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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서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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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스페인 전쟁"이라고도 한다. [[1895년]] [[쿠바]]인의 [[스페인]] 본국에 대한 반란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이 반란은 스페인 본국의 쿠바인에 대한 압정(壓政)과, 설탕에 대한 관세에 따른 경제적 불황이 그 직접 원인이었다. 이와 같은 쿠바인의 대(對)스페인 반란은 [[1868년]]과 [[1878년]]에도 있었으나, 그 당시는 [[미국]]이 [[쿠바]]인을 후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90년대에 접어들자 정세는 크게 변화하였다. 첫째, [[미국]]인의 [[쿠바]]에 대한 경제적 관심이 현저하게 높아져서 [[쿠바]]의 설탕 생산에 타격을 주는 일은 많은 [[미국]]의 투자가에게 손실이었다.

둘째, [[미국]] 내에는 [[1840년]]대에 일어났던 ‘명백한 천명(天命)’이라는 생각이 다시 일어나 미개발지역에 [[미국]]인이 만든 문화를 나누어 준다는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미국]]인에게 주어진 지상명령이라고 생각하여, [[스페인]]의 압정에 시달리는 [[쿠바]]인을 도와야 한다는 분위기가 강하게 미국인 사이에 퍼졌다.

셋째, 언론의 발전에 수반하여 퓰리처의 《뉴욕 월드》와 허스트의 《뉴욕 저널》 등 신문이 발행부수를 늘리기 위한 치열한 경쟁을 벌여, 사실을 과장해서 보도하거나 [[군국주의]]를 구가하기도 해서 점차 전국적으로 해외진출의 기운을 조장하고 있었다.

따라서 [[1895년]]에 일어난 [[쿠바]]의 반란에 즈음해서는, [[미국]]은 처음부터 문제의 와중(渦中)에 휩쓸렸다. 많은 의용병이 [[쿠바]]인을 돕기 위해 쿠바로 향하였고, 또한 [[뉴욕]]에 본거지를 둔 [[쿠바]]인의 혁명단체가 발매(發賣)한 공채도 잘 팔렸다. 해외진출에 반대한 [[미국]]인들조차 [[쿠바]]의 해방 자체에는 찬성하였으며, [[쿠바]]에 재산을 둔 미국인은 물론 그 보호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독점자본은 모처럼 찾아든 호경기(好景氣)에 영향을 끼친다는 이유로 [[미국]]의 [[쿠바]] 간섭에 반대하였다.

[[스페인]]과 [[미국]] 사이에는 직접 전쟁을 유발할만한 중요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고 있었으나, [[스페인]]의 [[쿠바]]인에 대한 태도에 대해서는 그것이 학대라든지, 압정이라는 식으로 신문에 보도되어, [[미국]]인으로 하여금 스페인에 악감정을 가지게 하는 결과가 되었다. 의회가 결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은 불간섭 방침을 견지하였으나, [[매킨리]]는 [[1896년]]에 실시되는 [[대통령]]선거의 공약으로서 [[쿠바]]의 독립을 내세웠다.

[[1898년]] 2월 [[스페인]] 공사(公使) [[데 로메]]가 [[매킨리]]를 비난하는 사신(私信)이 허스트계(系)의 신문에 폭로된 일과 쿠바에 있는 미국인의 생명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파견된 군함 메인호가 아바나항(港)에서 격침된 사건으로 해서 여론은 급격히 전쟁으로 기울어졌다. 이에 따라 4월 11일 대통령은 대(對)[[스페인]] 개전요청(開戰要請) 교서를 의회에 보내고, 20일 의회가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양국은 전쟁상태에 들어갔다. [[미국]]군은 마닐라만(灣) ·[[산티아고]] 등 여러 곳에서 승리를 거두어 전쟁은 불과 수개월 만에 끝났다.

전쟁결과 12월 10일에는 [[파리 조약]]이 체결되어 [[쿠바]]는 독립하고, [[푸에르토리코]] ·[[괌]] ·[[필리핀]]은 [[미국]] 영토가 되었다.


[[분류:에스파냐]]
[[분류:미국]]
[[분류: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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