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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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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사상의 형성요인===

개화사상의 내적인 요인으로 [[실학]]과의 관계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실학]]]]과 개화사상은 사상의 논리와 인적인 계보에 있어서 상당히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우선 그 연관의 사상적 형태로서는 첫째로 [[실학]]의 이용후생과 실사구시의 논리, 둘째로 [[실학]]의 [[민족주의]]적 성격, 셋째로 [[실학]]의 민권사상, 넷째로 [[실학]]의 통상개국론, 다섯째 [[실학]]의 영업자유론 등이 개화사상 형성에 영향을 주었으며, 여섯째 토지문제에 대한 [[실학]]자의 개화적 구상이 개화사상가에 의하여 계승 발전되었다. 다음은 인적계보를 살펴보면 [[실학]]자 [[박지원]]의 사상을 발전시킨 [[박규수]]를 들 수 있다. 그는 연암의 친손자로서 [[실학]]과 개화사상을 연결시켜 주는 교량적인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와 교우관계를 맺었던 인물로서 [[오경석]]과 [[유홍기]], [[이동인]]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의 지도아래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등의 개화파 청년들이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박지원]]의 「[[연암집]]」을 읽으며 평등사상과 이용후생사상을 연구하였다. 완당 [[김정희]]의 문하에 출입하던 [[신관호]] 등도 [[실사구시]]파와 개화사상을 연결시켰다. [[실학]]을 집대성한 [[정약용]]의 문하에서는 [[정학연]](丁學淵), [[이강회]], [[초의선사]](艸衣禪師) 등의 [[실학]]사상가들이 배출되었고, 그들의 문하에서 [[남종삼]], [[신정희]], [[어윤중]] 등의 개화론자들이 배출되었다. 그런데 개화사상의 형성에서 [[중인]]층의 역할이 중시되어야 할 것이다. 상기의 [[실학]]자들은 [[중인]]출신의 인재들과 교류하고, 또 그들을 지도해서 일정한 사상적 영향을 줌으로써 종래 양반층의 [[실학]]사상을 [[중인]]층으로 넘어가게 하였고 이 [[중인]]들은 다음날 개화운동의 측면공작자로 활동함으로써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을 연결 짓는데 일정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보여진다.

개화사상의 외재적 요인에는 청말의 [[양무운동]]과 [[일본]]의 문명개화론의 영향을 들 수 있다. 우선 [[양무운동]]의 사상이 영향을 주었다는 구체적인 예증인 [[위원]](魏源)의 「[[해국도지]]」와 [[정관응]]의 「역언」, [[황준헌]]의 「[[조선책략]]」 등의 영향도 지적될 수 있다. 이러한 책들의 영향으로 개화 사상가 중에서 온건적 입장을 내세우는 [[민영익]], [[김윤식]] 등의 친청세력이 등장하였고 이들에 의해 [[동도서기]]사상이 전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일본]]의 [[명치유신]]이후 [[일본]]측으로부터 영향이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이의 영향으로 [[김옥균]], [[박영효]] 등의 급진개혁파가 형성되어 개화를 표방하는 사상적 전개를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계열은 사상자체의 성격으로 보아 청말의 [[양무운동]]보다 한 단계 후에 나타난 [[변법자강운동]]에 가까운 성격의 것으로 보다 진보적인 입장에 있었다.

이와 같이 개화사상의 형성요인에는 내재적 측면 뿐만 아니라 외재적 측면도 중시 되어야 할 것이다. 개화사상이 발전과정에서 외래사상이 끼친 영향을 중시한다고 해서 결코 타율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시대가 급변할 때는 많은 외래사상을 섭취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개화사상은 후기[[실학]]사상의 근대지향적 맹아를 내재적으로 계승하고 19세기 후반이라는 역사적 상황에서 외재적 요인에 자극되어 근대적 변혁을 지향하는 민족사상으로 발전하였다. 즉 개화사상은 [[박규수]]에 의해 선포되고 [[오경석]]에 의해 촉진되었으며 [[유홍기]]에 의해 정치의식화 되고 [[김옥균]]에 의하여 정치운동화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개화파의 형성===

초기 개화파의 형성에는 [[박규수]]의 역할이 지대하였다. [[박규수]]는 [[1874년]]에 우의정을 사퇴하고 한거생활을 하면서 그의 사랑방에 출입하는 젊은 양반의 자제들에게 조부 [[박지원]]의 [[연암집]]을 강의하기도 하고 [[중국]]에 왕래한 사신들이나 역관들이 전하는 신사상을 알려 주기도 했다. 이 때 양반 소장파들로는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등이 있었다. 그러나 [[박규수]]의 생존 중에는 그 문하에 모인 양반소장파가 차차 사상적으로 결속되었지만 정치적결사로서의 성격을 갖추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1877년]] [[박규수]]가 세상을 떠나자 [[북경]]에 10여회나 왕래한 바 있고 [[박규수]]의 친구 였던 역관 [[오경석]]은 한의사인 그의 친구 [[유홍기]]에게 [[북경]]에서 가져온 신서를 제공하여 세계의 새로운 동향을 연구시키고, 젊은 소장파에게 목적의식을 가지고 접근시켰다. 이때의 신서로는 [[위원]]의 「[[해국도지]]」 등이 있었다. [[1879년]]에 [[오경석]]이 세상을 떠나게 되자 이제는 [[유홍기]]가 [[김옥균]]가 만나게 되고 그는 그 후로부터 초기 개화파의 사상적, 정치적 지도자로서 [[갑신정변]]에 이르기까지 그 지주적 존재로서 위치를 점하였다. 한편 [[유홍기]]가 [[김옥균]]에게 서울교외에 있는 봉원사의 개화승 [[이동인]]을 소개하게 되었고 그가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면서 유력한 동지가 되었다. 이들은 빠른 시일 안에 국가를 근대적인 체제로 개혁해 보려고 여러면으로 활동하였다. 외세의 도전에 대응하여 국가의 독립을 견지하기 위해 외교교섭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자각하고 열강의 외교사절들과 폭넓게 접촉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활동에는 급진적인 면이 많아 유교적이고 선비적인 인사들은 뜻을 달리하여 분리되어졌으며 또 당시의 사회도 그들의 사상과 행동을 받아들일 만큼 성숙되지는 못했다. 때문에 일반국민들로부터 경원시 되고 비판까지 받게 되었다.

[[분류:조선]]
[[분류: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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