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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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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高宗, [[1852년]] 7월 25일 - [[1919년]] 1월 21일)은 [[조선]]의 제 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광무황제'''(光武皇帝, 재위 [[1897년]]-[[1907년]])이다. 본명은 재황(載晃). 아명은 명복(命福). 자는 성림(聖臨). 호는 주연(珠淵). 시호는 고종통천융운조극돈윤정성광의명공대덕요준순휘우모탕경응명립기지화신렬외훈홍업계기선력건행곤정영의홍휴수강문헌무장인익정효황제(高宗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文憲武章仁翼貞孝皇帝).

===조선 고종 임금===

[[흥선 대원군]]의 차남이다. [[조선 철종|철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흥선 대원군]]과 [[익종 조대비|조대비]]의 후원으로 12세에 즉위하였다. 장남인 [[이재면]] 대신 그가 왕위에 오른 것은 나이가 어려 섭정을 하기 수월해서이다. 즉위 후 10년은 [[흥선 대원군]]이 섭정을 하였다. 즉위 초기는 서구 열강의 개항 압력이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노골화되어 [[프랑스]]([[1866년]]), [[미국]]([[1871년]]) 등과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겪었으나, [[흥선 대원군]]의 단호한 집념으로 이들을 모두 물리쳤다. 국내적으로는 부정부패의 온상이었던 [[서원]]을 대폭 정리하여 오직 47개소만 남겼다. 정비는 여흥 민씨 집안의 딸을 왕비로 맞으니 곧 [[명성황후]]이다. [[1873년]] [[흥선 대원군]]의 섭정은 [[최익현]]의 탄핵을 받아 끝나고, 비로소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으나, [[명성황후]]를 위시한 [[민씨척족]]에 종속되는 경향을 보였다. [[1876년]] [[일본]]의 압력으로 [[강화도 조약]](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한 후 조선은 개항을 가속화하였다.

[[1882년]] [[청나라]]의 중재로 [[조선]]-[[미국]] 수호 조약([[조미수호조약]])의 체결을 시초로 구미 각국과 수교하고 [[1883년]]에는 [[민영익]] 등 [[보빙사]](報聘使)를 미국 등 서방에 파견하여 [[임오군란]]([[1882년]]) 이후 비대해진 [[청나라]] 세력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 당시 [[김옥균]], [[박영효]]([[조선 철종|철종]]의 사위) 등 [[개화파]]가 고종을 보필하였으나 고종의 입장은 중립적이었으며 [[갑신정변]]은 [[청나라]]의 군사적 압력으로 급진 [[개화파]]의 혁명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후 [[청나라]]의 직접적인 내정간섭이 시작되고, [[러시아]]의 위협 증대와 이에 대항하여 [[영국]] 군함이 [[거문도]]를 일방적으로 점령([[1885년]]-[[1887년]])하는 등 외세에 의한 위협이 증대되었다.

이후 소강 상태를 거쳐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을 계기로 청나라와 [[일본]] 양국 군대가 조선에 들어오고 마침내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그때 고종은 [[김홍집]] 등 온건 [[개화파]]를 등용하여 [[갑오개혁]]을 시행하고 개국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홍범 14조]]를 발표함으로써 본격적인 개화의 문을 열었다.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난 직후 [[명성황후]]가 [[러시아]]와의 접근을 시도하다가 [[1895년]]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되었다.([[을미사변]]) 고종은 [[김홍집]] 내각의 건의로 [[을미개혁]]을 시행하여 연호를 건양으로 고치고 태양력을 채용하였으며 [[단발령]]을 공포했는데 이것은 양반 사대부들을 자극하여 [[의병운동]]이 일어나는 시발점이 되었다.

[[1896년]] 2월 고종은 당시 친러파였던 [[이완용]] 등의 끈질긴 종용으로 왕세자와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는 [[아관파천]]을 단행하였으며, [[김홍집]] 내각은 붕괴되었다.

===대한제국 고종황제===

이후 [[러시아]]의 영향력이 막강해지고 열강의 이권 각축 경향을 보였으나 고종은 [[1897년]] [[덕수궁]]으로 환궁하고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라 정하고 황제로 즉위하였다. 이후 미국에서 유학하고 귀국한 서재필 등이 [[독립협회]]를 창단하여 대한 독립의 공고화와 입헌군주제의 수립을 호소했으나 조정의 보수 대신들이 지원하는 [[황국협회]]가 새로이 결성되어 양측은 노골적으로 대결하였다. 결국 고종은 두 단체를 모두 해산시키고 정국은 다시 소강 상태가 되었다.

고종은 황제로 즉위한 이후부터 전제 군주적 개혁인 '[[광무개혁]]'을 시도하고, 강력한 황권으로 근대적 개혁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이는 열강들의 비협조 속에서 표류하게 되었고, 고종 황제는 열강의 지지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 각종 이권을 넘기는 등 정책상의 오류를 낳았다. 시대적 흐름과 반대되는 전제 군주적 개혁정책은 성공하기 힘들었다.

[[1904년]], [[한반도]]의 주도권을 놓고 [[일본]]과 [[러시아]]가 대립하자 고종 황제는 급히 '중립국 선언'을 하여 [[한반도]]에서 양국의 충돌을 막아보려 하였으나, 두 나라는 이를 무시하고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러일전쟁]]의 결과 승리한 [[일본]]은 차츰차츰 [[대한제국]]의 국권을 빼앗기 시작한다. [[1905년]]에는 [[제2차 한일협약]](을사조약)을 통해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이 빼앗았다. 고종 황제는 이 조약이 무효임을 증명하고, [[대한제국]]의 보존을 위해서 국제사회에 호소하기로 마음먹고, [[만국평화회의]]에 비밀리에 사절단을 보낸다. 그러나 이것마저 실패하고, 되려 일본의 반격에 밀려 황제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만다. ([[1907년]])

이후 고종 황제는 '태상황'으로 불리우며 정치일선에서 물러나게 된다. 그러나 44년에 걸친 치세로 인해서 정치적 영향력은 막강하였다. [[국권피탈]]이후 고종 황제는 '이태왕'으로 격이 낮아졌다. 그러나 고종 황제는 [[국권피탈]] 이후에도 외국 망명을 비롯한 국제적으로 [[국권피탈]]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런 고종 황제의 존재는 일제에게는 매우 걸리적 거리는 존재였고, [[일제]]는 고종 황제를 독살해 버린다. ([[1919년]] 1월 →[[고종 황제 독살설]]) 고종 황제의 장례는 [[1919년]] 3월 3일에 열렸으며, 이 장례에 참석하기 위해서 3월 1일에 많은 사람들이 [[서울]]로 몰렸고, 이때 [[3.1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관련링크===
*[[명성황후]]
*[[흥선 대원군]]
*[[대한제국]]
*[[고종 황제 독살설]]

[[분류:조선]]
[[분류:임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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