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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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복지국가란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낳은 시장실패를 '정치'를 통해 교정하려는 체제다. 자본주의 시장은 많은 탈락자를 배출한다. 탈락자란 시장에서 자신의 노동력을 적절히 상품화하는 데 실패한 사람, 즉 시장에서 '밀려난 자'를 말하는데, 실업자, 노약자, 장애우 혹은 극심한 저임금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이 대표적이다. 시장실패가 낳은 이들 탈락자가 직면한 전형적인 문제가 다름아닌 불평등과 빈곤이다.

복지국가란 빈곤자의 절대적 생활수준이 일정한 수준 이하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안전망을 제공하고, 또한 계급이나 계층간의 상대적 박탈감(불평등 정도)이 너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다양한 복지제도를 도입한다. 복지국가는 시장진입에 실패한 사람들이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화하지 않고도 최저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는 의미에서 '탈상품체계'이며, 사회계층간 격차가 너무 벌어지는 것을 예방하거나 교정하는 데 관심이 있다는 의미에서 '사회재계층화체계'로 불리기도 한다.

국가마다 복지제도의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극빈자의 최저생활 보장과 자활을 위한 공적부조가 있고, 실업자를 위한 고용보험, 노약자를 위한 퇴직보험, 건강보험이 있으며, 편모(single mother)의 육아양육을 위한 육아수당도 있다. 이런 제도들을 위한 국가의 재정기여 규모가 클수록, 그리고 복지급여가 보편적 기준에 따라 행해져서 수혜자가 복지급여에의 권리를 당연한 인권의 일부로 누릴수록, 그 국가의 복지국가적 성격이 짙어진다. 예컨대 국가예산의 50%를 복지관련정책을 위해 보편적으로 지출하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국가들이 국가예산의 20%만 사용하는(게다가 수혜자를 비정상적으로 낙인찍고, 왕따시키는) 미국보다 복지국가의 성격이 훨씬 높은 것이다.

역사

산업화이론에 따르면 복지국가는 자본주의의 산업화와 같이 발달했다. 산업화는 과거의 복지제도를 소멸시킴으로써 복지기능의 공백(gap)을 만들었고, 복지를 위한 새로운 필요를 창출하였다. 이를 위해서 국가가 나선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의 복지는 누가 행했는가? 봉건귀족과 교회, 대가족제를 들 수 있다. 봉건귀족은 영주와 농노의 계약관계를 통해서 농노가 영주에게 충성과 노역의 의무를 지는 대신, 영주는 농노에게 그 가족에 대해 최소한의 물질적 복지를 제공했다. 또 교회는 방대한 조직을 바탕으로 복지정책을 실시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일정 부분의 지원을 해주었다. 물론 이런 봉건귀족과 교회의 복지는 농노와 백성들이 없으면 자신들의 경제기반이 붕괴되기 때문에(귀족들은 농노가 바치는 세금과 노역으로, 교회는 농노들의 헌금과 농노들이 대신 경작해주는 농토에서 나오는 수익으로 그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복지를 실시하였다.

하지만 최상의 복지제도는 대가족인데, 가족은 혈연체이기 때문에 노동력이 없어서 아무런 일을 못하더라도 '쫓아내지 않고, 굶기지 않는' 마지막 보루였다. 이는 우리사회도 마찬가지이다. 학생들의 학비와 사회에서 정착할 비용, 심지어 사업자금까지 모두 가족, 친적, 부모님의 경제력에서 충당된다.

