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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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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高麗)는 남북국 시대의 [[신라]]와 [[발해]]를 계승한 한국의 왕조로서 [[918년]]에 [[고려 태조|태조 왕건]]이 나라를 세운 후, [[1392년]] [[조선]]에게 멸망하기까지 약 450여년 동안 한반도를 지배하였다.
== 역사 ==
=== 고려의 성립과 후삼국 통일 ===
9세기 말, [[신라]]에서는 왕위쟁탈전이 빈번히 발생하여 정치가 혼란해졌고 전국 각지에서는 조세 수취에 반발하여 농민 봉기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지방 [[호족]]들이 신라 조정으로부터 독립하여 각자 자신의 세력을 키웠는데 그 중에서도 [[견훤]]과 [[궁예]]가 가장 강한 세력을 구축하였으며, 이들은 주변 호족들을 통합하여 나라를 세워 왕이 되기에 이르렀다. [[견훤]]이 먼저 [[백제]]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후백제]]의 왕이 되었고, 뒤이어 [[궁예]]도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후고구려]]의 왕이 되었다. 이로써 [[후고구려]], [[후백제]], [[신라]] 삼국이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이 시기를 [[후삼국 시대]]라고 부른다.
이후 [[궁예]]가 강력한 개혁정책을 실시하자 [[호족]]들에 의해서 정권을 잃고, [[송악]]의 [[호족]] [[고려 태조|왕건]]이 신하들의 추대 형식을 빌려 왕위에 올라 나라의 이름을 고려라고 고쳤다. 이로부터 고려와 [[후백제]] 사이에서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으나 결국에는 고려가 [[신라]]의 항복을 받아내고([[935년]]), [[후백제]]를 멸망시켜 [[936년]]에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또한 [[926년]]에 [[발해]]가 [[요나라]]의 침략을 받고 멸망하자 왕족을 비롯한 유민들을 대거 받아들임으로써 [[한민족]]의 통일을 이루었다.
=== [[고려 광종]]의 개혁 정치 ===
[[고려 태조|태조]]의 뒤를 이은 [[고려 혜종|혜종]]과 [[고려 정종|정종]] 때에는 왕권이 불안정하여 왕족들과 외척들 사이에 왕위 계승 다툼이 일어났다. 이러한 왕권의 불안정은 [[고려 태조|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호족 세력을 규합하기 위하여 취하였던 혼인 정책 때문에 나타난 부작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즉위한 [[고려 광종|광종]]은 왕권의 안정과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정책을 추진하였다. 광종은 [[노비안검법]]을 실시하여 [[호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국가의 수입 기반을 확대하였다. 이로써 공신이나 [[호족]]의 경제적·군사적 기반은 약화된 반면, [[노비]]들이 양인이 되어 조세와 부역의 의무를 지게 되었으므로 국가의 재정 기반과 왕권이 좀더 안정되었다.
[[고려 광종|광종]]은 문예와 [[유교]] 경전을 시험하여 문반 관리를 선발하는 [[과거제]]를 시행하였다. [[과거제]]는 공신의 자제를 우선적으로 등용하던 종래의 관리 등용 제도를 억제하고, 새로운 관리 선발 기준을 마련한 것이다. 이를 통하여 [[고려 광종|광종]]은 유학을 익힌 신진 인사를 등용하여 신구 세력의 교체를 도모하였다. 이어서 지배층의 위계 질서를 확립하기 위하여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다.
일련의 개혁을 통하여 자신감을 갖게 된 광종은 본격적으로 공신과 [[호족]] 세력을 제거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이로써 왕조 성립 초기의 공신과 호족 세력이 크게 약화되고 왕권이 강화될 수 있었다. [[고려 광종|광종]]의 개혁은 [[고려 경종|경종]] 때의 경제 개편으로 이어져 중앙 관료들의 경제적 기반을 보장하기 위한 [[전시과]] 제도가 실시되었고, [[고려 성종|성종]] 때의 지배체제 정비로 이어져 통치 체제가 확립되었다.
=== 문벌 귀족 사회의 성립 ===
[[고려 성종|성종]] 이후 중앙 집권적인 국가 체제가 확립됨에 따라 중앙에서 새로운 지배층이 형성되어 갔다. 이들은 신라 말기 지방 [[호족]] 출신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고위 관직자들을 배출하였으며, [[문벌 귀족]]이라 불리었다. [[문벌 귀족]]들은 관직에 따라 과전을 받고, 자손에게 세습이 허용되는 [[공음전]]과 관직에 따라 혜택을 받았으며, 자기들끼리 혼인 관계를 맺는 폐쇄적인 통혼권을 형성하였고, 때로는 왕실과도 혼인 관계를 맺어 외척으로서의 지위를 이용하여 정치 권력과 경제력을 거의 독점하여 정국을 주도해 나가기도 하였다.
=== [[요나라]]의 침공 ===
10세기 초에 통일된 국가([[요나라]])를 세운 [[거란족]]은 [[송나라]]를 공격하기에 앞서 [[송나라]]와 연결되어 있던 [[정안국]]을 토벌하고 고려와의 관계를 개선하려 하였다. 고려에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북진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여 [[요나라]]는 고려에 여러 차례 침입해 왔다.
처음 [[요나라]]는 80만의 대군으로 침입해 왔다([[993년]]). [[요나라]]는 고려가 차지하고 있는 [[고구려]]의 옛 땅을 내놓을 것과 [[송나라]]와 교류를 끊고 자신들과 교류할 것을 요구하였다. 고려는 [[청천강]]에서 요나라의 침략을 저지하는 한편, [[서희]]가 [[요나라]]와 협상에 나섰다. 이 때 [[요나라]]로부터 고려가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인정받고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를 확보하는 한편, [[요나라]]와 교류할 것을 약속하였다.
[[요나라]]의 군대가 퇴각한 뒤 고려는 [[송나라]]와 친선 관계를 계속 유지하면서 [[요나라]]와 교류하려 하지 않았다. 이에 요나라는 [[강조의 정변]]을 계기로 [[강동 6주]]를 넘겨줄 것을 요구하면서 40만 대군으로 다시 침입해 왔다([[1010년]]). 이 때 [[개경]]이 함락되는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으나 요군의 배후에서 [[양규]]가 선전하였다. 이에 [[요나라]]는 퇴로가 차단될 것을 두려워하여 고려와 강화하고 물러갔다.
