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뀜

당나라

3,357 바이트 추가됨, 2008년 7월 27일 (일) 10:38
편집 요약 없음
*[[618년]], [[당 고조]] 이연이 세운 [[중국]]통일왕조.

당 고조 이연의 뒤를 이은 [[당 태종]](이세민)대에 이르러 당나라는 크게 융성하였다. 당 태종 이세민은 [[고창국]]과 [[비단길]] 일대를 장악하고 [[돌궐]]을 정복하여 당나라의 영토를 크게 넓혔다. 또한 조세제도와 토지제도, 군사제도도 정비하였다. ([[조용조]]) 이러한 것들이 복합적으로 이뤄져 당나라 시대의 [[율령]] 체제가 완성되었다. [[당 태종]]의 이러한 치세를 두고 [[정관의 치]](貞觀-治)라고 부른다. 당나라는 이후 잠시 쇠퇴 하였다가 [[당 현종|현종]]이 즉위하자 당나라는 다시 전성기를 누리는 데 이를 [[개원의 치]](開元-治)라고 한다. 이 시기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경교]])가 [[불교]]와 더불어 꽃을 피울 정도로 문화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당 현종|현종]]은 안으로는 민생안정을 꾀하고 조운(漕運) 개량과 [[둔전]](屯田) 개발 등으로 경제를 충실히 하였으며, [[부병제]](府兵制)의 붕괴에 대처하여 신병제를 정비하여 다시 나라를 일으켰다. 또한 밖으로는 [[동돌궐]](東突厥), [[토번]](吐蕃), [[거란]](契丹) 등의 국경지대 방비를 튼튼히 하여, 수십 년의 태평천하를 구가하였다.

그러나 [[당 현종|현종]] 재위 말기부터 귀족들의 장원토지가 증가하여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755년]]에는 [[안사의 난]]이 일어났는데 이 사건은 중앙 정부의 통치력을 매우 약화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많은 농민들이 소작농이 되었다. 결국 당나라는 조세 제도는 [[양세법]], 군사 제도는 [[모병제]]로 바꾸었다. 수 많은 반란 속에서 [[절도사]]세력이 성장하였고 중앙정부에서는 [[환관]]과 외척들이 권력다툼을 벌였다. 결국 [[황소의 난]]을 거쳐 당나라는 [[절도사]]인 [[주전충]]에게 멸망하였다.

당나라의 중앙관제인 [[3성 6부]]제는 아시아 각국에서 활용되었으며, [[율령]]체제와 [[조용조]] 조세제도 등도 각 국의 모범이 되었다.

[[수나라]]때 실시 된 [[과거제]]도가 본격적으로 활성화되어 주요 관리들은 과거로 뽑았다. [[과거제]]에서는 [[유교]]에 관련된 서적에 대한 지식을 테스트했다. 그래서 [[유학]]과 문학이 크게 발달하였는데 당나라 때에는 [[훈고학]]이라는 것이 크게 발달하였다. 이로 인해 사상의 획일화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문학 역시 귀족 중심의 시가 발달하였는데 [[이백]]과 [[두보]]가 대표적인 시인이다.

종교적으로는 [[불교]]가 매우 발전하였고 [[현장]]이 지은 [[대당서역기]]라는 책은 [[인도]]와 동남 아시아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당나라 때는 무역이 크게 발달하였기 때문에 [[조로아스터교]],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마니교]] 등도 전파되었다. [[도교]]는 황실의 지원을 받았다.

아시아 각국에 영향을 미쳤으며 일본에서도 [[나라 시대]]와 [[헤이안 시대]]에 [[견당사]](遣唐使)를 파견하여 당나라 문물을 수입해갔다.

[[분류:당나라]]
익명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