그렇지만 산업화가 되면서 가족들은 흩어지고, 대가족은 붕괴했다. 귀족들은 농노와 계약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와 계약을 했으며, 교회는 예전과 같은 영향력을 지니지 못했다. 이제 거리를 떠도는 노인이나 병약자를 국가 이외에 책임질 수 있는 존재가 없어졌다. 자본주의 산업화는 계속적으로 경쟁에서 탈락한 '탈락자'들을 양산할 수밖에 없는 체제이다. 그렇다면 이제 국가가 나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세금이 필요하고, 국가는 산업화로 가장 돈을 많이 번 자본가들로부터 세금을 걷어서 이들 '탈락자'를 구제한다. 결국 가장 복지가 잘 된 나라들이 가장 선진적인 산업자본주의 국가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런 공식이 꼭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미국이나 일본은 고도의 산업자본주의 국가이지만 서유럽과 비교해 볼 때, 복지수준은 말할 수 없이 열악하다. 반면 서유럽 국가들은 국민소득 1만 달러에 도달했던 1980년대에 이미 복지국가의 완성단계로 접어들었지만, 오늘날 한국의 국가복지 수준은(국민소득 24,500달러) 우리나라보다 경제적으로 훨씬 뒤떨어지는 제3세계 국가들의 평균에도 훨씬 못 미친다.

맑스주의 좌파들은 복지국가의 역사에 대해서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복지국가를 하지 않으면 '탈락자'들과 '노동자', '힘없는 사람들'이 일어나서(혁명)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복지제도를 도입했다고 설명한다.

반면 또다른 형태의 학자들은 '노동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복지국가가 발생했다고 설명한다.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충분한 형태의 안정적인 '노동력'이 필요하며, 복지제도는 이 노동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즉, '탈락자'를 다시 '노동력이 가능한' 존재로 복귀시켜 자본주의에 있어서 꼭 필요한 노동력을 계속적으로 유지한다는 설명이다.

복지국가 위기론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약 30년간 복지국가의 황금기라고 할 수 있다. 그 기간은 자본주의가 엄청나게 발달한 융성기였는데(박정희의 경제성장도 이와 같은 세계적 흐름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서 복지재정도 크게 늘어났다. 그러나 8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복지제도를 축소하자는 의견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는데,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복지국가는 도덕적 패배를 안고 있다는 것이다.

즉, 사회복지로 인해서 노동을 하지 않고서도 먹고 살 수 있는 수준이 되자, 상당수의 탈락자들은 거기에 만족하여 노동을 하지 않고 평생을 산다는 것이다. 즉, 복지제도가 노동욕구를 감퇴시키고, 노동시장을 경직화시킨다는 것이다. 노동을 하려는 사람들이 줄고 있으며, 기업들은 할 수 없이 몇 안되는 노동자들을 비싼 임금을 주고 일을 시켜야 하며, 그로 인해서 기업은 큰 이윤을 낳지 못하게 된다. 결국 기업은 국가에 많은 세금을 낼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며, 세금이 없는 복지국가는 탈락자들을 위한 복지예산을 만들 수 없게 된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반론도 만만찮다. 오늘날 복지국가가 심각한 위기에 처해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노년층의 증가, 생산체제의 변화(기계기술의 발전으로 예전보다 더 적은 사람들만으로도 공장을 돌릴 수 있다.), 세계화(해외에 공장이 빠져나가서 실업자가 양성되는 현상)로 인해서 복지국가가 위기에 처해 있지만 복지국가들은 여전히 정부예산의 50~60%를 복지를 위해 지출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 나라들의 경제력은 조금도 감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최근에는 그에 대한 반론이 강해진 상태이다. 복지체제가 80년대 이후 유럽과 미국의 경제위기를 현명하게 극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라고 설명하고, 복지체제가 없었다면 유럽은 엄청난 혼란에 닥쳤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복지체제로 인해서 국가가 강력한 예산집행능력을 갖췄기에 경제적 위기 상황에서 국가의 역할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다.)

