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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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동아시아에서 태평양으로 접어드는 열도에 위치해 있다. 국가체제는 입헌군주정이다.

역사

고대

일본의 신석기 시대는 '조몬 문화'라고 하여 농경과 수렵을 중심으로 경제 생활을 유지하였다. 그러다 기원전 2~3세기에 한반도로부터 선진 철기문화가 도래되면서 야요이 문화기에 접어들었다. 이 시기에 야마타이코쿠라는 나라를 비롯하여 수 십개의 소국이 성립되기 시작하였다.

4세기가 되면서부터 일본은 본격적으로 역사가 발달하기 시작한다. 국가체제가 조금씩 형성되고, 한반도 고대왕조들의 영향 아래 일본에서는 소국이 흡수·통합되는 과정을 겪는다. 전방후원분을 위시로 한 대규모 고분은 강력한 권력체제가 등장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준다. 그리하여 이 시기를 '고분 문화'라고 한다.

일본 내에서 신라계와 백제계의 치열한 다툼 끝에 결국 백제계가 승리하고, 백제계를 중심으로 한 고대국가가 성립된다. 이 시기를 '아스카 시대'라고 한다. 명실상부한 국가체제가 성립되고, 율령체제도 정립된다. 중국과의 교류도 활발해져 견수사견당사가 연이어 파견되었다.

다이카 개신을 통하여 천황중심의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고, 연호와 일본이라는 국호도 만들었다. 8세기경 토지가 개척되고, 문벌가문의 대토지 소유가 일상화되면서 일본식 장원체제가 성립되었다. 이로 인해서 지방의 호족과 토호세력이 성장하고, 중앙집권체제는 붕괴되면서 기나긴 분열의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중세

장원체제가 완성되자, 장원체제를 수호할 무사집단이 형성되었다. 사무라이들이 바로 그들이다. 사무라이라는 무력기반과 장원이라는 경제기반은 사실상 호족들의 자립을 가져다주었고, 중앙집권의 붕괴를 의미했다. 호족 가운데서 강력한 호족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무늬만 남은 천황으로부터 '쇼군'의 칭호를 받고 전국을 제패하니, 이것이 바로 '막부시대'의 시작이다. 12세기말 가마쿠라 막부에서 시작된 막부시대는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가 이뤄질 때까지 지속된다.

13, 14세기에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이 막부에 다시 도전하는 시도가 있었으나, 오히려 실패하고 일본 남북조 시대를 거치면서 천황가는 완전히 껍데기만 남아 근근히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완벽한 호족 무사집단의 우위가 확정되는 순간이다. 막부는 전국을 통치하기 위하여 봉건제를 실시하고, 막부가 각 지역의 영주를 통치하고, 영주들이 소영주인 가신들을 통치하는 피라미드 형태로 전국을 운영하려 하였으나, 이런 간접적인 통제로는 전국을 장악하기 어려웠다. 곧이어 전국에서 오로지 힘이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지배하는 시대가 열리니, 이것이 바로 일본 전국시대이다.

16세기 후반 일본의 일본 전국시대는 몇몇의 강력한 세력으로 정리된다. 이들은 다케다 신겐,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의 순으로 전국을 장악하였으며, 오다 노부나가가 실질적으로 최초로 전국을 통일하였으나 오래가지 못하였고, 그의 가신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조선을 공격하였으나(임진왜란), 실패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오랫동안 기회를 노리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전국을 재통일하고, 통치를 굳건히 하여 '에도 막부'를 건설하게 된다. 이 무렵, 네덜란드를 비롯한 유럽 열강들과 최초의 접촉이 있었으며, 이들에게 기독교와 총포 등을 수입하여 훗날 일본 근대화의 씨앗을 뿌리게 된다.

에도 막부는 전국을 250개의 영지로 분리(사실상 소국)하고, 다이묘(영주)들에게 분배하였다. 이것은 얼핏 보기에는 지방권력을 강화시킨 것처럼 보이지만 강력한 무력을 바탕으로 다이묘를 끊임없이 감시하고, 백성들끼리도 연대책임을 묻는 등 지방권력을 적절히 통제하였다. 또한 쇄국정책을 사용하여 지방세력이 강력해지는 것을 통제하였다. 하지만 이 쇄국정책은 언제든지 열릴 가능성이 있는 쇄국정책이었다.

