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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8일 (일) 00:12 판
2001년 3월 7일 미국을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은 조지 W.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this man...'이라는 욕설을 들어야 했다. 오만한 미국에 대항하지 못한 그때의 사건을 살펴본다.
목차
‘this man’ 사건의 발단
2001년 3월 7일 미국을 공식 방문하고 있던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과의 만남에서 놀라운 모멸을 당한다. 이건은 바로 ‘this man...' 사건‘이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한 김대통령 면전에서 밑으로 내려다보고 “this man..."으로 지칭했다. 김대통령 본인과 한-미 양국의 고위관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나온 호칭이다. 'this man'은 ‘이 사람’ 또는 ‘이 양반’, 심하면 ‘이 새끼’라는 뜻이다. 어느 쪽으로 해석한다 해도 국가원수에 대한 호칭으로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이렇게 싸가지 없는 행태가 전세계 어디에 있단 말인가. 처참한 우리나라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그런데 부시는 왜 그렇게 오만무례 하였던 것일까?
김대통령이 한-러 정상회담에서 1972년의 탄도탄요격미사일(ABM) 제한협정을 평가한 탓도 상승작용을 했다고 볼수 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될수 없었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의 언론기사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중앙일보 2001-03-02 DJ 3·1절 화두/ 평화협정 추진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1일 경남신문, 충청일보와의 회견에서 남북 정상회담과 관련한 언급을 했다. 우선 2차 정상회담 때 '평화협정 또는 선언' 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정부 당국자는 "평화협정은 남북한이 당사자가 되고 미국과 중국이 지지. 참여하는 형태가 될 것" 이라고 설명했다.(후략)
김대통령의 이러한 의지는 미국으로 하여금 관심을 유발할 수 밖에 없는 일이기도 했다. 주한미군 철수를 불러올 평화협정 혹은 평화선언 따위는 클린턴과 달리 부시의 정책에는 제외되는 사안이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부시의 정책이 클린턴의 정책에 연장선상으로 인식할 수 밖에 없었던 김대통령은 어느정도에 대한 것은 미국이 알필요가 있고 공개할 필요도 있었다. 이러한 의지를 신호에 담아 언론에 흘려놓고 김대통령은 미국으로 날라갔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부시는 김대통령을 ‘고양이 쥐 잡듯‘이 몰아세우며, 급기야 ’this man...'이라고 호칭하면서 한국의 대통령을 욕보이기에 까지 이른다.
김대통령이 방미에 앞서 한국 지방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남북 평화협정 추진‘ 보도 내용은 보편적인 시각에서, 협정인지 선언인지 모호하고, 미국에게 통보하지 않았기 때문에 계획단계에 불과한 것으로 인식할수 있는 내용에 불과 했다.
그런데도 부시는 도끼눈을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부시의 말을 들어보니, 놀랍게도 부시는 김대통령이 남-북 평화선언을 추진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고 있었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답방에 대비해 추진되던 평화선언에 관한 대북전략을 구체적으로 또 정확히 들먹였다.
김대통령 또한 당혹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김 위원장의 답방이 유동적인 상황에서 대북전략에 관한 극비정보를 어떻게 미국이 알고 있는 것인가?
미국은 한국을 낱낱이 알고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 국정원의 매국적 첩보 현실을 알아 볼 필요가 있다.
주한미국대사관이 한국 내에서 정보를 수집하는 단위는 대사관의 공식조직, ORS(Office of Regional Study:지역조사과), FBIS(해외방송청취반), DIA(미국방정보국), 501정보부대, OSI(Office of Special Investigation:미공군방첩수사대) 등이다.
이 가운데 ORS와 FBIS는 세종로 미대사관 내에 설치되어 있고, DIA, 501정보부대, OSI는 모두 서울 용산 미8군 영내에 있는 군사정보기관이다.
501정보부대는 주로 특수장비를 동원하여 국내의 주요 통신을 감청한다.
‘ORS’는 ‘CIA 한국지부’인데, 인원만 수십 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곳이 문제가 된 미국 첩보요원 윤씨(J.Y)가 일했던 부서로 알려져 있다. 문제는 미대사관의 ‘ORS’윤씨와 한국 국정원 안과장의 만남에서 시작된다.
안과장은 행시(28회) 출신으로 해운항만청과 통일부에 잠깐 근무하다 안기부로 옮겼으며 안기부에서는 승승장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행시 출신이라 해도 만 40의 나이에 국정원 과장(3급 부이사관)에 오르는 것은 매우 어려운데, 그는 그 나이에 요직 중의 요직인 종합과장 자리를 차지했다. 안씨가 맡은 대북전략국 종합과장은 우리 정부의 대북 정책을 수립하는 핵심 요직이다.
