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채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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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0년대 초반에 있었던 전 세계적인(주로 개발도상국) 채무 불이행 위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제3세계의 발전 가능성이 국제기구와 은행이 통제하는 금융과 절차에 완전히 종속된 것은 아니다. 1950년대와 1960년대 북부에서 남부로 향한 자본 흐름의 대부분은 공공자금이었다. 당시 제 3세계의 예속은 아직 완전하게 사라지지 않은 고전적 식민주의나 이들이 집중적으로 수출하는 원자재의 개발과 가격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한 데 그 원인이 있었다. 예속의 두가지 주요 현상은 불평등한 교역관계와 교역조건의 악화였다. 이 두가지 문제는 아직도 존재하지만 여기에 외채의 굴레가 더해져 문제를 심하게 악화시켰다.

1970년대부터는 세가지 요인의 상호작용으로 상황이 완전히 변화했다.

첫번째 요인은 이 시기에 발생한 자본주의의 위기이다. 자본의 이윤율이 낮아졌고(이윤의 기회가 줄어든다는 의미이다.), 1944년 창립된 국제통화제도1971년에 붕괴되었으며, 세계적으로 축적된 달러로 이미 약화의 길을 걷던 달러 가치가 폭락했고, 1973년 유가가 4배로 폭등한 것이 그것이다. 이 시기 서방의 대규모 은행들은 미국의 국제수지 적자로 인해 축적된 달러와 제1차 석유파동으로 인해 갑자기 늘어난 달러를 잔뜩 보유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들 대규모 은행들은 선진산업국들이 성장하지 못하고 허덕이는 이 시기에 제 3세계에 차관을 제공하는 광적인 경쟁을 벌이면서 제 3세계를 유혹했다. 또한 높은 인플레로 인해 실질 이자율은 무척 낮은 편이었다.

두번째 요인은 미국의 특수한 위기 상황에서 찾을 수 있다. 1979년미국은 닥쳐오는 경제 위기에서 탈출하기 위해, 심각한 인플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리고 1975년 베트남1979년 이란니카라과에서의 실패를 극복하고 세계 리더십을 되찾기 위해 극단적 자유주의로 전환하게 되며 이는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on)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지속되었다. 영국은 이미 몇 개월 전부터 마거릿 대처(Magaret Thatcher) 정부의 주도하에 신자유주의로의 강력한 전환을 실시하고 있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폴 볼커(Paul Volcker)의장은 미국 이자율을 대폭 올렸다. 이같은 결정은 자본을 보유한 자들이 미국에 투자하면 더 많은 이자를 챙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것이야말로 폴 볼커가 의도하던 바였다. 우선 자본을 끌어들여 물가상승을 억제하고 대규모 군사 사업 계획을 통해 미국 경제체제를 재가동시킨다는 것이었다. 전세계의 투자자들이 미국으로 몰려갔다. 그뿐 아니라 미국의 영향 아래 세계적으로 이자율이 가파른 상승 곡선을 그렸다. 그 결과는 무서운 것이었다.

남부 국가들에게 주어진 차관의 이자율이 낮았다고는 하지만 변동이자율이었고 북미와 영국의 이자율에 연계되어 있었다(각각 뉴욕런던에서 결정되는 프라임 레이트와 리보에 연동되어 있었다). 1970년대 4 ~ 5%이던 이자율은 16 ~ 18%로 상승했고 위기의 정점에는 위험 부담이 거대했기 때문에 그보다 더 높아지기도 했다. 남부 국가들은 하루아침에 돈을 3배나 더 갚아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게임의 규칙은 일방적으로 바뀌었고 ‘함정’은 외채 채무국들을 집어삼켜버렸다.

이와 함께 남부의 국가들은 세번째 급격한 변화를 맞게 되었다. 이들이 수출하는 원자재와 농산물의 가격이 급락한 것이다. 차관의 대부분은 달러와 같은 경화로 체결되었다. 따라서 1970년대 채무국들은 채권자들에게 자금을 상환하기 위해 좀더 많은 경화를 벌어야만 했다. 자금 상환을 지속할 수 밖에 없는 이들의 입장에서 유일하게 남은 방법은 더욱 많이 생산하여 더욱 많이 수출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북부의 수요는 전혀 증가하지 않는데 남부의 국가들은 동시에 점점 더 많은 원자재(커피, 카카오, 차, 목화, 설탕, 땅콩, 지하자원, 석유 등)를 시장에 내어놓은 것이다. 그리하여 다음 표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심각한 가격폭락현상이 발생했다.

이로써 남부는 소득은 줄어드는데 더 많은 돈을 갚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남부는 상환 기일을 지킬 수 없는 상황에 처했으며 외채의 무게에 짓눌리게 되었다. 결국 상환을 위해 다시 외채를 얻어야 했는데 그것도 거 비싸게 얻을 수 밖에 없었다. 상황은 급격하게 악화되었다.

파일:외채 위기 전개.jpg
외채 위기 전개도

1982년 8월 멕시코는 더 이상 부채를 상환하지 못한다고 발표하는 첫번째 국가가 되었다. 이어 과중한 부채에 시달린 아르헨티나브라질과 같은 나라들이 이를 따르게 된다. 이것이 바로 남부의 국가들을 뒤집어 놓은 외채위기이다. 동유럽 국가들도 예외가 아니며 우선 폴란드가 그리고 유고슬라비아루마니아가 그 뒤를 잇게 된다.

이 외채 위기는 정치와 경제계에는 경천동지의 대사건이었다. 시스템을 조정하고 위기를 예방해야 하는 국제기구들은 어떤 것도 예측하지 못했다. 위기가 나타나기 불과 몇 달 전까지도 세계은행은 미래에 대해 어떤 의심도 갖고 있지 않았다.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모든 국가는 정부의 성격이나 부패 또는 민주주의의 정도와 상관없이 모두 외채 위기를 경험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근본적인 책임의 소재를 포착하는 것이다. 책임의 핵심은 가장 선진화된 산업국들에게 있으며, 특히 미국 정부와 북부의 은행들에게 있다. 남부의 부패, 과대망상증, 민주주의의 결핍 등이 문제를 심화시키기는 했지만 위기를 초래한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다.

1980년대 라틴아메리카의 외채 위기는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폴 볼커 의장이 결정한 긴축통화정책으로 인한 이자율의 엄청난 상승 때문에 발생했다.

- 조지프 스티글리츠 (거대한 각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