에도 막부는 자신의 지배이념을 확립하기 위하여 천황 중심으로 한 관념체계를 설정하였다. 하지만 그 천황은 형이상학적 위치에 존재할 뿐, 현실에 있어서는 책임지지 않는 그런 존재일 뿐이다. 에도 막부는 천황을 위시한 충효 관념을 바탕으로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확보하였다.

근현대

1853년 미국페리 제독이 이끄는 함대가 일본을 침공하였다. 일본은 이 함대의 공격에 무릎을 꿇고, 개항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막부체제는 혼돈에 휩싸였다. 당시 19세기에 들어서 민중의 저항이 거세지면서 에도 막부는 몇 차례의 개혁을 발표하였으나, 구체제를 유지하려는 낡은 개혁에 불과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외압에 의한 개항은 막부의 권위를 크게 떨어뜨렸고, 젊은 막부타도세력들이 결집하여 메이지 천황을 중심으로 막부를 타도하니, 이것이 바로 메이지 유신이다.

유신 이후 천황을 중심으로 한 권력체제로 재편되고, 강력한 산업화 정책으로 일본은 재빠르게 근대국가로 나아가게 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농촌경제 등의 수많은 모순들을 낳게 되자, 이를 타도하기 위하여 조선을 강제로 개항시키면서 스스로 제국주의의 길로 나아가게 되었다.

1889년 대일본제국헌법이 반포되고, 천황주권을 바탕으로 귀족세력이 의회를 장악하는 입헌군주제의 일면을 갖췄다. 일본은 군사력을 바탕으로 계속 팽창을 시도하여 청일전쟁으로 조선의 지배권을 확립하고(1894년), 대만과 유구(오끼나와 제도)를 지배하여 제국주의 국가로서 위상을 갖추게 되었다. 최종적으로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만주일대까지 그 세력을 뻗침으로서 제국주의 열강으로서 기반을 확고히 하였다.

그러나 가시적인 성과와는 달리 내부적으로는 사회모순과 민생피폐로 사회가 휘청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일본사회의 대안으로 사회주의 세력이 급성장하였으나, 철저한 탄압으로 사회주의 세력의 확대는 한계가 있었다.

일본이 내부적으로 여러 문제를 고민하고 있을 무렵, 세계 대공황이 닥쳤다. 일본은 독일과 마찬가지로 이것을 파시즘으로 극복하려 하였다. 군부세력은 각종 정치사변과 쿠데타로 정치세력을 말살시키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만주사변중일전쟁으로 대외팽창을 시도하였다. 1940년, 군부파시즘 세력은 내각을 총사퇴시키고 사실상 전쟁체제로 국가를 이끌었다.

일본은 독일·이탈리아와 함께 삼국동맹을 맺어 2차 세계대전의 주축국이 되었다. 이에 미국영국, 네덜란드의 대일본 봉쇄가 시작되었고, 이를 해소하기 위하여 일본은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태평양 전쟁 초기에는 연전연승하여 전 동남아 지역과 일부 오세아니아 지역을 비롯하여 태평양 일대를 휩쓰는가 하였지만 미국의 거센반격으로 미드웨이 해전 이후에는 패퇴는 거듭하였다. 그리고 1945년 8월 15일에 무조건 항복을 하기에 이른다.

일본은 항복이 조인된 1945년 9월 2일부터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미 군정 하에 있었다. 군대와 재벌을 해체하고, 천황은 정무에서 손을 떼고, 자유민주주의적 체제로 나아갔다. 이것은 일본을 중심으로 소련에 대한 방어선을 깔려고 하는 미국의 의도에서 이뤄진 것이다. 미국은 일본을 지원하여 경제적 성장을 도왔으며, 철저히 미국의 우산 아래에서 미국의 통제권 아래 두려고 하였다.

일본은 국권을 회복한 이후 다양한 세력이 참여하는 정당정치를 이루었다. 그러나 파시즘을 기반으로 한 일본 극우주의세력은 타 세력을 억압하고 자유민주당이 전후 지속적으로 정권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왔으며, 재벌중심의 경제체제를 다시 일구었다. 또한 군대보유를 금지하는 헌법 9조의 개정을 노력하면서 다시금 제국주의 국가로 발돋음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정치

사회

경제

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