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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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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조선 역대 왕계표}}
*[[조선]]의 14대 임금. 재위([[1567년]]~[[1608년]]), 생몰연대([[1552년]]~[[1608년]])
===[[사림]] 정치의 완성===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이다. 후궁 소생 서자 출신으로 첫번째 임금이다. 선조 임금은 [[사림]]을 적극적으로 등용하고 성리학적인 정치관을 자리잡으려 하였다. 이황·이이·성혼 등 대유학자들과 토론을 펼치기도 했다.

[[윤원형]]과 같은 [[훈구]]세력을 몰아내었고, [[기묘사화]] 때 희생된 [[조광조]] 등을 복원하였다. 선조 임금 대에 이르러서 완전히 [[사림]]이 조선 조정을 장악하였다.
===[[붕당]]정치의 성립===
[[1575년]] 무렵, [[사림]]은 [[동인]]과 [[서인]]으로 갈려지게 되었다. [[붕당]]정치는 선조 임금의 왕권 강화를 위해 신하들을 의도적으로 분열시켰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 [[1589년]], [[정여립]] 사건을 바탕으로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서인]]이 [[동인]]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고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1591년 [[서인]]들은 세자 책봉 문제로 [[서인]]의 당수인 정철이 쫓겨나고 [[동인]]이 정권을 잡았다. 이후 [[동인]]은 [[임진왜란]] 과정에서 대일 강경파인 [[북인]]과, 온건파인 [[남인]]으로 나눠졌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남인]]이 정국을 주도하고, [[북인]]이 [[남인]]을 비판하고, [[서인]]은 [[남인]]과 손을 잡는 형국으로 진행되다가 선조 말엽, [[북인]]이 정권을 잡았다.

[[붕당]]정치의 전개 과정에서 [[사림]]들은 많은 피를 흘렸고, 특히 [[기축옥사]]에서는 [[전라도]] 선비 1000명이 죽는 등 [[사림]]들 간의 갈등이 극심하였다. 그래서 선조 임금이 두 세력 가운데서 정국의 주도권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임진왜란]]·정유재란===
[[1580년]]대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 토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통일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불만세력의 불만을 밖으로 분출하고, 동아시아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조선을 침공하였다([[1592년]]). 그러나 [[1591년]]에 조선은 [[일본]]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고 [[통신사]]를 파견하였다. 하지만 [[김성일]]([[동인]])과 [[황윤길]]([[서인]])은 서로 다른 보고를 올렸다. [[김성일]]은 [[일본]]의 공격이 예상되지 않는다고 했고, [[황윤길]]은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보고하였다. 이후 [[조선]]은 [[이순신]]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파견하고, 남해안과 영남 지역의 성을 수리하는 등 일부 노력을 기울였으나 결국 [[임진왜란]]을 맞고 말았다.

[[1592년]] 4월 14일 [[일본]]은 20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하였다. 순식간에 [[한양]]을 점령당하고, 선조 임금은 [[의주]]까지 피난하였고, 심지어 [[명나라]]로 도망치려고 하였다. 이후 수군과 [[의병]]의 활약으로 반격의 기회를 잡았고, [[명나라]] 지원군(총사령관 [[이여송]])이 당도하면서 [[일본]]군은 영남지역까지 패주하였다. [[1593년]]부터 [[1597년]]까지 전쟁은 소강상태에 빠졌다. 그러다 [[1597년]], 다시금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대군을 보내어 [[조선]]을 재침함으로써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일본]]의 공격은 실패하였고, [[1598년]] 말이 되면서 [[일본]]군은 퇴각하였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조선은 백성과 생산력이 근 1/3 정도로 떨어지고, [[한양]]을 비우자 백성들의 분노로 궁궐 및 주요 관청이 불타버려 수많은 통치자료가 소실되었다. 선조 임금은 소실된 자료를 재정리하고 토지를 개간하기 위해서 말년에 노력하였다.
===후계 문제===
선조 임금은 후계에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후계자(세자)가 자신의 권력을 위협할 것이라 걱정하였다. 결국 세자를 정하는 것은 [[1592년]] 4월, [[한양]]을 버리고 도망가기 직전에 모든 조정 신료들과 왕족들을 모아놓고 공개리에 세자를 추천토록 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세자를 추천하지 않자, 할 수 없이 선조 본인이 '[[광해군]]이 영민하다는 데, 경들은 어떤가?'라고 묻자 모든 신하들이 일제히 수긍하였다. 이는 신하들이 눈치를 보면서 선조 임금이 말을 꺼내길 바랬던 것이다.

이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시기 세자 [[광해군]]은 분조를 이끌고 큰 활약을 하였고, 선조 임금은 [[광해군]]이 자신의 권력을 침해할 것을 우려하였다. [[광해군]]에 대한 선조 임금의 의심이 깊어지는 와중에 선조 임금은 고대하던 정실 왕비([[인목대비|인목왕후]])에게서 적자를 얻을 수 있었다. 그가 바로 [[영창대군]]이다. 선조 임금은 마지막까지 [[영창대군]]과 [[광해군]]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영창대군]]이 어리다는 것을 인정하고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분류:조선]]
[[분류:임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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