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조 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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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9년 강조가 일으킨 정변. 고려 왕실에서는 대대로 근친혼이 행하여지고, 사사로운 간통도 많았다. 목종의 아버지인 경종과 생모인 헌애왕후, 그리고 이모인 원정왕후 등은 친 4촌간이었다.

경종이 죽은 뒤 경종의 숙부인 왕욱은 자기 질녀가 되는 헌정왕후와 간통하여 대량군 '왕순'을 낳았다. 그런데 경종이 죽을 때, 목종은 2세 밖에 안되어 왕위는 성종이 계승하고, 헌애왕후는 천주궁에 살며 외척 김치양과 추문을 일으키게 되어 성종은 김치양을 유배시켰다. 그런데 그 후 성종이 후손 없이 죽고, 목종이 겨우 18세에 즉위하자 모후인 천추태후(헌애왕후)가 정사에 간섭하여, 앞서 유배되었던 김치양을 복권시키고 중용하였다. 이에 김치양은 제 마음대로 정사를 전횡하였다. 김치양천추태후와의 간통으로 아들이 낳게 되자 그 아들을 목종의 후계자로 삼으려 하였다.

목종이 후사없이 병을 얻자(1009년), 목종채충순에게 김치양의 음모를 말하고, 대량군 순을 후계자로 삼았다. 또한 서북면도순검사 강조에게 돌아와 궁궐을 지키도록 밀명을 내렸다. 이윽고 목종이 죽었다는 헛소문이 돌자 강조는 군사 5천을 이끌고 오다가 목종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망설였다.

부하 장수들과 함께 회의를 마친 강조는 일단 자신의 부하를 보내 대량군 순을 맞이하게 하고(고려 현종), 자신은 개경을 점령하고 목종을 퇴위시켰다. 이와 동시에 김치양을 죽이고, 천추태후와 그 무리를 귀양 보냈다. 또 사람을 보내어 폐제인 목종을 살해하였다.

이렇게 하여 강조는 정권을 장악하고 고려 현종이 즉위하였다.

그러나 이 정변은 곧 거란 침공(2차)의 구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