명무실해지고, 군벌의 대혼전이 일어났다. 여러 군벌들의 대혼전을 거쳐 최후에 (魏) (蜀) (吳) 세 나라가 정립하는 국면이 형성되어 삼국시대가 시작되었다.

왕망의 '신나라'

왕망은 외척으로서 9살인 평제(平帝)를 옹립하고 자신의 딸을 황후로 만들어 정치의 실권을 잡았다. 그는 어린 황제를 보필한 공로를 인정받아 안한공(安漢公)이라는 칭호를 받았지만 서기 5년에 반란을 일으켜 평제를 살해했다. 서기 8년 자신이 제위에 올라 국호를 신(新)이라 하고 당시 유행하던 참위설(讖緯說)로 제위찬탈을 정당화했다.

유학을 열렬히 신봉했던 왕망은 제위에 오르자 고대 주나라의 제도를 모방한 유교주의적인 이상국가를 건설하고자 각종 개혁에 착수했다. 고대 주나라와 같이 삼공(三公)과 구경(九卿) 이하의 관직을 제정하고, 토지문제에서는 왕토사상(王土思想)에 기초하여 토지소유를 제한하고(토지국유화) 토지와 노비의 매매를 금지했다. 화폐는 기존에 통용되던 오수전을 폐지하고 새로 대전(大錢)을 주조했으며, 도화(刀貨)·포화(布貨)·화천(貨泉) 등의 수십 가지 화폐를 발행했다. 이상의 여러 개혁들로 인해 경제적 혼란이 일어나 곳곳에서 농민반란이 발생했다. 또한 흉노족의 침입을 허용하는 등 대외정책에 있어서도 많은 문제가 나타났다.

결정적으로 서기 18년 산동성 낭야(琅邪)에서 일어난 '적미의 난'은 번숭(樊崇)의 지휘 아래 거대한 집단을 형성하고 장안까지 침입했다. 호족들은 스스로의 보호를 위해 무장했는데 그 가운데에는 농민군과 협력하여 왕망 정권에 반기를 든 사람들도 다수 있었다.

호족들과 농민들의 반란으로 휘청하던 신나라는 서기 23년, 불과 15년 만에 붕괴되고 만다. 혹자는 왕망신나라를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라고 칭하기도 한다.

삼국시대, 서진시대

후한 말엽, 황건적의 난과 중앙정부의 혼란으로 한나라는 뿌리 채 흔들리게 된다. 이 틈을 타서 지방 토호들이 자립하였다. 이들은 크게 3개의 세력으로 결집되는데, 하나는 중원에 위치한 조조의 "위나라", 또 하나는 대륙 서부에 위치한 유비의 "촉나라", 나머지 하나는 양자강 이남을 차지한 "오나라"였다.

이들은 각자 나라를 발전시켜가면서 주변 민족들을 토벌하여 한족의 영향력을 넓혔다. 오나라는 저장·장시 등의 산지에 사는 산월(山越)을 굴복시켰고, 촉나라는 재상 제갈량(諸葛亮)이 국정을 보좌하여 윈난[雲南] 지방의 원주민을 복속시켰다. 그러나 이 두 나라보다는 중원에 위치하여 세력을 키운 위나라(魏)의 국력이 가장 강했다. 위나라사마의(司馬懿)의 아들인 사마소(司馬昭)의 계획에 따라 263년 촉으로 토벌군을 보내 항복시켰다. 사마의의 손자 사마염(司馬炎)은 265년 제위를 물려받아 서진(晉)을 세웠다. 서진280년 오나라를 평정하여 천하통일을 달성했다.

통일 후 무제, 즉 사마염은 자신의 일족을 여러 나라의 왕으로 봉했다. 또한 봉왕(封王)의 권한을 강화하기 위해 그들에게 병권을 주어 지방관을 다스리도록 했다. 이것은 관리들에게 봉왕에 대한 충성심을 갖게 하고 봉왕은 황제에게 충성하도록 하여 관리들에 대한 황제의 지배를 강화하려는 의도에서 나왔다. 그러나 사실상 봉왕제의 강화가 도리어 동족간의 싸움을 격화시켜 '8왕의 난(팔왕의 난)'(291년~306년)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이때 여러 왕들이 흉노를 비롯한 북방민족의 무력을 이용함으로써 이들 민족은 본격적으로 중원의 분쟁에 개입하게 되었다. 결국 316년 흉노의 유씨(劉氏)에 의해 낙양장안이 함락됨으로써 서진은 멸망했다.

