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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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 기원전후~562년 전후까지 한반도 중남부에 있었던 소국 연합체. 가야연맹, 가락국 등으로 불린다.

가야의 역사

명칭정리

  • 가야는 가락국, 가라, 가락, 임나 등으로도 쓰인다. 실제로 가야라는 이름은 별 뜻이 없는 이름이다.(아마 우리말 '가라'에서 유래되었으리라 짐작된다. '가라'라는 단어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시대별로 다양하게 표기되었다. 이 중에 임나라는 명칭은 주로 일본서기에서 쓰였다. 그러나 임나일본부설과는 전혀 무관한 말로서 고구려나 통일신라시대 사람들도 '임나'라고 썼으나 그 뜻은 '님의 나라'라고 정의할 수 있다.
  • 흔히 말하는 금관가야, 아라가야라는 이름은 고려 시대의 '삼국유사'에서 백제신라에 포함되지 않는 지역의 명칭을 고려시대 행정구역에 '가야'라는 단어를 붙여서 정리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불린것이다. 따라서 당시 고대인들은 따로 '~~가야'라는 이름을 쓰지 않았다.

가야국 정리

2개의 건국신화

현재 가야연맹의 탄생과정을 알 수 있는 것은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서 전하는 김해 가락국(금관가야) 건국신화,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고령현 '고령 가라국(오늘날 대가야로 불리는)'의 건국신화가 있다. 두 내용은 판이하게 다르다.

김해 가락국 신화에서는 알 6개가 구지봉에 내렸고, 여기서 가장 큰 알에서 가락국김수로왕이 나왔다고 전하고 있다. 고령 가라국 신화에서는 시조 주일(朱日. 붉은 태양)과 가락국 시조 청예(靑裔. 푸른 후손)이 형제관계로 설정되어 있다.

두 신화 모두 김해 가락국(금관가야)과 고령 가라국(오늘날 대가야로 불리는)이 모두 '하늘의 자손, 큰 나라'였다는 것을 강조하고, 두 나라가 연맹관계였다는 것을 증명한다.

가야사의 시대구분

가야사는 전기가야와 후기가야 2시기로 구분한다. 1~4세기경을 전기가야시대, 5~6세기를 후기가야시대라고 칭한다.

전기가야는 부산의 동래, 경남의 김해, 창원, 마산, 함안, 고성, 사천 등에 이르는 남해안 바닷길을 통하여 선진문물을(특히 철기문화) 받아들여 번성하였다. 후기가야는 고령, 합천, 거창, 남원, 하동, 진주, 의령 등의 서부 경남과 함안, 고성, 창녕 등의 경남 내륙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전기가야에서는 김해의 가락국(금관가야), 후기가야에서는 고령의 가라국(대가야)와 함안의 아라국(아라가야. 안나국이라고도 함)이 가장 큰 세력으로 활약하였다.

전기가야

가야와 낙랑: 가야의 여러 나라가 처음 등장했던 것은 남해안지역이다. 남해안에서 가야의 소국들이 먼저 성립했던 것은 바닷길을 통해 철기를 비롯한 선진문물이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진한의 군장이었던 염사치변한포(弁韓布) 15,000필을 낙랑군에 가져갔다. 변한은 가야이다. 염사치 설화는 초기 가야가 낙랑과 외교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증거가 됩니다.

김수로왕신라: 『삼국사기』에는 102년 8월, 가락국김수로왕경주에 갔다. 사로국(신라)의 동북쪽에서 일어난 국경분쟁을 조정해주기 위해서였다. 사로국은 국경 분쟁을 스스로 해결치 못해 연로한 김수로왕에게 중재를 부탁한 것이다. 국경 분쟁을 조정한 수로왕을 위해 연회가 베풀어졌지만, 한기부의 촌장이 참가하지 않았다. 이를 괘씸하게 여긴 김수로왕은 노비를 시켜 그 촌장을 죽이고 가락국으로 돌아왔다. 가락국532년신라에게 멸망당하지만, 초기에는 경주사로국 보다 훨씬 강력한 세력이었다. 이러한 김해 가락국경주 사로국 사이의 우열관계는 400년경부터 신라고구려에 의탁하기까지 계속되었을 것이다.

해상왕국: 3세기 후반에 편찬된 『삼국지』는 가락국을 비롯한 가야의 해상왕국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황해도의 대방군에서 일본열도로 가는 바닷길의 중심에 김해의 가야국이 기록되고 있다. 김해, 마산, 고성 등의 가야는 중국일본을 연결하는 고대 동아시아의 중개무역항이었다. 김해, 창원, 고성 등의 가야고분에서 출토되는 중국일본의 문물은 이런 사실을 증명해 줍니다.