여러 차례 소규모의 침입을 시도하던 [[요나라]]는 다시 10만의 대군으로 침입해 왔다([[1018년]]). 개경 부근까지 침입해 온 [[요나라]]군은 도처에서 고려군의 저항을 받고 퇴각하던 중 [[귀주]]에서 [[강감찬]]이 지휘하는 고려군에게 섬멸되었다. 이 때 살아서 돌아간 [[요나라]]의 군사가 수천 명에 불과할 정도였다([[1019년]]). 이를 [[귀주 대첩]]이라 한다.
고려가 [[요나라]]의 계속되는 침략을 막아내자 [[요나라]]는 더 이상 고려를 공격할 수 없었고, [[송나라]]를 침입할 수도 없었다. 결국 고려가 [[요나라]]와 싸워서 승리함으로써 고려, [[송나라]], [[요나라]] 사이에는 세력의 균형이 유지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 고려는 국방을 강화하는 데 더욱 노력하였다. [[강감찬]]의 주장으로 [[개경]]에 나성을 쌓아 도성 수비를 강화하였고, 북쪽 국경 일대에 [[천리장성]]을 쌓아 [[요나라]]를 포함한 외세의 침입을 저지하려 하였다.
=== [[여진족]] 정벌과 9성 개척 ===
고려는 [[두만강]] 연안의 [[여진족]]을 경제적으로 도와주면서 회유 및 동화 정책을 펴서 이들을 포섭해 나갔다. 그러나 12세기 초 [[만주]] [[하얼빈]] 지방에서 일어난 [[완옌부]]의 추장이 여진족을 통합하면서 정주까지 남하하여 고려와 충돌을 빚게 되었다.
여진족과의 1차 접촉에서 패한 고려는 기병 중심의 여진족을 보병만으로 상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윤관]]의 건의에 따라 기병을 보강한 특수 부대인 [[별무반]]을 편성하여 여진 정별을 준비하였다. [[윤관]]은 [[별무반]]을 이끌고 [[천리장성]]을 넘어 여진족을 북방으로 쫓아 버리고([[1107년]]), 동북 지방 일대에 9성([[동북 9성]])을 쌓아 방어하였다. (이 [[동북 9성]]은 두만강 이북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생활 터전을 잃은 [[여진족]]의 계속된 침입으로 9성 수비에 어려움을 겪던 고려는 다시금 침략하지 않고 해마다 조공을 바치겠다는 [[여진족]]의 조건을 수락하고 1년 만에 9성을 돌려주었다. 고려의 처지에서도 서북쪽의 [[요나라]]와 대치하는 상황에서 [[여진족]] 방어에만 힘쓸 수 없었기 때문에 [[여진족]]의 조건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 후 [[여진족]]은 더욱 강성해져 만주 일대를 장악하면서 [[금나라]]를 세우고([[1115년]]), 고려에 군신 관계를 맺자고 압력을 가해 왔다. 고려는 그들의 사대 요구를 둘러싸고 정치적 분쟁을 겪기도 했지만, 현실적으로 [[금나라]]와 무력 충돌을 하기 어려운 점을 고려하여 결국 [[금나라]]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 [[이자겸의 난]]과 [[서경 천도 운동]] ===
11세기 이래 대표적인 [[문벌 귀족]]인 [[경원 이씨]] 가문은 왕실의 외척이 되어 80여 년간 정권을 잡았다. [[경원 이씨]]는 [[이자연]]의 딸이 [[고려 문종|문종]]의 왕후가 되면서 정치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하였고, [[이자연]]의 손자인 [[이자겸]]도 [[고려 예종|예종]]과 [[고려 인종|인종]]의 외척이 되어 집권하였다. 특히, [[이자겸]]은 [[고려 예종|예종]]을 [[고려 인종|인종]]이 왕위에 오를 수 있게 하면서 그 세력이 막강해졌다.
[[이자겸]] 세력은 대내적으로 문벌 중심의 질서를 유지하고 대외적으로 [[금나라]]와 타협하는 정치적 성향을 보였다. 반면 왕의 측근 세력들은 왕을 중심으로 결집하면서 [[이자겸]]의 권력 독점에 반대하고 나섰다.
이에 [[이자겸]]은 반대파를 제거하고 [[척준경]]과 함께 난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였다([[1126년]]). 그러나 [[이자겸]]이 [[척준경]]에 의하여 물러나고 [[척준경]]도 탄핵을 받아 축출됨으로써 [[이자겸]] 세력은 몰락하였다. [[이자겸의 난]]은 중앙 지배층 사이의 분열을 드러냄으로써 [[문벌 귀족]] 사회의 붕괴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자겸의 난]] 이후 [[고려 인종|인종]]은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며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한 정치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보수적 관리들과 [[묘청]]을 중심으로 한 지방 출신의 개혁적 관리들 사이에 대립이 벌어졌다.
[[묘청]] 세력은 풍수지리설을 내세워 서경으로 도읍을 옮겨, 보수적인 [[개경]]의 [[문벌 귀족]] 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면서 자주적인 혁신 정치를 시행하려 하였다. 이들은 [[평양|서경]]에 대화궁이라는 궁궐을 짓고, [[금나라]]를 정벌하자고 주장하였다.
반면 [[김부식]]이 중심이 된 [[개경]] 귀족 세력은 유교적 이념에 충실함으로써 사회 질서를 확립하자고 주장하였다. 아울러 이들은 민생 안정을 내세워 [[금나라]]와 사대 관계를 맺었다. 결국 이러한 정치 개혁과 대외 관계에 대한 의견 대립이 지역 간의 갈등으로까지 확대되었다.
[[묘청]] 세력은 [[평양|서경]] 천도를 통한 정권 장악이 어렵게 되자 [[평양|서경]]에서 나라의 이름을 [[대위국]](大爲國)이라 하고 연호를 천개(天開)라 하면서 난을 일으켰으나([[1135년]]), [[김부식]]이 이끈 관군의 공격으로 약 1년 만에 진압되고 말았다.
=== [[무신 정권]]의 성립 ===
12세기에 들어 고려의 지배층 내부에서는 [[문벌 귀족]]과 측근 세력 간에 정치권력을 둘러싼 대립이 치열해지기 시작해 정치가 혼란스러워지게 되었다. 이러한 때에 평소에 문신들만 우대받는 것에 불만이 고조되었던 무신들은 [[정중부]], [[이의방]] 등을 중심으로 [[1170년]]에 정변을 일으켜 다수의 문신들을 죽이고 [[고려 의종|의종]]을 폐하여 [[거제도]]로 귀양 보낸 후 허수아비 왕인 [[고려 명종|명종]]을 내세워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를 [[무신정변]]이라고 부른다.