5호 16국 시대

서진이 멸망하자, 사마예가 "건업"(지금의 "남경")에서 나라를 세우니, 이 나라가 바로 "동진"이다. 그러나 중국대륙의 중북부 지역은 5개의 이민족에 의해서 16개의 나라들이 차례로 일어서고 무너지는 대 혼돈이 벌어졌다. "5호"는 몽골계의 흉노, 갈족, 티베트계의 저족, 강족, 투르크계의 선비족 등 다섯 이민족들을 말한다.

이 무렵, 이민족이 지배한 중북부 지역은 다양한 문화와 유입되고, 이민족들도 '한족화' 되는 등 중국 역사가 발전해가는 시기였다. 또한 양자강 이남 지역은 비교적 우수한 문물을 지니고 있었던 사람들이 내려오면서 경제적·정치적으로 발전해 나갔다.

북쪽에 위치한 이민족들은 예상과 달리 사대부를 존중하고, 정통성을 강조했으며, 한족의 문화를 받아들였다. 또한 많은 이민족들이 불교를 받아들이고, 통치이념으로 세우면서 불교문화가 대량으로 유입되었다.

남북조시대

남쪽의 한족 왕조와 북쪽의 이민족 왕조가 공존한 시기이다. 먼저 북쪽은 선비족 출신인 '북위'가 강성하였는데, 북위태무제가 강북지역을 통합(439년)하고, 정치적 안정을 이룬다. 그러나 북위동위서위로 분열되고, 동위북제로, 서위북주로 왕조가 교체되었다. 북주북제를 멸망시키고 강북지방을 잠시 통일하였으나, 곧 외척인 양견이 왕조를 교체하고 수나라를 건국한다(581년). 이 수나라가 남쪽의 '진나라'를 멸망시킴으로서 중국을 통일하였다(589년).

이 시기 남조에서는 귀족정치가 강화되어 황제권은 바닥에 떨어졌으며, 그런 결과로 별다른 이유 없이 왕조가 쉽게 교체되었다. 반면 북조에서는 황제권이 강화되는 현상이 보였다. 이 무렵 남북조 할 것 없이, 모두 불교를 숭상하였다. 차이가 있다면 북조의 불교는 '국가통치이념'으로서의 불교였다. 또한 도교도 숭상되었다.

남조의 귀족문화는 화려함과 사치의 절정에 달했다. 반면 북조에서는 윈강석굴과 같은 대규모 불교건축을 장려하여 불교문화의 큰 발전을 일궈내었다.

수나라

581년 북주(北周)의 외척 양견(楊堅: 수 문제)이 북주를 멸망시키고 수나라를 건립하였다. 수 문제 양견은 검소한 정치를 단행한 황제이다. 그는 중국의 남북통일을 새롭게 실현시키고 서진(西晋) 이래 약 300년간 지속된 동란과 분열의 국면을 종결시켰으며, 통일을 공고히 하기 위한 여러 가지 조치를 통하여 전국을 안정시킴으로써 사회는 번영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특히 그는 유명한 과거제를 실시하여 유교이념으로 무장한 신하·다양한 출신의 인재를 등용하여 황제권을 강화시키고, 나라를 안정화시켰다. 이 과거제는 동아시아 전체에 퍼지게 된다.

문제의 뒤를 이은 수 양제는 대운하를 건설하여 하북과 하남지역의 경제적 통합을 이루려 하였다. 또한 천하통일을 목표로 고구려 대원정을 일으키는 등 의욕적으로 사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대운하 건설과 고구려 원정으로 수나라의 국력을 피폐해졌고, 수나라의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이때 사방에서 토호들이 일어나니 수나라는 고작 37년 만에 무너지고 말았다.(618년)

당나라

수나라 말엽에 일어난 여러 토호를 제압하고 당 태조 이연이 당나라를 세웠다.(618년) 이연의 뒤를 이은 당 태종 이세민은 "정관의 치"를 일궈내 당나라의 기반을 다지고, 이어 측천무후의 통치, 당 현종의 치세 등이 이어지면서 당나라는 명실상부 동아시아 최강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 시기 당나라에서는 '과거제'가 안정적으로 정착되고, 3성 6부제, 균전제, 조용조, 부병제(국민개병제의 일종) 등이 맞물려 돌아가면서 한족 역사상 최고의 국가체제를 일궈낸다. 이 시스템은 중국에서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에서도 국가체제의 표본으로 불릴 만큼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안사의 난 이후 기울기 시작한 당나라는 사방에 난립한 절도사들의 독립, 조용조 제도의 붕괴 등으로 서서히 몰락해간다. 그러다 결정적으로 황소의 난을 겪고 나서 치명타를 입게 된다. 그리고 907년 주전충에 의해서 멸망당하게 된다.

5대 10국시대

송나라

금나라, 남송시대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

중화민국과 군벌시대

중화인민공화국(현대)

행정구역

각 성

직할시

자치구

특별 행정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