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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소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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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소왕은 [[부여]]의 임금이다. 생몰연대는 [[기원전 60년]]경~서기 [[22년]]이다.
대소왕은 [[금와왕]]의 장남으로 「[[삼국사기]]」에 따르면 어려서부터 고주몽([[동명성왕]])을 견제해왔다. 그러나 끝내 고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고구려]] 건국 이후 대소왕은 [[부여]]의 임금이 되어 [[고구려]] 강경책을 쓴다.
[[기원전 6년]], 대소왕은 [[고구려 유리왕]]에게 화친을 청하고, 인질교환을 요청하였다. [[고구려 유리왕|유리왕]]은 태자 [[도절]]을 보내려 하였으나, [[도절]]이 두려워하여 [[부여]]로 떠나는 것을 두려워하자 이를 핑계삼아 5만의 군대로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폭설로 후퇴하였다. 이후 여러차례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구실을 찾다가, 서기 [[21년]] [[고구려]]가 [[부여]] 남부지역을 공격하자, 전 병력을 동원하여 [[고구려]] 군에 맞섰으나 대패하고, [[고구려]] 장군 [[괴유]]에게 죽임을 당했다.(서기 [[22년]] 2월)
대소왕대에 [[부여]]는 국력이 상당했으며, 대소왕의 리더쉽 아래 일시적으로 전병력을 왕이 동원할 정도로 왕권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대소왕이 죽고 나자, [[부여]]는 크게 흔들리고, 사실상 북방에서의 패권을 [[고구려]]에게 넘겨주어야만 했다. 대소왕이 죽자, 그의 아우 가운데 하나는 [[갈사국]]이라는 망명정권을 세웠으며, 그의 다른 아우는 아예 [[부여]]에 희망을 잃고, 1만명의 부여인을 이끌고 고구려에 항복하였다.
[[분류:부여]]
[[분류:임금]]
대소왕은 [[금와왕]]의 장남으로 「[[삼국사기]]」에 따르면 어려서부터 고주몽([[동명성왕]])을 견제해왔다. 그러나 끝내 고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고구려]] 건국 이후 대소왕은 [[부여]]의 임금이 되어 [[고구려]] 강경책을 쓴다.
[[기원전 6년]], 대소왕은 [[고구려 유리왕]]에게 화친을 청하고, 인질교환을 요청하였다. [[고구려 유리왕|유리왕]]은 태자 [[도절]]을 보내려 하였으나, [[도절]]이 두려워하여 [[부여]]로 떠나는 것을 두려워하자 이를 핑계삼아 5만의 군대로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폭설로 후퇴하였다. 이후 여러차례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구실을 찾다가, 서기 [[21년]] [[고구려]]가 [[부여]] 남부지역을 공격하자, 전 병력을 동원하여 [[고구려]] 군에 맞섰으나 대패하고, [[고구려]] 장군 [[괴유]]에게 죽임을 당했다.(서기 [[22년]] 2월)
대소왕대에 [[부여]]는 국력이 상당했으며, 대소왕의 리더쉽 아래 일시적으로 전병력을 왕이 동원할 정도로 왕권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대소왕이 죽고 나자, [[부여]]는 크게 흔들리고, 사실상 북방에서의 패권을 [[고구려]]에게 넘겨주어야만 했다. 대소왕이 죽자, 그의 아우 가운데 하나는 [[갈사국]]이라는 망명정권을 세웠으며, 그의 다른 아우는 아예 [[부여]]에 희망을 잃고, 1만명의 부여인을 이끌고 고구려에 항복하였다.
[[분류:부여]]
[[분류:임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