[[무신정변]] 이후 무신들은 조정의 주요 관직들을 모두 독점하고 부를 늘려갔으며, 저마다 사병을 길러 서로 권력을 뺏고 빼앗기는 쟁탈전을 벌였다. 이 때문에 중앙 정부의 통제력은 갈수록 약화되어갔고 백성들에 대한 수탈은 더욱 심해져 여기저기에서 여러 차례 봉기가 일어났다.
=== 거란과 몽골과의 전쟁 ===
13세기 초 중국 대륙의 정세는 급박하게 변화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부족 단위로 유목 생활을 하던 [[몽골]]족이 통일된 국가를 형성하면서 [[금나라]]를 공격하여 북중국을 점령하였다.
이 때 [[금나라]]의 예하에 있던 [[거란]]족의 일부가 몽골에 쫓겨 고려로 침입해 왔다. 고려는 이들을 반격하여 [[강동성]]에서 포위하였고, [[거란족]]을 추격해 온 [[몽골]] 및 [[두만강]] 유역에 있던 [[동진국]]의 군대와 연합하여 [[거란]]족을 토벌하였다. 이후 [[몽골]]은 자신들이 [[거란]]족을 몰아내 준 은인이라고 내세우면서 지나친 공물을 요구해 왔다.
마침 고려에 왔던 몽골 사신 일행이 귀국하던 길에 국경 지대에서 피살되자 이를 구실로 몽골군이 침입해 왔다([[1231년]]). 힘겹게 [[의주]]를 점령한 [[몽골]]군은 [[귀주]]성에서 [[박서]]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히자 길을 돌려 [[개경]]을 포위하였다. 이에 고려는 몽골의 요구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몽골군도 큰 소득 없이 물러갔다.
그러나 당시 집권자인 [[최우]]는 몽골의 무리한 조공 요구와 간섭에 반발하여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고, 장기 항전을 위한 방비를 강화하였다. 이에 [[몽골]]군이 다시 침입해 왔으나 [[처인성]] 전투에서 장수 [[살리타]]가 [[김윤후]]가 이끄는 민병과 승병에 의해 사살되자 퇴각하였다. 이후 고려는 여러 차례의 몽골 침략을 끈질기게 막아 냈다.
[[강화도]]의 고려 조정은 주민들을 산성과 섬으로 피난시키고 항전과 외교를 병행하면서 저항하였다. 한편, 지배층들은 부처의 힘으로 외적을 방어하겠다는 마음으로 [[팔만대장경]]을 조판하였다. [[강화도]]의 고려 조정은 수로를 통하여 조세를 걷어 들여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장기간의 전쟁으로 국토는 황폐해지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아울로 [[황룡사]] 9층 목탑을 비롯한 수많은 문화재가 소실되었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몽골]]과 강화를 맺으려는 주화파가 득세하여 [[최씨 정권]]이 무너지고 전쟁은 끝이 났다. 그러나 고려 조정이 [[개경]]으로 환도하자 최씨 정권의 친위세력이었으며, 대몽항쟁에 적극적이었던 [[삼별초]]는 [[배중손]]의 지휘 아래 반기를 들었다. 이들은 장기 항전을 계획하고 [[진도]]로 옮겨 용장성을 쌓고 저항하였고, 여몽 연합군의 공격으로 [[진도]]가 함락되자 다시 [[제주도]]로 가서 [[김통정]]의 지휘 아래 계속 항쟁하였으나, 결국 완전히 진압되었다.
=== 원나라의 내정 간섭 ===
[[원나라]]의 침략을 받아 약 30년 동안 항전을 벌인 끝에 결국 강화가 성립되고 항전을 주도하던 [[최씨 정권]]은 붕괴되었다. 이와 함께 왕권이 회복되었지만 [[원나라]]의 정치적 간섭을 받게 되었다. 고려의 국왕은 [[원나라]]의 공주와 결혼하여 [[원나라]] 황제의 부마가 되었고, 왕실의 호칭과 격이 [[제후국]]에 걸맞은 것으로 격하되었다. 아울러 관제도 개편되고 격도 낮아졌다. 또 [[원나라]]는 화주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여 [[철령]] 이북의 땅을 빼앗았으며, [[자비령]] 이북의 땅도 차지하여 [[평양|서경]]에 [[동녕부]]를 설치하였다. 또한 [[제주도]]에는 [[삼별초]]를 제거한 뒤 [[탐라총관부]]를 설치하고 목마장을 경영하였다.
오랜 전쟁이 끝나고 사회가 안정되면서 새로운 지배 세력이 등장하였다. 이들을 이른바 [[권문세족]]이라고 하는데, 고려 전기부터 있던 [[문벌 귀족]] 일부와 무신집권기에 성장한 가문, 그리고 몽골어 통역관으로 출세하는 등 [[원나라]]와의 친선 관계를 통해 새로 등장한 가문으로 구성되었다. [[권문세족]]은 권력을 앞세워 민중의 토지를 빼앗아 광대한 농장을 만들고 양민을 억압하여 노비로 삼는 등 사회 모순을 다시 격화시켰고, [[원나라]]의 엄청난 공물요구는 고려를 피폐하게 만들었다.
=== [[신진 사대부]]의 성장 ===
고려 후기에는 [[원나라]]의 간섭과 [[권문세족]]의 착취와는 별개로 농업 기술은 꾸준히 발전하였다. 먼저 [[원나라]]와 전쟁 중에 고려의 독자적인 의술이 발달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인구가 증가하였으며, 그 결과 집약적 농업이 가능해졌다. 이러한 때에 [[중국]] 대륙으로부터 인분을 거름으로 사용하는 농업 기술이 전래되어 휴한을 극복하고 같은 땅에서 해마다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으며, 그 결과 농업 생산력이 크게 증대되었다.
새로운 농업을 도입하여 농업 생산력을 증대시킨 사람들은 주로 지방의 중소지주들이었다. 이들은 경제적 기반을 확대하고 점차 중앙관료로 진출하여 정치세력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들을 [[신진 사대부]]라고 한다. [[원나라]]의 간섭과 측근 정치로 인하여 관직으로의 진출이 제한되는 등 정치적 지위가 불안정하였던 [[신진 사대부]]는 [[성리학]]을 수용하여 학문적 기반으로 삼고 불교의 폐단을 시정하려 하였으며, 또한 토지 탈점 등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개혁을 주장하여, 결국 [[권문세족]]과 대립하게 되었다.
