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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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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4대 임금. 재위([[1418년]]~[[1450년]]). 생몰연대([[1397년]]~[[1450년]])
{{틀:조선 역대 왕계표}}
===[[유교]]지배체제 확립===
초기에는 [[6조 직계제]]를 이어받았으나 이후 [[의정부서사제]]를 실시하였다. [[1420년]]에 [[집현전]]을 재설치하여 젊은 학자들을 길러내고, [[숭유억불정책]]을 계속 이어받아 전국 18개소의 사찰만 인정하였다. 유교적 사회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효행록]], [[삼강행실도]], [[주자가례]] 등을 편찬하여 전국에 보급하였다.

===[[조선]] 체제 정비===
지방 향리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수령의 권한을 강화시켰으며, 관리들의 등용체제와 녹봉체제를 개편하였다. 또한 언론을 활성화 하기 위하여 여러 시책들을 시행하였으며 [[1430년]]에는 17만호를 대상으로 일종의 여론조사를 시행하기도 하였다.

[[1435년]], 일종의 법전인 [[속육전]]을 편찬하였다. 형벌제도를 보완하여 피심문자가 가혹한 형벌에서 벗어나도록 하였고, [[노비]]를 주인이 마음대로 벌주지 못하게 하였다.

조세제도로서는 [[전분 6등법]]과 [[연분 9등법]]을 실시하여 조세 형평성을 고려하였으며, 조세 수취 과정에서 지주나 관리들의 수탈을 막았다. 기본세율은 1/10에서 1/20으로 낮췄다.

===대외정책===
[[여진족]]을 소탕하여 [[서북 4군]]과 [[동북 6진]](이를 [[4군 6진]]이라고 한다.)을 설치하였으며, 이곳에 백성들을 이주해 살게 하였다. [[왜구]]에 대해서도 강경책을 사용하여 [[쓰시마 섬]]을 정벌하였다.([[1419년]]) 그러나 온건책도 병행하여 [[1423년]]에 [[삼포]]를 개항하였다. (쓰시마 섬 정벌은 조선 태종의 권한으로 시행되었다.)

===문화와 과학의 발달===
세종은 수많은 연구, 학술 활동을 장려하여 많은 책들이 간행되거나 출판되었다. 〈[[고려사]]〉·〈[[고려사절요]]〉·〈[[자치통감]]훈의〉 등의 역사서, 〈[[사서언해]]〉·〈대학연의언해〉·〈[[효행록]]〉·〈[[삼강행실도]]〉·〈[[오례의주]]〉 등 유교경전과 유교윤리에 관한 서적, 〈[[명황계감]] 明皇誡鑑〉·〈[[치평요람]] 治平要覽〉 등의 중국정치서, 〈[[운회언역]]〉·〈[[용비어천가]]〉·〈[[동국정운]]〉 등 [[훈민정음]]이나 음운·언해 관계 서적, 〈[[팔도지리지]]〉·〈[[조선전도]]〉·[[세종실록 지리지]] 등의 지리서, 〈[[향약집성방]]〉·〈[[의방유취]]〉 등의 의서, 〈[[농사직설]]〉 등의 농서를 비롯하여 중국법률·중국문학·천문·병서 등 다양한 범위에서 행해졌다. 궁중음악을 정리하여 박연을 시켜 아악의 토대를 쌓게 하였다.

과학기술로서는 [[해시계]], [[물시계]], [[측우기]] 등을 발명하였으며, 이 당시 [[장영실]]이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금속활자를 수 차례 만들어 경자자(庚子字 : 1420)·[[갑인자]](甲寅字 : 1434)·병진자(丙辰字 : 1436) 등을 주조하였다. 게다가 중국과 [[이슬람]]의 역법을 보완하여 [[칠정산]]이라는 역서를 만들어 조선은 독자적인 역법을 가지게 되었다. 화포와 도량형도 개량하였다.

그리고 최대 업적인 [[한글]]을 창제하여([[1443년]]), [[1446년]]에 반포하였다. 말기에는 시력과 건강이 나빠져 정사를 못 돌보았다. 그리하여 세자([[조선 문종]])가 대리하여 일을 처리하기도 하였다.
[[그림:조선 세종.jpg|[[조선]] 4대 임금 세종|frame]]

[[분류:조선]]
[[분류:임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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