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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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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검색어: ''"거란의 침공", "거란의 침입", "거란침입".''

[[요나라]]가 3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공한 일.

===배경===
[[고려]]의 [[북진 정책]]과 [[요나라]]의 동진 정책이 충돌, [[요나라]]의 [[중국]] 침공을 위한 후방 안정화의 일환으로 요나라는 [[고려]]를 3차례에 걸쳐 침공하였다.

[[거란]]의 [[요 태종|태종]]은 [[후진]]을 멸망시키고, 국호를 [[요나라]]로 바꿨다. 이 무렵 중국은 [[5대 10국]] 시대의 혼란을 극복하고 [[송나라]]로 정리되고 있었다. 결국 신흥 세력인 [[요나라]]와 [[송나라]]의 충돌은 동북아시아를 긴장상태로 몰아갔다.

이 동안 [[고려]]에서는 [[북진 정책]]의 일환으로, [[서경]] 천도를 계획하고, '[[광군]]'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30만 대군을 조직하면서 [[요나라]]의 침공에 대비하였다. [[962년]]에는 [[송나라]]와 손을 잡고 적극적으로 [[북진 정책]]을 추진하였다. 또한 [[발해]] 유민들이 세운 [[압록강]] 유역의 [[정안국]]도 [[요나라]]를 협공할 태세를 보이자, [[요나라]]는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다.

위기를 느낀 [[요나라]]는 [[986년]] [[정안국]]을 멸망시켰다. 하지만 [[요나라]]는 최종적으로 [[송나라]]를 정벌하기 위해서는 후방에 위치한 [[고려]] 정복의 필요성을 느꼈다.

===1차 침공===
[[993년]] [[요나라]]는 8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급습하였다. 이에 앞서 [[여진족]]이 먼저 [[고려]]에 [[요나라]]의 공격태세를 알렸으나, [[고려]] 조정에서는 [[여진족]]의 정보를 믿지 않았다.

또한 당시 [[고려]]는 [[요나라]]에 대항하는 태세가 정비되지 못하였다. 주화파와 강경파가 조정에서 맞서고 있었고, [[요나라]]군에 대항하는 체계도 통일되지 못하였다.

[[요나라]]군의 총사령관인 [[소손녕]]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였고, 곧 [[봉산]]군을 점령하였다. [[고려]] [[고려 성종|성종]]은 '청화사(화친을 청하는 사신)'을 보내어 [[고려]] 침공의 의도를 파악하게 하였다. 한편 [[요나라]]군은 [[개경]]으로 침공할 의사를 보이지 않고, 다만 [[고려]]의 항복을 요구하였다. 시간을 번 [[고려]] 조정은 [[서경]] 이북의 땅을 떼주고 [[요나라]]와 강화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었으나, 당시 중군사로 있던 [[서희]]는 이를 반대하였다. 그는 이번 [[요나라]]의 침공은 영토를 얻으려는 목적이 아니라 [[송나라]]와 [[고려]]의 연대를 끊고, [[요나라]]와 [[고려]]가 화친을 하여 [[요나라]]의 배후를 안정시키려는 목적임을 간파하였다. 그리하여 일단 한 번 싸운 다음 화친을 해도 된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요나라]]의 [[소손녕]]은 [[고려]]가 아무런 응답이 없자, [[안융진]]을 공격하였으나, 패퇴당하고 말았다. [[요나라]]의 기세가 꺾이자, [[서희]]가 담판에 나서 "[[요나라]]의 동경([[요양성]]. [[요동]]의 중심)은 옛 [[고구려]]의 땅이며, 양국 간의 화친을 맺으려면 양국 사이에 있는 [[여진족]]의 땅을 정벌하여 양국을 잇는 도로를 닦아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소손녕]]은 [[서희]]의 주장에 동의하고, [[송나라]]와 관계를 끊고 [[요나라]]에 조공한다는 조건으로 [[압록강]] 동쪽에 있는 [[여진족]]의 땅 280리를 [[고려]]가 소유하는 것을 묵인하였다. 이 땅이 바로 "[[강동 6주]]"이다.