=== 고려 말의 개혁 정치와 멸망 ===
14세기 후반 [[원나라]]의 세력이 약화되자 [[공민왕]]은 반(反)[[원나라]] 운동을 일으켜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는데 성공하였다. [[공민왕]]은 [[원나라]]를 몰아낸 후 [[신돈]] 및 [[신진 사대부]]와 함께 대대적힌 사회 개혁을 추진해나갔다. 그리하여 [[권문세족]]이 부당하게 빼앗은 토지나 재산을 본래의 주인에데 돌려주고, 억울하게 노비로 전락한 사람들을 양민으로 해방시켜 주었다. 그러나 [[신돈]]이 제거되고, [[공민왕]]까지 시해되면서 [[권문세족]]이 다시 등장하여 정치 권력을 독점하면서 개혁은 중단되고 말았다. [[공민왕]] 때의 개혁 노력이 실패하자 정치기강이 문란해지고,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으로 고려는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이들의 침공을 막아내면서 신흥 무인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또한 신진 사대부는 고려를 멸망시키고 새 왕조를 열자는 급진적 신진 사대부와 고려 안에서 최후의 개혁시도를 해보자는 온건적 신진 사대부로 갈라지게 되었다.
대륙에 명나라가 등장하자, 고려는 [[명나라]]와 [[철령]] 이북의 땅을 둘러싸고 영토 갈등을 빚다가 끝내 [[요동]]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요동]]정벌군의 사령관 [[조선 태조|이성계]]는 어려운 나라 사정 때문에 [[명나라]]와의 전쟁은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위화도 회군]]으로 권력을 장악하였다.([[1388년]]) 급진적 [[신진 사대부]]는 신흥 무인세력인 [[조선 태조|이성계]]와 결탁하여 새 왕조를 열기 위한 작업을 펼쳤다. [[권문세족]]들을 몰아내고 이들의 경제적 기반을 붕괴시키고, 온건적 [[신진 사대부]], 고려에 충성하는 세력들을 모두 몰아낸 이후 [[1392년]]에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이라는 새로운 왕조를 건국하였다.
== 정치 ==
고려는 새로운 통일 왕조로서 커다란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고려의 성립은 고대 사회에서 중세 사회로 이행하는 한국 역사의 내재적 발전을 의미한다. [[신라]] 말기의 [[6두품]] 출신 지식인과 [[호족]] 출신을 중심으로 성립한 고려는 골품 위주의 [[신라]] 사회보다 더 개방적이었고, 통치 체제도 과거제를 실시하는 등 효율성과 합리성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정비되었다. 특히 사상적으로 [[유교]]의 정치 이념을 수용하여 고대적 성격을 벗어날 수 있었다.
중앙관제는 당나라의 [[3성 6부제]]를 기본으로 고려식으로 재편하였다.
[[군주]]가 스스로를 짐(朕), 궁궐을 황성(皇城), 군주의 존칭은 폐하(陛下), 차기 왕위를 예약한 왕자는 [[태자]](太子), 왕의 어머니는 [[태후]](太后), 군주의 명령은 조(詔)나 칙(勅)으로 불렀으며 궁궐 속 궁궐문을 제국에서만 사용하던 다섯 개로 만드는 등 사실상 제국에 걸맞는 제도와 규범을 갖추고, 또 주변국들로부터도 제국으로 인정받았으며, 이는 13세기 [[원나라]]에게 국권이 침탈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고려 시대는 외적의 침입이 유달리 많았던 시기였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줄기찬 항쟁으로 이를 극복할 수 있었다. 12세기 후반에 무신들이 일으킨 [[무신정변]]은 종전의 문신 귀족 중심의 사회를 변화 시키는 계기가 되어 신분이 낮은 사람도 정치적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이후, 무신 집권기와 원 간섭기를 지나 고려 후기에 이르러서는 새롭게 성장한 [[신진 사대부]]를 중심으로 성리학이 수용되어 합리적이고 민본적인 정치 이념이 성립되었고, 이에 따른 사회 개혁이 진전되었다.
== 경제 ==
고려는 후삼국 시기의 혼란을 극복하고 [[전시과]] 제도를 만드는 등 토지 제도를 정비하여 통치 체제의 토대를 확립하였다. 또, 문란해진 수취 체제를 다시 정비하면서 재정 운영에 필요한 관청도 설치하였다. 재정을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하여 토지와 인구를 파악하기 위한 양전 사업을 실시하고 [[호적]]을 작성하였다. 이것을 근거로 조세, 공물, 부역 등을 부과하였다. 아울러 국가가 주도하여 산업을 재편하면서 경작지를 확대시키고, 상업과 수공업의 체제를 확립하여 안정된 경제 기반을 확보하였다.
농업에서는 기술의 발달로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었고, 상업은 시전을 중심으로 도시 상업이 발달하면서 점차 지방에서도 상업 활동이 증가하였다. 수공업도 관영 수공업 중심에서 점차 사원이나 농민을 중심으로한 민간 수공업을 중심으로 발전해 갔다.
== 사회 ==
고려사회는 신분사회였다. 귀족, 중인, 평민, 천민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귀족들은 문반, 무반, 귀족과 왕족이고 중인은 서리와 기술관이다. 귀족과 중인은 지배층이고 피지배층은 평민과 천민이 있다. 귀족은 [[공작]](公爵), [[후작]](侯爵) 등의 작위를 수여하는 등 중세적 특징을 뚜렷하게 나타내었다.평민은 농민, 수공업자, 상인이 있는데 농민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천민은 노비와 [[향·소·부곡]]민, 화척, 재인등이 있었다.
== 문화 ==
고려 초기에는 과거제와 함께 한문학이 크게 발달하였고, [[고려 성종]] 이후부터는 문치주의가 성행함에 따라 필수 교양으로 발전하였다. 이로 인해 여러 우수한 시인들이 많이 등장하게 되었다.
고려인들은 자신들의 사치 생활을 충족하기 위하여 다양한 예술 작품들을 만들어 즐겼으므로 예술 면에서도 큰 발전을 이룩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분야는 공예였다. 공예는 생활 도구와 [[불교]] 의식에 사용되는 도루를 중심으로 발전하였고, 특히 청자를 중심으로한 자기 공예가 뛰어났다.([[고려청자]])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삼았으나 다른 종교도 금하지 않고 자유로이 믿게 하는 등 [[종교의 자유|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였다.
==상업==
고려 상인들은 동서양을 오가며 각종 활동을 펼쳤다. 이들의 활동으로 Korea라는 이름이 한국의 영문국호가 되었다.