김해 회현리 조개무지에서는 화천(왕망전)이라는 화폐가 출토되었다. 화천은 10년여 밖에 사용되지 못한 화폐이지만, 평양일본열도에서도 출토되고 있다. 3세기 경에 황해도에서 일본열도를 왕복하는 데는 2년 반 정도가 걸렸다. 한번 왕복하는데 2년 이상이 걸렸던 바닷길의 곳곳에 10년 밖에 통용되지 않은 화폐가 흔적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이 바닷길의 왕래가 얼마나 빈번했던 가를 보여준다. 김해를 비롯한 가야국은 가까운 마한진한은 물론, 멀게는 대방군과 일본열도로 철을 수출했다. 가야에서 생산된 철과 중국, 일본의 문물이 교환되었고, 가야의 여러 나라는 이를 바탕으로 성장하였다.

가야연맹체간의 전쟁: 바로 이러한 해상교역권에 대한 쟁탈전이 ‘포상팔국의 난’이었습니다. 창원, 마산, 고성 등의 포상팔국은 김해 가락국의 주도권에 도전했다. <삼국사기>에는 209~212년까지 전쟁으로 기록되었다. 포상팔국을 물리치지 못한 가락국신라에 구원을 요청했고, 포상팔국의 군대는 해로로 울산까지 진출했다. 남해안에서 벌어진 최초의 해전으로도 중요하지만, 가야국들이 서로 전쟁을 벌였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가락국의 건국신화에 보이는 형제와 같은 사이는 이미 아니었다. 문화적으로는 비슷하더라도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서는 전쟁도 불사해야 했던 관계였다.

고구려와의 전쟁: 313년에 고구려는 동방에서 중국세력을 완전히 내쫓았다. 한민족으로서는 반가운 일이지만, 남해의 가야국들에게는 그렇지 못하였다. 중국의 선진문물이 더 이상 공급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가야문화의 중심은 북부내륙으로 이동하게 된다. 그러나 보다 결정적인 계기는 400년에 광개토왕이 파견한 5만의 고구려 군이었을 것이다. 가야의 연합군에게 침략 받던 신라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했고, 고구려는 ‘임나가라’(김해, 고령,)의 성을 빼앗고, ‘안나국(함안. 아라국)’을 격파했다. 이제 남부의 가야는 쇠약해졌고, 고구려를 등에 업은 신라는 남부가야로의 진출을 꾀하게 된다.

전기가야연맹의 맹주는 김해의 가락국이었다.

철기문화를 기반으로 성립한 가야연맹체는 해상무역을 통해서 발전하다가 고구려의 공격으로 결정적인 타격을 받게 된다.

후기가야

대가야의 등장: 가야의 새 중심으로 등장한 고령의 가라국(대가야)는 479년중국남제에 외교사절을 파견하였다. 가야에서 중국과 직접 외교관계를 가진 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남제는 양자강 이남에 있었다. 경북 고령에서 양자강까지 도달했었을 행로를 생각해 본다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고령에서 합천으로 내려와 황강에서 배를 타고 낙동강으로 나오면 좀 낫겠지만, 낙동강 하구는 신라에 장악되어 있었다. 그러니 고령→합천→거창→함양→남원(운봉)의 육로를 거쳐, 배를 타고 섬진강을 내려와 하동에서 남해로 나섰을 것이다. 남해를 지나 서해안을 따라 북상하다 황해를 건너고, 다시 중국 연안을 따라 남하해서 겨우 양자강 하구에 도착했을 것이다. 더구나 이 때는 고구려백제도 왜도 사신을 보내지는 않았다. 대가야는 단독으로 외교사절단을 파견했던 것이다. 전북 부안의 죽막동 유적에서 대가야의 항아리에 가득히 담겨 출토된 유물들은 대가야의 외교사절이 해상의 안전을 기원하면서 제사를 지냈던 흔적이다.

신라의 구원전: 481년에 대가야백제와 연합하여 신라를 구원하는 전쟁에 나서게 된다. 대가야는 지금의 흥해에서 고구려와 말갈의 군대를 격파했다. 이러한 대가야의 움직임은 대가야가 자발적으로 신라백제의 편에 서서 고구려에 대항함으로써 한반도 세력의 균형과 자국의 독립을 유지하려 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김해 가락국(금관가야)의 쇠퇴: 496년에 김해의 가락국신라에 화친의 표시로 흰 꿩을 보냈다. 부산 동래 복천동 고분군에서는 5세기를 경계로 가야에서 신라의 문물로 바뀌고 있었다. 이제 신라고구려의 도움 없이도 낙동강 서쪽의 가야를 위협하게 되었다. 신라의 진출에 직면했던 가락국은 화친제의로 휜 꿩을 신라에 보냈던 것이다. 전기가야의 중심세력이었던 김해 가락국의 쇠퇴를 말해주는 기록입니다. 김해지역에서는 수없이 많은 가야고분이 조사되었다. 그러나 고령, 창녕, 함안에서 보는 대규모의 봉토분은 없었다. 김해에 이러한 대형고분이 없다는 것은 이미 가락국이 그럴만한 실력을 잃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532년에 신라에 투항한 것은 가락국 멸망의 마지막 절차에 불과했다.