안과장과 접촉한 미 CIA의 윤씨는 국내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공군 복무를 마친 뒤 미국에 건너가 미국 시민권자가 된 이민 1세대. CIA에 입사한 그는 1998년 3월부터 1등 서기관 타이틀로 주한 미 대사관에서 근무하였다. CIA의 화이트 요원으로 서울 근무를 시작한 것이다. 즉, 윤씨=화이트 요원
이들의 만남은 1999년 안과장이 CIA 본부 등을 둘러보는 미국 단기연수에 참여했는데, 이때 안과장 팀을 안내한 이가 바로 윤씨였다. 이로 인해 두 사람은 가까워졌고, 연수가 끝난 후에도 자주 만났다.
주한 미국대사관은 윤씨를 통해 안과장으로부터 핵심 대북 정보를 입수했던 것이다.
안과장은 2001년 3월13일『요미우리 신문』‘남-북평화선언 예측’ 보도를 계기로 국정원 감찰실에 의해 윤씨를 만나는 장면을 사진 촬영됨으로써 해임되었고, 윤씨는 2001년 8월4일 미국으로 불려갔다. CIA는 이 사건이 한-미 갈등으로 비화하는 것을 피하려는 듯 한국 근무 시한이 끝나가는 윤씨를 불러들였던 것이다.
한국은 윤씨를 체포하지 않았다. 미국이 로버트 김을 체포해 감옥에 7년을 가두어 둔것과 비교 해보면 공정하지 못하다.
우리나라 국정원은 미국을 위한 2중스파이가 너무 많다. 김대중 대통령의 발목을 잡은 것은 바로 국정원이었고, 한반도의 운명을 개척하는데 철저히 방해한 두 스파이가 모두 한국의 피를 지닌 인물이라는 사실은 놀랍고도 슬픈일이다. 노무현 정부가 왜 국정원을 개혁에 심혈을 기울이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평화선언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평화협정과 평화선언은 엄청나게 다르다.
평화협정은 통일을 하기 전 남북한이 똑같이 주권을 가지고 사이좋은 이웃국가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한반도에 두 개의 주권국가가 존재하는 것을 말하며 남북한이 외국과 같은 자격으로 되며, 이는 선언이나 문서로 되는 것이 아니고 상호 군사력을 감축하고 휴전선을 국경선으로 전환하고 유엔의 중재와 현장 검증을 통해 평화를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미국의 입장에서 남-북 평화협정은 유엔을 장악하고 있는 미국의 용인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덜 걱정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평화선언은 의미와 신뢰만이 있는 것으로 누구의 허락도 필요하지 않다. 휴전 상태가 종전 상태로 바뀌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평화선언은 휴전협정을 휴지조각으로 만들 가능성이 크다. 이럴 경우 한반도에 미군이 주둔할 명분이 없어진다. 미국의 입장으로서는 남-북이 합의만 되면 얼마든지 가능한 것으로 걱정스러운 경우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분명히 다른 점이 있다. 미국은 자기들이 손울 쓸 수 없는 평화선언 같은 것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왜냐하면 주한미군이 철수되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남-북 정상의 고민
그런데 왜 김대통령은 평화선언을 추진하려 하였던가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94년 북-미간 제네바 협정은 한반도에 평화와 통일의 기운을 싹틔웠다. 제네바 협정은 북-미간 적대행위를 중지하고 수교를 통해 서로 친구가 되기로 한 것이 주요 내용이다. 물론 이를 위해 북한의 핵은 동결되는 것이다. 이 협정의 물밑에는 주한미군이 철수하는 것도 포함이 되어 있었다.
우리민족으로서는 미국의 클린턴 정부가 한반도에 ‘동북아 확산정책’을 선택함으로서 가능 했던 천혜의 기회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 협정이 예정대로 진행된다면 남-북간 평화선언 따위는 필요조차 없는 것이었다.
동북아 확산정책이란 냉전체제 붕괴 이후 미국이 동유럽 국가들에게 적용했던 우호적 국가의 확산을 추구하는 방식으로서 한반도에 같은 유형으로 적용하려 했던 정책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클린턴 정부는 북한의 조명록 차수의 방미를 마지막으로, 클린턴 대통령 방북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정권에서 물러나게 된다.
이어 정권을 인수한 부시 정부가 제네바 협정을 인정하지 않는 길을 선택함으로서 남-북 정상의 예정이 모두 어긋나게 되어버린 것이다. 부시는 ‘한반도 영향력 유지 정책’을 선택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김대통령과 김정일위원장은 모두 제네바 협정이 계속 이어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가까운 시일 내에 제네바 협정은 파기 될 것이라는 것이다.
두 정상의 안타까움과 고민은 매우 컷을 것이다. 예정대로라면 김정일 위원장이 경의선을 통해 열차를 타고 남한을 방문하여야 하는데, 부시의 등장으로 점점 어려운 지경으로 치닫고 있었다.(남북 철도를 아직 연결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평화와 통일의 염원이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보였다 안보였다 하는 상황이었다. 이제 남과 북의 두 정상이 선택 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은 평화선언이었던 것이다.