[[분류:한국사]]
{{틀:한국사}}
'''고려'''(高麗)는 남북국 시대의 [[신라]]와 [[발해]]를 계승한 한국의 왕조로서 [[918년]]에 [[고려 태조|태조 왕건]]이 나라를 세운 후, [[1392년]] [[조선]]에게 멸망하기까지 약 450여년 동안 한반도를 지배하였다.
== 역사 ==
=== 고려의 성립과 후삼국 통일 ===
9세기 말, [[신라]]에서는 왕위쟁탈전이 빈번히 발생하여 정치가 혼란해졌고 전국 각지에서는 조세 수취에 반발하여 농민 봉기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지방 [[호족]]들이 신라 조정으로부터 독립하여 각자 자신의 세력을 키웠는데 그 중에서도 [[견훤]]과 [[궁예]]가 가장 강한 세력을 구축하였으며, 이들은 주변 호족들을 통합하여 나라를 세워 왕이 되기에 이르렀다. [[견훤]]이 먼저 [[백제]]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후백제]]의 왕이 되었고, 뒤이어 [[궁예]]도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후고구려]]의 왕이 되었다. 이로써 [[후고구려]], [[후백제]], [[신라]] 삼국이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이 시기를 [[후삼국 시대]]라고 부른다.
이후 [[궁예]]가 강력한 개혁정책을 실시하자 [[호족]]들에 의해서 정권을 잃고, [[송악]]의 [[호족]] [[고려 태조|왕건]]이 신하들의 추대 형식을 빌려 왕위에 올라 나라의 이름을 고려라고 고쳤다. 이로부터 고려와 [[후백제]] 사이에서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으나 결국에는 고려가 [[신라]]의 항복을 받아내고([[935년]]), [[후백제]]를 멸망시켜 [[936년]]에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또한 [[926년]]에 [[발해]]가 [[요나라]]의 침략을 받고 멸망하자 왕족을 비롯한 유민들을 대거 받아들임으로써 [[한민족]]의 통일을 이루었다.
=== [[고려 광종]]의 개혁 정치 ===
[[고려 태조|태조]]의 뒤를 이은 [[고려 혜종|혜종]]과 [[고려 정종|정종]] 때에는 왕권이 불안정하여 왕족들과 외척들 사이에 왕위 계승 다툼이 일어났다. 이러한 왕권의 불안정은 [[고려 태조|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호족 세력을 규합하기 위하여 취하였던 혼인 정책 때문에 나타난 부작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즉위한 [[고려 광종|광종]]은 왕권의 안정과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정책을 추진하였다. 광종은 [[노비안검법]]을 실시하여 [[호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국가의 수입 기반을 확대하였다. 이로써 공신이나 [[호족]]의 경제적·군사적 기반은 약화된 반면, [[노비]]들이 양인이 되어 조세와 부역의 의무를 지게 되었으므로 국가의 재정 기반과 왕권이 좀더 안정되었다.
[[고려 광종|광종]]은 문예와 [[유교]] 경전을 시험하여 문반 관리를 선발하는 [[과거제]]를 시행하였다. [[과거제]]는 공신의 자제를 우선적으로 등용하던 종래의 관리 등용 제도를 억제하고, 새로운 관리 선발 기준을 마련한 것이다. 이를 통하여 [[고려 광종|광종]]은 유학을 익힌 신진 인사를 등용하여 신구 세력의 교체를 도모하였다. 이어서 지배층의 위계 질서를 확립하기 위하여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다.
일련의 개혁을 통하여 자신감을 갖게 된 광종은 본격적으로 공신과 [[호족]] 세력을 제거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이로써 왕조 성립 초기의 공신과 호족 세력이 크게 약화되고 왕권이 강화될 수 있었다. [[고려 광종|광종]]의 개혁은 [[고려 경종|경종]] 때의 경제 개편으로 이어져 중앙 관료들의 경제적 기반을 보장하기 위한 [[전시과]] 제도가 실시되었고, [[고려 성종|성종]] 때의 지배체제 정비로 이어져 통치 체제가 확립되었다.
=== 문벌 귀족 사회의 성립 ===
[[고려 성종|성종]] 이후 중앙 집권적인 국가 체제가 확립됨에 따라 중앙에서 새로운 지배층이 형성되어 갔다. 이들은 신라 말기 지방 [[호족]] 출신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고위 관직자들을 배출하였으며, [[문벌 귀족]]이라 불리었다. [[문벌 귀족]]들은 관직에 따라 과전을 받고, 자손에게 세습이 허용되는 [[공음전]]과 관직에 따라 혜택을 받았으며, 자기들끼리 혼인 관계를 맺는 폐쇄적인 통혼권을 형성하였고, 때로는 왕실과도 혼인 관계를 맺어 외척으로서의 지위를 이용하여 정치 권력과 경제력을 거의 독점하여 정국을 주도해 나가기도 하였다.
=== [[요나라]]의 침공 ===
10세기 초에 통일된 국가([[요나라]])를 세운 [[거란족]]은 [[송나라]]를 공격하기에 앞서 [[송나라]]와 연결되어 있던 [[정안국]]을 토벌하고 고려와의 관계를 개선하려 하였다. 고려에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북진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여 [[요나라]]는 고려에 여러 차례 침입해 왔다.
처음 [[요나라]]는 80만의 대군으로 침입해 왔다([[993년]]). [[요나라]]는 고려가 차지하고 있는 [[고구려]]의 옛 땅을 내놓을 것과 [[송나라]]와 교류를 끊고 자신들과 교류할 것을 요구하였다. 고려는 [[청천강]]에서 요나라의 침략을 저지하는 한편, [[서희]]가 [[요나라]]와 협상에 나섰다. 이 때 [[요나라]]로부터 고려가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인정받고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를 확보하는 한편, [[요나라]]와 교류할 것을 약속하였다.
[[요나라]]의 군대가 퇴각한 뒤 고려는 [[송나라]]와 친선 관계를 계속 유지하면서 [[요나라]]와 교류하려 하지 않았다. 이에 요나라는 [[강조의 정변]]을 계기로 [[강동 6주]]를 넘겨줄 것을 요구하면서 40만 대군으로 다시 침입해 왔다([[1010년]]). 이 때 [[개경]]이 함락되는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으나 요군의 배후에서 [[양규]]가 선전하였다. 이에 [[요나라]]는 퇴로가 차단될 것을 두려워하여 고려와 강화하고 물러갔다.
