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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왕

4,326 바이트 추가됨, 2008년 10월 6일 (월) 06:51
계열상의 의문
{{틀:백제 역대 왕계표}}


[[백제]]의 8대 임금(제위 [[234년]]~[[286년]]), "구이왕" 혹은 "고모왕"이라고도 한다. [[초고왕]]의 동생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명확하지 않다.
===백제의 국가기초 확립===
국가의 기초를 확립하는데 노력하였으며, [[260년]]~[[261년]]에 관제를 제정하여 6[[좌평]]-16관등을 나누었다.(하지만 고이왕 시기에 모두 갖춰졌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그리고 관등별로 복색을 정비하여 중앙집권체제를 정비하였다. 이는 사실상의 [[율령]] 반포에 준하는 것이다.

군사권을 장악하기 위해 좌장을 설치하고, 이는 왕이 직접 임명하였다. 왕이 임명한 좌장이 내외병마사를 겸하게 하여 [[우보]]가 관장하던 군사권을 왕이 쥐게 되었다.

[[262년]]에는 관리들의 뇌물 수수를 금지하는 "범장"(犯贓)을 제정하고, 이를 위반한 자에 대해서는 3배를 배상하게 함과 동시에 종신토록 금고(禁錮)케 함으로써 관리들의 규율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국가의 경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국토의 남쪽 평야 지대에 논을 개간하도록 해 농업 생산력의 증대를 장려하였다.

===대외관계===
3세기에 [[위나라]]가 [[요동]]-[[요서]]지역의 공손씨를 멸망시키고, 공손씨의 세력 아래 있던 [[낙랑군]]과 [[대방군]]을 장악하게 된다. 이 두 군현은 대 동방정책의 전진기지들이다. 이들의 압박에 [[마한]]의 맹주 [[목지국]]은 [[낙랑군]]과 [[대방군]]을 공격하였다.([[247년]]) 이때 [[목지국]]의 지휘아래 마한 연합군이 참전하였는데, [[백제]]도 함께 참전하였다.

이 싸움에서 [[대방군]] 태수를 전사시키고, [[낙랑군]] 변경까지 공격하는 등 상당한 전과를 올렸으나 최종적으로 마한 연합군은 패배하게 된다. 이 패배로 [[목지국]]의 지휘아래 있던 마한세력들이 이탈하게 되고, 이 틈을 타서 [[백제]]가 마한 세력의 주도권을 쥐게 된다.

===계열상의 의문===
고이왕이 [[초고왕]]의 동생이라고 한다면, 아버지 [[개루왕]]이 사망한 [[166년]] 이전에 태어났어야 하는데, 이럴 경우 고이왕은 즉위시 나이가 최소 68세 이상이 되어야 하고 120세 이상을 살았다는 계산이 나온다. 따라서, 이같은 점 때문에 고이왕의 가계에 대한 위의 설명을 그대로 믿기보다는, [[사반왕]]대까지 왕위를 계승하던 세력과 다른 지파가 추대한 인물이 바로 고이왕이었다고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왕위계승 지파가 바뀌는 과정에서 [[사반왕]]과 고이왕세력 간의 무력대결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대결은 2년 이상 걸린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를 뒷받침는 내용이 삼국유사에 실려있다. 고이왕 “3년([[236년]]) 겨울 10월에 왕이 서해의 큰 섬에서 사냥하였는데 손수 40마리의 사슴을 쏘아 맞혔다.”는 기록은, 고이왕이 왕권을 거머쥐고 이를 대내외에 과시하기 위한 행사를 벌였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 말고도 고이왕이 어떤 계열이었는지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먼저 ≪[[주서]] 周書≫ 및 ≪[[수서]] 隋書≫의 백제전에 나오는 “[[백제]]시조[[구태]](百濟始祖仇台)”의 ‘구태’를 ‘구이’로 읽고, 이것은 ‘고이’와 음운상 통한다고 보아 ‘구이=고이’로 해석해 고이왕을 [[백제]] 고대국가의 실제적 건국자로서의 시조로 보는 견해가 있다.

반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 고이왕을 “[[초고왕]]모제(肖古王母弟)”라고 한 것을 ‘초고왕 어머니의 동생’으로 해석해, 고이왕은 [[온조왕]]계와는 계보를 달리하는 [[우태]](優台)-[[비류]]계(沸流系) 출신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 밖에 ≪[[신찬성씨록]]≫에는 고이가 ‘구이(久爾)’ 또는 ‘고모(古慕)’로 표기되어 있다.

따라서 그가 어떤 계열의 임금인지는 좀 더 살펴보아야 할 듯하다. (참고: [[구태백제설]])

[[분류:임금]]
[[분류: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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