결혼동맹: 남부가야가 신라에 병합되려 하자, 대가야는 522년에 신라와 결혼동맹을 맺었다. 왕실간의 결혼을 통해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하려 했을 것이다. 대가야왕과 신라왕녀는 왕자도 낳게 되었지만 양국의 동맹관계는 529년에 결렬된다. 529년은 서쪽의 백제가 섬진강을 따라 남하하여 다사(하동)를 석권하였다. 백제가 하동까지 진출하게 되자, 대가야는 서쪽과 동쪽의 백제신라를 동시에 상대해야 했다. 신라가 흔들리는 대가야와 동맹관계를 지속할 이유가 없었고, 곧 결혼동맹은 파탄에 이르게 되었다.

아라국(함안. 아라가야)의 외교: 신라가 김해와 창원 지역을 석권하자 제일 먼저 불안을 느낀 것은 함안의 아라국(함안. 아라가야)이었다. 6세기 전반에 아라왕은 대가야 등의 가야연맹체들과 공동 외교를 전개하였다. 국에서 파견된 사신들을 함안에 주재시키면서 의 세력을 이용하려 했고, 신라의 침략에는 친백제외교로, 백제의 진출에는 친신라외교를 통해 신라백제를 견제하면서, 가야의 독립을 유지해 보려 했었다. 그러나 554년대가야백제와 함께 관산성(옥천)에서 신라와의 전투에 참가했습니다만, 백제와 함께 참패를 경험하게 되었을 뿐이다. 이 전쟁에서 백제대가야는 무려 40,000여명이 넘는 전사자를 내었다. 백제의 타격도 컸겠지만, 대가야의 충격도 매우 컸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진흥왕555년 창녕지역에 비사벌정(比斯伐停)을 설치하여 중앙군단을 주둔시키고 가야정벌을 본격화하였다. 8년 뒤인 562년신라에 멸망하고 말았다.

후기가야는 고령의 가라국(대가야)이 신라의 공격에 무너진 562년에 붕괴된다. 앞선 532년에는 가락국(금관가야)의 구형왕신라에 항복하고, 560년에는 함안의 아라국신라에 멸망당한다.

가야의 정치

일반적으로 가야연맹체의 각 임금들은 단결하여 체계적으로 움직이기 보다는 개별적으로 움직였다. 큰 사건이나 문제가 있을 때, 임금들을 모아서 연맹회의를 개최하고, 공동으로 문제를 대응하였다. 그러나 포상팔국의 난에서 보다시피 소국의 이익을 위해서는 서로를 배신하는 행위도 일삼았다.

각 국의 독립성이 철저히 유지되었고, 연맹의 맹주는 연맹회의를 소집하였다. 이런 모습들은 중국 춘추시대 소국들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여겨진다. 후기가야연맹의 고령 가라국(대가야)는 나라 안에서는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였으나, 애초에 소국이라는 국가적 틀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가야연맹은 고대국가를 건설하지 못하고 결국 연맹체에서 시작하여, 연맹체에서 끝나고 만다.

가야의 외교

  • 남해안을 통하여 중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고, 중국에서 책봉까지 받았다. 그러나 후기가야연맹체로 이행하면서 남해안이 봉쇄되어 중국 선진문물을 수입하는 데 어려움이 따랐으리라 여겨진다.
  • 초기에는 신라를 압박할 정도로 강력한 국력을 자랑하였으나, 차츰차츰 신라백제세력에 눌림에 따라 친 신라정책과 친 백제정책을 번갈아 사용하였다.
  • 세력은 가야연맹체와 함께 해상활동을 하면서 서로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다.
  • 김해 가락국(금관가야)의 '허황옥 설화'에서 보다시피 가야연맹체는 넓은 해상활동을 통하여 인도에까지 그 발길이 미쳤음을 알 수 있다.

가야의 사회

당시 모든 소국이 그랬듯이 임금-부족장-평민-노비 순으로 대략적인 신분사회가 꾸려졌으리라 짐작된다. 이 외에도 '천군'을 위시한 제사장 사회가 따로 존재했다가 후기에 정치세력에 흡수되었으리라 짐작된다. 순장의 풍습도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여기까지는 고대 동방사회의 보편적인 모습)

또한 해상활동과 철기문화가 발달하였으므로 상인들과 장인들의 활동도 활발했다.

소국당 인구는 작은 나라의 경우 3000명 안팎에서 큰 나라의 경우 2만 명 이상까지 다양했다.

가야의 문화

가야의 철기문화

가야의 토기문화

가야의 불교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