여러 차례 소규모의 침입을 시도하던 [[요나라]]는 다시 10만의 대군으로 침입해 왔다([[1018년]]). 개경 부근까지 침입해 온 [[요나라]]군은 도처에서 고려군의 저항을 받고 퇴각하던 중 [[귀주]]에서 [[강감찬]]이 지휘하는 고려군에게 섬멸되었다. 이 때 살아서 돌아간 [[요나라]]의 군사가 수천 명에 불과할 정도였다([[1019년]]). 이를 [[귀주 대첩]]이라 한다.
고려가 [[요나라]]의 계속되는 침략을 막아내자 [[요나라]]는 더 이상 고려를 공격할 수 없었고, [[송나라]]를 침입할 수도 없었다. 결국 고려가 [[요나라]]와 싸워서 승리함으로써 고려, [[송나라]], [[요나라]] 사이에는 세력의 균형이 유지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 고려는 국방을 강화하는 데 더욱 노력하였다. [[강감찬]]의 주장으로 [[개경]]에 나성을 쌓아 도성 수비를 강화하였고, 북쪽 국경 일대에 [[천리장성]]을 쌓아 [[요나라]]를 포함한 외세의 침입을 저지하려 하였다.
=== [[여진족]] 정벌과 9성 개척 ===
고려는 [[두만강]] 연안의 [[여진족]]을 경제적으로 도와주면서 회유 및 동화 정책을 펴서 이들을 포섭해 나갔다. 그러나 12세기 초 [[만주]] [[하얼빈]] 지방에서 일어난 [[완옌부]]의 추장이 여진족을 통합하면서 정주까지 남하하여 고려와 충돌을 빚게 되었다.
여진족과의 1차 접촉에서 패한 고려는 기병 중심의 여진족을 보병만으로 상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윤관]]의 건의에 따라 기병을 보강한 특수 부대인 [[별무반]]을 편성하여 여진 정별을 준비하였다. [[윤관]]은 [[별무반]]을 이끌고 [[천리장성]]을 넘어 여진족을 북방으로 쫓아 버리고([[1107년]]), 동북 지방 일대에 9성([[동북 9성]])을 쌓아 방어하였다. (이 [[동북 9성]]은 두만강 이북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생활 터전을 잃은 [[여진족]]의 계속된 침입으로 9성 수비에 어려움을 겪던 고려는 다시금 침략하지 않고 해마다 조공을 바치겠다는 [[여진족]]의 조건을 수락하고 1년 만에 9성을 돌려주었다. 고려의 처지에서도 서북쪽의 [[요나라]]와 대치하는 상황에서 [[여진족]] 방어에만 힘쓸 수 없었기 때문에 [[여진족]]의 조건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 후 [[여진족]]은 더욱 강성해져 만주 일대를 장악하면서 [[금나라]]를 세우고([[1115년]]), 고려에 군신 관계를 맺자고 압력을 가해 왔다. 고려는 그들의 사대 요구를 둘러싸고 정치적 분쟁을 겪기도 했지만, 현실적으로 [[금나라]]와 무력 충돌을 하기 어려운 점을 고려하여 결국 [[금나라]]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 [[이자겸의 난]]과 [[서경 천도 운동]] ===
11세기 이래 대표적인 [[문벌 귀족]]인 [[경원 이씨]] 가문은 왕실의 외척이 되어 80여 년간 정권을 잡았다. [[경원 이씨]]는 [[이자연]]의 딸이 [[고려 문종|문종]]의 왕후가 되면서 정치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하였고, [[이자연]]의 손자인 [[이자겸]]도 [[고려 예종|예종]]과 [[고려 인종|인종]]의 외척이 되어 집권하였다. 특히, [[이자겸]]은 [[고려 예종|예종]]을 [[고려 인종|인종]]이 왕위에 오를 수 있게 하면서 그 세력이 막강해졌다.
[[이자겸]] 세력은 대내적으로 문벌 중심의 질서를 유지하고 대외적으로 [[금나라]]와 타협하는 정치적 성향을 보였다. 반면 왕의 측근 세력들은 왕을 중심으로 결집하면서 [[이자겸]]의 권력 독점에 반대하고 나섰다.
이에 [[이자겸]]은 반대파를 제거하고 [[척준경]]과 함께 난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였다([[1126년]]). 그러나 [[이자겸]]이 [[척준경]]에 의하여 물러나고 [[척준경]]도 탄핵을 받아 축출됨으로써 [[이자겸]] 세력은 몰락하였다. [[이자겸의 난]]은 중앙 지배층 사이의 분열을 드러냄으로써 [[문벌 귀족]] 사회의 붕괴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자겸의 난]] 이후 [[고려 인종|인종]]은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며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한 정치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보수적 관리들과 [[묘청]]을 중심으로 한 지방 출신의 개혁적 관리들 사이에 대립이 벌어졌다.
[[묘청]] 세력은 풍수지리설을 내세워 서경으로 도읍을 옮겨, 보수적인 [[개경]]의 [[문벌 귀족]] 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면서 자주적인 혁신 정치를 시행하려 하였다. 이들은 [[평양|서경]]에 대화궁이라는 궁궐을 짓고, [[금나라]]를 정벌하자고 주장하였다.
반면 [[김부식]]이 중심이 된 [[개경]] 귀족 세력은 유교적 이념에 충실함으로써 사회 질서를 확립하자고 주장하였다. 아울러 이들은 민생 안정을 내세워 [[금나라]]와 사대 관계를 맺었다. 결국 이러한 정치 개혁과 대외 관계에 대한 의견 대립이 지역 간의 갈등으로까지 확대되었다.
[[묘청]] 세력은 [[평양|서경]] 천도를 통한 정권 장악이 어렵게 되자 [[평양|서경]]에서 나라의 이름을 [[대위국]](大爲國)이라 하고 연호를 천개(天開)라 하면서 난을 일으켰으나([[1135년]]), [[김부식]]이 이끈 관군의 공격으로 약 1년 만에 진압되고 말았다.
=== [[무신 정권]]의 성립 ===
12세기에 들어 고려의 지배층 내부에서는 [[문벌 귀족]]과 측근 세력 간에 정치권력을 둘러싼 대립이 치열해지기 시작해 정치가 혼란스러워지게 되었다. 이러한 때에 평소에 문신들만 우대받는 것에 불만이 고조되었던 무신들은 [[정중부]], [[이의방]] 등을 중심으로 [[1170년]]에 정변을 일으켜 다수의 문신들을 죽이고 [[고려 의종|의종]]을 폐하여 [[거제도]]로 귀양 보낸 후 허수아비 왕인 [[고려 명종|명종]]을 내세워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를 [[무신정변]]이라고 부른다.
