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감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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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감찬(姜邯贊). 고려 초기의 문신(당시에는 문신이 군 총사령관직을 겸했다). 옛 이름은 '은천'

948년 삼한벽상공신 강궁진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고려 성종 때, 갑과에 장원급제하고 예부시랑이 되었다. 1010년 요나라성종이 40만 대군으로 침입하여(거란의 2차 침공) 강조가 30만 대군을 이끌고 나갔으나 패배하였다. 이때 많은 신하가 항복하기를 권했으나 강감찬은 홀로 반대하고, 나주로 피신한 고려 조정은 '하공진'을 보내 요나라 성종을 설득하여 군대를 물러가게 하였다.

그 뒤 한림학사, 서경 유수, 문하평장사를 차례로 역임하면서 왕의 총애를 받았다. 1018년 요나라성종은 다시 소배압을 보내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공격하게 하였다. 이때 강감찬은 서북면행영도통사로 있었는데 '상원수(총사령관)'로 임명되어 20만 8천 대군을 이끌게 되었다.

홍화진에서 요나라군의 배후를 공격한 뒤, 귀주에서 크게 승리하였다(귀주대첩). 이때 살아간 요나라군은 불과 수천 명에 불과하였다. 대승을 거두자 고려 현종은 친히 마중을 나와서 환영하였다. 곧이어 검교태위(檢校太尉), 문하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 천수현개국남(天水縣開國男)에 봉해지고 식읍 3백호를 받았으며,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의 호를 받았다.

그 이듬해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가 1030년 왕에게 청하여 성을 쌓고 문하시중이 되었으며, 이듬해 특진검교태사시중 천수군개국후(天水郡開國侯)에 봉해졌다. 후에 벼슬에서 스스로 물러나 조용히 살다가 1031년에 숨을 거두었다. 고려 조정은 그를 현종 묘정(廟庭)에 배향, 수태사중서령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