화친이 성립된 이후 [[소손녕]]은 곧 군대를 몰고 물러갔다. 이렇게 1차 침공은 끝이 났다.

===2차 침공===
1차 침공 이후에도 [[고려]]는 여전히 '친송 정책'을 고수하고 있었다. 이에 [[요나라]]는 [[고려]]를 침공할 구실을 찾고 있었다. 때마침 [[강조 정변]]이 일어나 [[고려]] [[고려 현종|현종]]이 즉위하자, '[[강조]]에게 죄를 묻는다.'라는 구실로 [[요나라]]의 [[요 성종|성종]]이 친히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였다. 명분은 [[강조 정변]]을 문책한다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강동 6주]]의 전략적 가치를 재인식하고, [[송나라]]와 [[고려]]의 관계를 완전히 끊기 위한 침공이었다.

[[요나라]] [[요 성종|성종]]은 [[의주]] 인근의 [[홍화진]]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진로를 바꾸어 [[강조]]가 거느린 군대를 [[통주]] 부근에서 대파하였다. 이때 [[강조]]도 죽임을 당했다. 기세를 올린 [[요나라]]군은 [[서경]]과 인근 성을 공격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남하하여 [[개경]]을 점령하였다. [[개경]]은 [[요나라]]군의 만행으로 도시가 엉망이 되었으며, [[고려 현종|현종]]은 [[나주]]로 피신하였다.

이에 [[고려 현종|현종]]은 [[하공진]]을 '청화사(화친을 청하는 사신)'으로 보내어 강화를 요청하였다. 게다가 [[요나라]]는 [[개경]]의 점령에만 급급하여 병참선이 매우 부실하였다. [[요나라]]는 [[고려]]의 요청을 받아들여 '[[고려 현종|현종]]이 직접 [[요나라]]에 가겠다.'라는 약속을 받고 철군하였다.

철군하는 와중에도 [[요나라]] 군대는 [[귀주]] 인근에서 [[양규]], [[김숙흥]] 등의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3차 침공===
[[1011년]] [[개경]]으로 복귀한 [[고려 현종|현종]]은 약속과는 달리 [[요나라]]에 입조하지 않았다. [[고려 현종|현종]]이 병을 핑계로 삼아 [[요나라]]에 입조하지 않자, [[요나라]]는 [[강동 6주]]를 반환하라고 요구하였다. [[1014년]]부터는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하면서 [[강동 6주]]를 빼앗기 위해서 계속적으로 무력침공을 했지만, 번번히 실패하였다.

[[고려]]는 [[요나라]]와 국교를 끊고, [[요나라]]의 침공에 대비하였다. [[요나라]]는 [[1018년]] 12월 [[소배압]]의 지휘 아래 10만 대군을 이끌고 다시 [[고려]]를 침공하였다.

그러나 [[고려]]는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상원수에 [[감강참]], 부원수에 [[강민첨]]을 임명하고 20만 8천의 군사를 준비하였다. 두 장군은 [[홍화진]]으로 진격하여 [[의주]] 부군에서 [[요나라]] 군대를 대파하였다. 이에 [[소배압]]은 사잇길로 [[개경]]으로 진격하려 하였으나, 그마저도 [[강민첨]]에게 격파당했다.

[[1019년]] 1월, 어렵게 [[개경]]부근에 [[요나라]]군이 당도하였으나, 이미 승패는 결정난 상태였다. [[소배압]]은 사실상 승산이 없자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강감찬]]은 후퇴하는 [[요나라]]군을 [[귀주]]에서 대파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귀주]] 대첩"이다. [[요나라]]군은 불과 수 천명이 살아서 국경을 넘었다.

이듬해 [[1020년]] 5월에 [[고려]]와 [[요나라]]의 국교는 회복되었으며, [[고려]]는 [[요나라]]의 연호를 쓰고, [[송나라]]와의 교류를 끊는다는 것에 합의하였다. 하지만 [[고려]] 임금의 [[요나라]] 입조 문제, [[강동 6주]] 등의 문제는 [[요나라]]의 뜻대로 할 수 없었다.

[[분류:고려]]
[[분류: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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