평화선언은 어떻게 진행되려 했던 것인가?
2001년 3월13일 요미우리신문은 중요한 사실을 보도한다.
이 신문은 "남북한은 5월로 예상되는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 답방에 맞춰 평화선언을 발표하기로 합의하고, 그동안 수차례 선언 초안을 교환했다"고 보도했다. 요미우리는 이러한 정보를 제공한 뉴스 원(源)을 미 행정부 관리로 밝히며, 남북평화선언에는 남-북한군 감군 등을 포함할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이 기사의 내용은 한국 국정원의 안과장이 빼돌린 대북전략정보였고 미 첩보요원 윤씨를 통해 미국 정부로 전해졌고, 이는 다시 요미우리신문으로 전해진 것이었다.
<김대중-김정일 최후의 음모> 저자 손충무씨는 『일요시사』와의 인터뷰에서
“지난 6.15 남북 정상회담 이후 1주년을 즈음해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의 답방설이 한창 나돌았던 적이 있습니다. 당시에 나왔던 얘기가 ‘평화선언’이었지요. 김 위원장이 서울을 전격 답방해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공동 평화선언을 한다는 얘기였는데요. 평화선언 속에는 주한미군 철수가 중요항목으로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라고 말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내용은 이것이 전부다. 이 내용은 실제로 비밀리에 평화선언을 추진하려 했다는 것이고, 그 내용 속에는 주한미군 철수와 군축이 항목으로 들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한미군 철수가 포함된 평화선언은 부시 정부로 하여금 제네바 협정을 깰 수 없도록 만드는 사전포석을 지닌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만약 이 평화선언이 성사되었다면 부시도 어쩔 수 없이 클린턴의 ‘동북아 확산정책’으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왜 평화선언은 성사되지 못했는가?
미국은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 사이의 비밀 협상 내용을 낱낱이 알고 있었으며 미국이 파악한 내용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사안은 남북한 사이의 ‘평화선언’이었다.
한-미 정상 간의 만남에서 조지 W 부시는 "this man..." 운운 하며 고강도의 회초리를 휘둘르자 김대통령은 곧바로 고개를 숙이고 만다. 방미 일정 중이던 김대통령은 이틀뒤(2001년 03월10일) 워싱턴에서 다음과 같이 변심을 하고 만다.
『한겨레 신문』 2001/03/10 [긴장완화 92년합의서 활용 / 방미 김대통령 '김위원장 답방때 평화선언 안해'] 미국을 방문중인 김대중 대통령은 8일 오후(한국시각 9일 새벽) 워싱턴에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서울답방 때 한반도 긴장완화 문제는 '평화선언'식으로 해결하지 않고 1992년 남북간에 맺어진 기본합의서의 불가침합의를 활용하는 방안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략) 김 대통령은 이어 "(한-미 정상회담에서 제안한) '포괄적 상호주의'란 북한으로부터 ·제네바합의 준수, ·미사일문제 해결, ·대남무력도발 포기 등 세 가지를 받고, ·북한의 안전보장, ·적정한 경협, ·북한의 국제기구 진출 등 세 가지를 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명확히 평화선언을 포기 하겠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이 기사의 내용에서 미국이 제네바협정은 이미 끝난 것이라는 사실을 김대중 대통령에게 주지시킨 것으로 보이는 단서도 들어있다. 그러자 김대중 대통령은 받아들여지지 않을 ‘포괄적 상호주의’라는 제안을 해보기도 한다.
김대중 대통령은 참담한 마음을 안고 귀국하게 된다. 이후 한참이 지난 2001년 6월25일 6·25전쟁 51주년 참전용사 위로연에 참석해 미련의 말을 남긴다.
동아일보』 2001/06/26 "김대통령 "평화협정 남북 주도로…"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25일 “한반도에서의 휴전상태를 최종적으로 종식시키기 위해 남북간의 평화협정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평화협정에 대해서는 남북 쌍방을 비롯해 미국과 중국이 지지해야 하고 유엔의 찬성도 필요하다”며 “그러나 평화협정은 어디까지나 남북간 당사자가 주도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말한 것과 같이 평화협정은 미국의 지지가 있어야 하고, 유엔의 지지도 있어야 하므로 실현 불가능한 것이었다. 한낱 북한에게 "미안하다"는 신호에 불과한 내용이었다.
평화선언이 성사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첫번째 이유는 국정원의 친미행각 때문이었다. 비밀리에 진행되던 남-북 정상간의 전략이 국정원 안과장과 CIA 윤씨의 정보유출이 원인이다. 들켜버리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두번째 이유는 김대중 대통령이 대미 종속성을 벗어던지지 못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