[[무신정변]] 이후 무신들은 조정의 주요 관직들을 모두 독점하고 부를 늘려갔으며, 저마다 사병을 길러 서로 권력을 뺏고 빼앗기는 쟁탈전을 벌였다. 이 때문에 중앙 정부의 통제력은 갈수록 약화되어갔고 백성들에 대한 수탈은 더욱 심해져 여기저기에서 여러 차례 봉기가 일어났다.
=== 거란과 몽골과의 전쟁 ===
13세기 초 중국 대륙의 정세는 급박하게 변화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부족 단위로 유목 생활을 하던 [[몽골]]족이 통일된 국가를 형성하면서 [[금나라]]를 공격하여 북중국을 점령하였다.
이 때 [[금나라]]의 예하에 있던 [[거란]]족의 일부가 몽골에 쫓겨 고려로 침입해 왔다. 고려는 이들을 반격하여 [[강동성]]에서 포위하였고, [[거란족]]을 추격해 온 [[몽골]] 및 [[두만강]] 유역에 있던 [[동진국]]의 군대와 연합하여 [[거란]]족을 토벌하였다. 이후 [[몽골]]은 자신들이 [[거란]]족을 몰아내 준 은인이라고 내세우면서 지나친 공물을 요구해 왔다.
마침 고려에 왔던 몽골 사신 일행이 귀국하던 길에 국경 지대에서 피살되자 이를 구실로 몽골군이 침입해 왔다([[1231년]]). 힘겹게 [[의주]]를 점령한 [[몽골]]군은 [[귀주]]성에서 [[박서]]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히자 길을 돌려 [[개경]]을 포위하였다. 이에 고려는 몽골의 요구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몽골군도 큰 소득 없이 물러갔다.
그러나 당시 집권자인 [[최우]]는 몽골의 무리한 조공 요구와 간섭에 반발하여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고, 장기 항전을 위한 방비를 강화하였다. 이에 [[몽골]]군이 다시 침입해 왔으나 [[처인성]] 전투에서 장수 [[살리타]]가 [[김윤후]]가 이끄는 민병과 승병에 의해 사살되자 퇴각하였다. 이후 고려는 여러 차례의 몽골 침략을 끈질기게 막아 냈다.
[[강화도]]의 고려 조정은 주민들을 산성과 섬으로 피난시키고 항전과 외교를 병행하면서 저항하였다. 한편, 지배층들은 부처의 힘으로 외적을 방어하겠다는 마음으로 [[팔만대장경]]을 조판하였다. [[강화도]]의 고려 조정은 수로를 통하여 조세를 걷어 들여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장기간의 전쟁으로 국토는 황폐해지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아울로 [[황룡사]] 9층 목탑을 비롯한 수많은 문화재가 소실되었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몽골]]과 강화를 맺으려는 주화파가 득세하여 [[최씨 정권]]이 무너지고 전쟁은 끝이 났다. 그러나 고려 조정이 [[개경]]으로 환도하자 최씨 정권의 친위세력이었으며, 대몽항쟁에 적극적이었던 [[삼별초]]는 [[배중손]]의 지휘 아래 반기를 들었다. 이들은 장기 항전을 계획하고 [[진도]]로 옮겨 용장성을 쌓고 저항하였고, 여몽 연합군의 공격으로 [[진도]]가 함락되자 다시 [[제주도]]로 가서 [[김통정]]의 지휘 아래 계속 항쟁하였으나, 결국 완전히 진압되었다.
=== 원나라의 내정 간섭 ===
[[원나라]]의 침략을 받아 약 30년 동안 항전을 벌인 끝에 결국 강화가 성립되고 항전을 주도하던 [[최씨 정권]]은 붕괴되었다. 이와 함께 왕권이 회복되었지만 [[원나라]]의 정치적 간섭을 받게 되었다. 고려의 국왕은 [[원나라]]의 공주와 결혼하여 [[원나라]] 황제의 부마가 되었고, 왕실의 호칭과 격이 [[제후국]]에 걸맞은 것으로 격하되었다. 아울러 관제도 개편되고 격도 낮아졌다. 또 [[원나라]]는 화주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여 [[철령]] 이북의 땅을 빼앗았으며, [[자비령]] 이북의 땅도 차지하여 [[평양|서경]]에 [[동녕부]]를 설치하였다. 또한 [[제주도]]에는 [[삼별초]]를 제거한 뒤 [[탐라총관부]]를 설치하고 목마장을 경영하였다.
오랜 전쟁이 끝나고 사회가 안정되면서 새로운 지배 세력이 등장하였다. 이들을 이른바 [[권문세족]]이라고 하는데, 고려 전기부터 있던 [[문벌 귀족]] 일부와 무신집권기에 성장한 가문, 그리고 몽골어 통역관으로 출세하는 등 [[원나라]]와의 친선 관계를 통해 새로 등장한 가문으로 구성되었다. [[권문세족]]은 권력을 앞세워 민중의 토지를 빼앗아 광대한 농장을 만들고 양민을 억압하여 노비로 삼는 등 사회 모순을 다시 격화시켰고, [[원나라]]의 엄청난 공물요구는 고려를 피폐하게 만들었다.
=== [[신진 사대부]]의 성장 ===
고려 후기에는 [[원나라]]의 간섭과 [[권문세족]]의 착취와는 별개로 농업 기술은 꾸준히 발전하였다. 먼저 [[원나라]]와 전쟁 중에 고려의 독자적인 의술이 발달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인구가 증가하였으며, 그 결과 집약적 농업이 가능해졌다. 이러한 때에 [[중국]] 대륙으로부터 인분을 거름으로 사용하는 농업 기술이 전래되어 휴한을 극복하고 같은 땅에서 해마다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으며, 그 결과 농업 생산력이 크게 증대되었다.
새로운 농업을 도입하여 농업 생산력을 증대시킨 사람들은 주로 지방의 중소지주들이었다. 이들은 경제적 기반을 확대하고 점차 중앙관료로 진출하여 정치세력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들을 [[신진 사대부]]라고 한다. [[원나라]]의 간섭과 측근 정치로 인하여 관직으로의 진출이 제한되는 등 정치적 지위가 불안정하였던 [[신진 사대부]]는 [[성리학]]을 수용하여 학문적 기반으로 삼고 불교의 폐단을 시정하려 하였으며, 또한 토지 탈점 등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개혁을 주장하여, 결국 [[권문세족]]과 대립하게 되었다.
