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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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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검색어: ''"개경", "송악", "송도"''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2대 도시. 옛 [[고려]]의 수도
==역사==
===[[고려]]의 수도 "개경"===
고려가 건국되기 전에는 "[[송악]]"이라고 불렸으며, [[고려 태조|왕건]]의 조상인 [[작제건]] 등 왕씨일족이 이 지역의 토호로서 대대로 장악하고 있었다. [[송악]]은 [[중국]]과의 무역이 활발하여 [[고려 태조|왕건]]집안은 이 경제적 기반이 [[고려]]건국의 밑바탕이 되었다. [[후고구려]]의 임금 [[궁예]]도 일시적으로 [[송악]]에 도읍한 적이 있다.
고려 태조 [[고려 태조|왕건]]이 [[919년]]에 개경을 왕도로 정하고, 궁궐을 짓고, 5부로 구획을 지었다. 궁궐과 도성의 기본기획에서는 [[풍수지리설]]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초기에는 개성군과 송악군을 합쳐서 '개주'라고 하였는데, [[960년]]([[고려 광종|광종]] 11년)에 이름을 '개경'으로 고치고, [[987년]]([[고려 성종|성종]] 6년)에 5부의 구획을 다시 정비하고, [[995년]]([[고려 성종|성종]] 14년)에는 개성부로 고쳐 적현 6현과, 기현 9현을 관리하게 하였다. [[1010년]]([[고려 현종|현종]] 1년)에 [[거란의 침입]]으로 개성부가 황폐해져 [[1018년]]에 3개의 현만 관리하게 하였고, [[1024년]]에 다시금 5부의 구획을 정비 하였다.
[[1029년]]에 [[나성]]을 완성하였고, [[1062년]]에는 지개성부사를 두어 도성에서 관할하고 있던 10현을 모두 개성부로 예속시켰다. 또 [[서해도]] 우봉군을 떼어서 예속시켰다. [[1308년]]([[충렬왕]] 34년)에 개성부윤은 성 안만 관리하고, 개성현령은 성 외곽을 관리하게 하였다. [[1358년]]([[공민왕]] 7년)에는 외성을 수축하였고, [[1390년]]([[공양왕]] 2년)에는 [[경기도]]를 좌·우도로 나누면서 개성부는 경기우도에 속하게 하였다.
[[1394년]]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면서 개성부를 '송도개성유후사'로 개칭하면서 수도로서의 기능을 마감하였다.
[[고려]]시대 개경은 초기부터 국제도시로서 많은 상거래와 교역이 행해지는 대도시였다.
===[[조선]]시대 이후===
[[1438년]]([[조선 세종|세종]] 20년)에는 '개성유수'로 고치고, [[1467년]]([[조선 세조|세조]] 13년)에는 유수, 단사관, 경력, 도사 등 개성을 관할하던 각종 직책을 없앴으나, [[1470년]]([[조선 성종|성종]] 1년)에는 다시 유수, 경력, 도사 등으르 두었다. [[1895년]]에는 개성부가 되어 13군을 관할하였고, [[1906년]]에는 군이 되었다가 [[1914년]]에는 [[풍덕군]]을 없애고, 개성군에 포함시켰다.
해방 이후 남북 분단시 개성시는 남한이었으며, [[경기도]]의 [[북한]] 지역은 [[황해도]]에 편입되었다. [[1945년]] 11월 [[개풍군]] 2개면과 장단군 5개면이 분리되어 [[장풍군]]이 신설되었다.
[[북한]]은 [[1951년]] 초 개성시에 개풍군을 병합하여 개성지구로 명명하였다. [[1952년]] 12월 행정구역 개편 때 개풍군이 개성시에 통합되고, 개풍군·장풍군의 일부가 분리되어 [[판문군]]이 신설되었으며, 장풍군의 일부는 금천군에 편입되었다.
[[1955년]] 개성시와 [[황해북도]] 개풍군·판문군이 통합되어 개성직할시로 승격되었으며, [[1961년]] 3월 [[황해북도]] 장풍군에 [[강원도]] [[철원군]] 일부를 편입시키면서 개성직할시의 관할이 되었다. [[2004년]] 1월 개성직할시를 [[황해북도]] 개성특급시로 바꿨다.
