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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검성

5,418 바이트 추가됨, 2008년 8월 16일 (토) 14:18
역사
*왕험성, 평양이라 불리기도 한다.
===왕검성의 성격===
왕검성은 아래의 3가지 성격을 지니고 있다.
*단군 왕검의 건국지: [[고조선]] 초기 단군 왕검의 정치적 근거지로서의 성격.
*[[고조선]]의 중심지: 단군왕검 이래 [[고조선]]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중심지로서의 성격.
*[[고조선]]의 수도: [[고조선]]이 고대국가로 발전해 가면서 단순한 중심지가 아니라 행정, 군사적인 수도로서 성격.
===위치===
현재 가장 의견이 분분한 것은 왕검성의 위치이다.
*고정설(왕검성은 그 위치가 [[고조선]] 내내 변하지 않았다는 설)
**[[요동]] 소재설: [[비파형 동검]]의 출토 범위와 [[고인돌]]의 분포지를 근거로 하여 [[만주]] 지방 [[요동]]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요동군의 속현인 '[[험독]]'을 조선계 지명인 '검터'의 한자 표기로 이해하고 이를 왕검성의 위치로 보는 학설이 있다. 본 역사신문에서도 요동 소재설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평양]] 소재설: [[북한]]도 [[1980년]]대까지는 [[요동]] 소재설을 기본적으로 적용하다가 '[[단군릉]]' 발견이후 [[고조선]]의 성립 이후부터 줄곧 평양이 [[고조선]]의 수도인 왕검성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정치적 의도(주체사상의 완성을 위한)를 의심할 만하다. 다만 [[평양]]지역도 [[고조선]] 초기부터 중요한 지역이었다는 설을 뒷받침 할 만한 고고학적 발굴은 많이 이루어졌다.
*이동설: 많은 고대사학자들이 따르고 있는 설로서, 초중기 [[고조선]]의 중심지는 [[만주]]지역과 [[요동]] 일대였으나, 후기에 이르러 [[연나라]]의 침공 등을 맞으면서 조금 더 안정적인 [[평양]] 인근 [[한반도]] 서북부로 중심지를 옮겼다는 설이다. 특히 이 설의 배후에는 '[[패수]]'가 [[청천강]]이라는 역사적 뒷받침을 안고 있다. 그러나 본 역사사전에서는 당시의 '[[패수]]'는 [[청천강]]이 아니라 [[요하]]로 전제하고 있다.
*기타 학설: 왕검성이 [[중국]] 내륙에 조금 더 가까이 있었다는 [[요서]]설, 복수수도설 등이 제기된다. 다수의 재야사학계에서는 왕검성의 위치에 대해서 기존학계와는 확연히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다.
===역사===
왕검성은 그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고조선]] 형성 초기부터 중요한 정치적 근거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초기의 왕검성은 [[한반도]]-[[만주]] 일대에서 가장 유력한 세력([[단군 왕검]]세력)의 근거지에 불과하였다. 즉, [[고조선]]이나 한반도-만주를 대표하는 어떤 역할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왕검성은 북방과 서방에서 우수한 문물을 받아들이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었다는 것은 확실시 된다. 따라서 왕검성은 [[고조선]] 내에서 점점 그 위상이 높아졌으며, 왕검성 일대는 어느 순간 [[고조선]]에서 가장 발전된 지역으로 성장하게 된다. 그리고 우수한 문물을 전파하는 창구의 역할도 맡게 된다.

[[고조선]]이 차차 체계적인 국가로 성장해 나가자 왕검성의 위상도 그에 맞게 점점 높아진다. 왕검성 내에서는 왕을 정점으로 하는 관료체계와 주변 부족 세력들이 몰려드는 곳이 되었다.

[[연나라]]와의 대립(기원전 3~4세기 경) 이후 왕검성은 더욱 발달된 체계를 갖추게 된다. [[연나라]]의 일원화 된 체계를 보면서 [[고조선]]의 왕검성도 [[연나라]]와 마찬가지로 여러 지역으로 연결된 교통망과 관료체계, 군사체계를 갖춘 도시로 성장하게 된다. 곧 [[고조선]]을 일원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사실상의 [[고조선]]의 수도로 기능하게 된다.

그 이후에도 점점 [[고조선]]의 정치적, 경제적 힘이 왕검성으로 몰리게 되었다. 그러다 [[위만]]은 왕검성을 점령하고([[기원전 194년]]) 정권을 차지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주변 세력의 큰 반발이 없었던 것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봐서 '왕검성의 주인=[[고조선]]의 최고 지배자'라는 것이 일반화 된 것으로 여겨진다.

[[한나라]]가 [[고조선]]을 침공할 때에도 왕검성을 점령하면 곧 [[고조선]]을 붕괴시킬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리하여 [[양복]]의 수군은 군대가 만들어지자 곧바로 왕검성을 공격하게 된다.([[기원전 109년]] 가을)

왕검성은 [[고조선]]의 수도 답게 우수한 방어시설과 많은 군사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서 [[한나라]] 군대는 감히 무력으로 왕검성을 점령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왕검성 내부의 분열만을 기다리는 상황이 되었다. 이렇듯 왕검성은 [[고조선]]의 수도이자, 동방([[만주]]-[[한반도]])의 최고 도시 답게 [[한나라]] 군대를 막아내었다.

왕검성이 붕괴한 이후, 그 지역에는 [[낙랑군]]이 설치되고, 왕검성은 [[낙랑군]]의 치소(행정중심지)가 되어, [[한나라]]가 옛 [[고조선]] 영토를 지배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리라 짐작된다.

[[분류:고조선]]
[[분류: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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