한국복지의 현황

한국이 본격적인 복지제도의 틀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김대중 정부에 들어와서이다. 그러나 '생산적 복지'의 구상 아래 진행된 제도정비에도 불구하고 한국복지의 양적, 질적인 내용은 여전히 부실하기 짝이 없다. 한국복지의 근본적 문제는 복지에 대한 국가의 기여도 혹은 비용부담이 형편없이 낮다는 것이다. 유럽국가들은 국민총생산의 50%를 국가예산으로 확보하고, 그 예산의 50%를 복지에 지출한다. 한국은 국민총생산의 20%정도를 국가예산으로 확보하고, 그 예산의 15% 정도만을 복지에 지출한다. (현재 한국의 복지예산은 30조원. 유럽식이었다면 250조원의 예산이 잡혀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현재 유럽과 같은 수준의 복지제도를 갖추기 위해서는 복지예산을 8배는 늘려야 한다. 그만큼 한국의 복지수준은 낮다.)

현재 한국이 갖춘 복지제도는 유럽에서는 1950년대 이미 완성된 제도들이다. 아직까지 한국은 1950년대에도 못 미치는 수준에 있으며, 이런 한국에 '복지예산이 지나치다. 복지병에 걸렸다.'라고 하는 것은 이제 막 걷기 시작한 갓난아이가 너무 빨리 달린다고 야단치는 것과 다름없는 소리다. 물론 한국의 경제수준은 이미 복지국가로 갈 수 있는 충분한 물적토대가 되어 있는 상태이다. 1천조원이 넘는 GDP는 세계 10위권에 달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성장한 상태이다.

서민층, 노동계층이 대항적 정치세력의 참여가 필요

복지국가는 방대한 예산을 동원해야 가능한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세금의 규모와 조세제도의 개혁없이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복지제도에 필요한 막대한 돈을 둘러싸고 보수세력(복지예산을 줄이고, 최종적으로 국가예산을 줄이자)과 진보세력(국가예산을 늘려 충분한 복지제도를 위한 돈을 확보하자)의 정치적 경쟁이 불가피한 상태이다. 곧, 복지는 정치적으로 풀 수밖에 없는 문제다. 따라서 복지제도의 잠재적인 수혜자인 서민층과 노동계층이 하나의 대항적 정치세력(진보적 정치세력)으로 참여하여 '정치적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한국은 노무현 정부가 출범하였지만 노조조직률은 10% 전후에 불과하며(최후진국 수준), 노조운동은 여전히 기업별, 노선별로 분산되어 있으며, 진보정당의 세력도 매우 약한 편이다. 거기에다가 노동운동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은 대항적 정치세력(진보적 정치세력)이 활동하기 힘든 상황에 놓여있다.

하지만 긍정적인 조짐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외환위기가 증명해 주었듯이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의 자본주의는 매우 불합리하며(소수의 재벌독점자본이 모든 것을 독식하였으며, 중소기업과 봉급쟁이라 불리는 서민들은 어떤 '위기'가 닥쳤을 때를 대비한 충분한 자본력을 갖추지 못했다.), 사회적인 안전망(최소한의 복지체제)가 전혀 구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였다.(한국은 국가가 복지를 대신해 준 것이 아니라 중세유럽에서와 마찬가지로 가족이 복지를 대신해 주었다. 하지만 외환위기로 인하여 가족체제마저 무너지자, 사회적 약자들은 그대로 길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이를 통하여 복지제도의 필요성을 막무가내로 부정할 수는 없게 되었다.

복지국가란 제도적 유산들의 연쇄적 집적물이다. 따라서 민주화 이후 복지에 대한 새로운 각성이 '움트고'있다는 것과 만시지탄이나마 김대중 정부 이래 정치와 노동분야의 근대적 의미의 입법화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복지한국의 향후 전망을 조금이나마 밝게 하였다. 더욱이 우리가 통일 이후의 체제에 대한 진지한 구상을 해야 하는 시점에 와 있다는 점이다.(현재 북한 국민들을 먹여살리기 위해서는 연간 최소 700조원이라는 엄청난 비용이 필요하다. 즉, 전면적이고 대규모의 복지시스템을 확보하지 않는다면 엄청난 통일비용으로 한국은 붕괴할 수 있다.) 미래 통일국가를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복지국가와 복지체제에 대한 연구가 지속적으로 필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