[[분류:한국사]]
[[분류:지명]]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2대 도시. 옛 [[고려]]의 수도
==역사==
===[[고려]]의 수도 "개경"===
고려가 건국되기 전에는 "[[송악]]"이라고 불렸으며, [[고려 태조|왕건]]의 조상인 [[작제건]] 등 왕씨일족이 이 지역의 토호로서 대대로 장악하고 있었다. [[송악]]은 [[중국]]과의 무역이 활발하여 [[고려 태조|왕건]]집안은 이 경제적 기반이 [[고려]]건국의 밑바탕이 되었다. [[후고구려]]의 임금 [[궁예]]도 일시적으로 [[송악]]에 도읍한 적이 있다.
고려 태조 [[고려 태조|왕건]]이 [[919년]]에 개경을 왕도로 정하고, 궁궐을 짓고, 5부로 구획을 지었다. 궁궐과 도성의 기본기획에서는 [[풍수지리설]]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초기에는 개성군과 송악군을 합쳐서 '개주'라고 하였는데, [[960년]]([[고려 광종|광종]] 11년)에 이름을 '개경'으로 고치고, [[987년]]([[고려 성종|성종]] 6년)에 5부의 구획을 다시 정비하고, [[995년]]([[고려 성종|성종]] 14년)에는 개성부로 고쳐 적현 6현과, 기현 9현을 관리하게 하였다. [[1010년]]([[고려 현종|현종]] 1년)에 [[거란의 침입]]으로 개성부가 황폐해져 [[1018년]]에 3개의 현만 관리하게 하였고, [[1024년]]에 다시금 5부의 구획을 정비 하였다.
[[1029년]]에 [[나성]]을 완성하였고, [[1062년]]에는 지개성부사를 두어 도성에서 관할하고 있던 10현을 모두 개성부로 예속시켰다. 또 [[서해도]] 우봉군을 떼어서 예속시켰다. [[1308년]]([[충렬왕]] 34년)에 개성부윤은 성 안만 관리하고, 개성현령은 성 외곽을 관리하게 하였다. [[1358년]]([[공민왕]] 7년)에는 외성을 수축하였고, [[1390년]]([[공양왕]] 2년)에는 [[경기도]]를 좌·우도로 나누면서 개성부는 경기우도에 속하게 하였다.
[[1394년]]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면서 개성부를 '송도개성유후사'로 개칭하면서 수도로서의 기능을 마감하였다.
[[고려]]시대 개경은 초기부터 국제도시로서 많은 상거래와 교역이 행해지는 대도시였다.
===[[조선]]시대 이후===
[[1438년]]([[조선 세종|세종]] 20년)에는 '개성유수'로 고치고, [[1467년]]([[조선 세조|세조]] 13년)에는 유수, 단사관, 경력, 도사 등 개성을 관할하던 각종 직책을 없앴으나, [[1470년]]([[조선 성종|성종]] 1년)에는 다시 유수, 경력, 도사 등으르 두었다. [[1895년]]에는 개성부가 되어 13군을 관할하였고, [[1906년]]에는 군이 되었다가 [[1914년]]에는 [[풍덕군]]을 없애고, 개성군에 포함시켰다.
해방 이후 남북 분단시 개성시는 남한이었으며, [[경기도]]의 [[북한]] 지역은 [[황해도]]에 편입되었다. [[1945년]] 11월 [[개풍군]] 2개면과 장단군 5개면이 분리되어 [[장풍군]]이 신설되었다.
[[북한]]은 [[1951년]] 초 개성시에 개풍군을 병합하여 개성지구로 명명하였다. [[1952년]] 12월 행정구역 개편 때 개풍군이 개성시에 통합되고, 개풍군·장풍군의 일부가 분리되어 [[판문군]]이 신설되었으며, 장풍군의 일부는 금천군에 편입되었다.
[[1955년]] 개성시와 [[황해북도]] 개풍군·판문군이 통합되어 개성직할시로 승격되었으며, [[1961년]] 3월 [[황해북도]] 장풍군에 [[강원도]] [[철원군]] 일부를 편입시키면서 개성직할시의 관할이 되었다. [[2004년]] 1월 개성직할시를 [[황해북도]] 개성특급시로 바꿨다.
[[분류:한국사]]
[[분류:지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