=== 고려 말의 개혁 정치와 멸망 ===
14세기 후반 [[원나라]]의 세력이 약화되자 [[공민왕]]은 반(反)[[원나라]] 운동을 일으켜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는데 성공하였다. [[공민왕]]은 [[원나라]]를 몰아낸 후 [[신돈]] 및 [[신진 사대부]]와 함께 대대적힌 사회 개혁을 추진해나갔다. 그리하여 [[권문세족]]이 부당하게 빼앗은 토지나 재산을 본래의 주인에데 돌려주고, 억울하게 노비로 전락한 사람들을 양민으로 해방시켜 주었다. 그러나 [[신돈]]이 제거되고, [[공민왕]]까지 시해되면서 [[권문세족]]이 다시 등장하여 정치 권력을 독점하면서 개혁은 중단되고 말았다. [[공민왕]] 때의 개혁 노력이 실패하자 정치기강이 문란해지고,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으로 고려는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이들의 침공을 막아내면서 신흥 무인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또한 신진 사대부는 고려를 멸망시키고 새 왕조를 열자는 급진적 신진 사대부와 고려 안에서 최후의 개혁시도를 해보자는 온건적 신진 사대부로 갈라지게 되었다.
대륙에 명나라가 등장하자, 고려는 [[명나라]]와 [[철령]] 이북의 땅을 둘러싸고 영토 갈등을 빚다가 끝내 [[요동]]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요동]]정벌군의 사령관 [[조선 태조|이성계]]는 어려운 나라 사정 때문에 [[명나라]]와의 전쟁은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위화도 회군]]으로 권력을 장악하였다.([[1388년]]) 급진적 [[신진 사대부]]는 신흥 무인세력인 [[조선 태조|이성계]]와 결탁하여 새 왕조를 열기 위한 작업을 펼쳤다. [[권문세족]]들을 몰아내고 이들의 경제적 기반을 붕괴시키고, 온건적 [[신진 사대부]], 고려에 충성하는 세력들을 모두 몰아낸 이후 [[1392년]]에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이라는 새로운 왕조를 건국하였다.
== 정치 ==
고려는 새로운 통일 왕조로서 커다란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고려의 성립은 고대 사회에서 중세 사회로 이행하는 한국 역사의 내재적 발전을 의미한다. [[신라]] 말기의 [[6두품]] 출신 지식인과 [[호족]] 출신을 중심으로 성립한 고려는 골품 위주의 [[신라]] 사회보다 더 개방적이었고, 통치 체제도 과거제를 실시하는 등 효율성과 합리성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정비되었다. 특히 사상적으로 [[유교]]의 정치 이념을 수용하여 고대적 성격을 벗어날 수 있었다.
중앙관제는 당나라의 [[3성 6부제]]를 기본으로 고려식으로 재편하였다.
[[군주]]가 스스로를 짐(朕), 궁궐을 황성(皇城), 군주의 존칭은 폐하(陛下), 차기 왕위를 예약한 왕자는 [[태자]](太子), 왕의 어머니는 [[태후]](太后), 군주의 명령은 조(詔)나 칙(勅)으로 불렀으며 궁궐 속 궁궐문을 제국에서만 사용하던 다섯 개로 만드는 등 사실상 제국에 걸맞는 제도와 규범을 갖추고, 또 주변국들로부터도 제국으로 인정받았으며, 이는 13세기 [[원나라]]에게 국권이 침탈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고려 시대는 외적의 침입이 유달리 많았던 시기였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줄기찬 항쟁으로 이를 극복할 수 있었다. 12세기 후반에 무신들이 일으킨 [[무신정변]]은 종전의 문신 귀족 중심의 사회를 변화 시키는 계기가 되어 신분이 낮은 사람도 정치적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이후, 무신 집권기와 원 간섭기를 지나 고려 후기에 이르러서는 새롭게 성장한 [[신진 사대부]]를 중심으로 성리학이 수용되어 합리적이고 민본적인 정치 이념이 성립되었고, 이에 따른 사회 개혁이 진전되었다.
== 경제 ==
고려는 후삼국 시기의 혼란을 극복하고 [[전시과]] 제도를 만드는 등 토지 제도를 정비하여 통치 체제의 토대를 확립하였다. 또, 문란해진 수취 체제를 다시 정비하면서 재정 운영에 필요한 관청도 설치하였다. 재정을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하여 토지와 인구를 파악하기 위한 양전 사업을 실시하고 [[호적]]을 작성하였다. 이것을 근거로 조세, 공물, 부역 등을 부과하였다. 아울러 국가가 주도하여 산업을 재편하면서 경작지를 확대시키고, 상업과 수공업의 체제를 확립하여 안정된 경제 기반을 확보하였다.
농업에서는 기술의 발달로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었고, 상업은 시전을 중심으로 도시 상업이 발달하면서 점차 지방에서도 상업 활동이 증가하였다. 수공업도 관영 수공업 중심에서 점차 사원이나 농민을 중심으로한 민간 수공업을 중심으로 발전해 갔다.
== 사회 ==
고려사회는 신분사회였다. 귀족, 중인, 평민, 천민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귀족들은 문반, 무반, 귀족과 왕족이고 중인은 서리와 기술관이다. 귀족과 중인은 지배층이고 피지배층은 평민과 천민이 있다. 귀족은 [[공작]](公爵), [[후작]](侯爵) 등의 작위를 수여하는 등 중세적 특징을 뚜렷하게 나타내었다.평민은 농민, 수공업자, 상인이 있는데 농민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천민은 노비와 [[향·소·부곡]]민, 화척, 재인등이 있었다.
== 문화 ==
고려 초기에는 과거제와 함께 한문학이 크게 발달하였고, [[고려 성종]] 이후부터는 문치주의가 성행함에 따라 필수 교양으로 발전하였다. 이로 인해 여러 우수한 시인들이 많이 등장하게 되었다.
고려인들은 자신들의 사치 생활을 충족하기 위하여 다양한 예술 작품들을 만들어 즐겼으므로 예술 면에서도 큰 발전을 이룩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분야는 공예였다. 공예는 생활 도구와 [[불교]] 의식에 사용되는 도루를 중심으로 발전하였고, 특히 청자를 중심으로한 자기 공예가 뛰어났다.([[고려청자]])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삼았으나 다른 종교도 금하지 않고 자유로이 믿게 하는 등 [[종교의 자유|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였다.
==상업==
고려 상인들은 동서양을 오가며 각종 활동을 펼쳤다. 이들의 활동으로 Korea라는 이름이 한국의 영문국호가 되었다.
[[분류:한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