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hdic.kr/api.php?action=feedcontributions&user=Jkl&feedformat=atom역사위키 - 사용자 기여 [ko]2024-03-29T15:25:19Z사용자 기여MediaWiki 1.27.4http://hdic.kr/index.php?title=%EC%9C%A8%EB%A6%AC%EC%95%84_%ED%8B%B0%EB%AA%A8%EC%84%BC%EC%BD%94&diff=1694율리아 티모센코2021-08-29T02:24:31Z<p>Jkl: 판 1개를 가져왔습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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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그림:율리아 티모센코.jpg|[[우크라이나]] 총리, 정치가, 기업인|frame]]<br />
<br />
*Yulia Tymoshenko. [[우크라이나]]의 총리. <br />
[[1960년]]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났다. 빈한한 가정에서 자라 [[1979년]]에 공무원인 남편과 결혼하였다. 결혼 후 학문에 몰두하여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를 받았다. [[1989년]] [[페레스트로이카]] 물결을 타고 비디오 렌탈 사업에 뛰어들어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에너지 사업에 뛰어들게 된다. <br />
<br />
[[1995년]]에 "United Energy Systems of Ukriane" 라는 회사를 [[우크라이나]] 에너지 중개업을 하면서 재벌이 되었다. 거느렸으며, 이 과정에서 가스를 빼돌리고, 세금을 탈루하는 등 부패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1990년대 중반에는 우크라이나 최대 재벌이 되었다. 이후 정계에 투신하여 [[1996년]]에 국회의원이 되었다. [[1999년]]에 에너지 부총리 직을 역임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에너지 회사의 비리를 끊어내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에너지 회사의 공격으로 사임하였고, 그를 따르는 이들을 모아 중도좌파적인 "율리아 티모센코 블록"이라는 정당을 만들었다. [[2004년]] [[오렌지 혁명]]이후 율리아는 2005년에 총리가 되었으며, 이후 [[2007년]] 12월부터 재차 총리에 선임되었다. 그가 만든 율리아 티모센코 블록은 [[우크라이나]] 2번째 정당으로 발전하였다. <br />
<br />
[[분류:우크라이나]]</div>Jklhttp://hdic.kr/index.php?title=%EC%95%84%EC%8B%9C%ED%94%84_%EC%95%8C%EB%A6%AC_%EC%9E%90%EB%A5%B4%EB%8B%A4%EB%A6%AC&diff=1696아시프 알리 자르다리2021-08-29T02:24:31Z<p>Jkl: 판 1개를 가져왔습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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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파키스탄]]의 새 대통령. [[2008년]] 9월에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베나지르 부토]] 전 총리의 남편이다. <br />
앞선 대통령 [[페르베즈 무샤라프]]는 대통령 사임 압력을 받고 사퇴하였다. 이에 대통령 선거가 열렸으며, 그가 소속된 [[파키스탄 인민당]]의 압도적인 지지와 여타 세력들의 지지로 총 투표수 702표 가운데 458표를 얻어 새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파키스탄은 간선제이다. <br />
<br />
하지만 [[미국]]과 [[나토]]군과의 관계(파키스탄은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 적극 협력하였다.), 이에 반대하는 반란세력의 설득 등 여러 난관을 안고 대통령직에 올랐기 때문에 그의 미래는 순탄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3차례에 걸친 군부독재로 군대에 대한 영향력을 놓치는 순간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 지 모른다. <br />
[[분류:파키스탄]]</div>Jklhttp://hdic.kr/index.php?title=%ED%8E%98%EB%A5%B4%EB%B2%A0%EC%A6%88_%EB%AC%B4%EC%83%A4%EB%9D%BC%ED%94%84&diff=1698페르베즈 무샤라프2021-08-29T02:24:31Z<p>Jkl: 판 1개를 가져왔습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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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전 [[파키스탄]] [[대통령]]. [[1999년]] 10월에 군부 쿠데타로 [[파키스탄]] 정권을 장악하였으며, [[2008년]]에 사임하였다. <br />
[[1943년]]생이다. 그는 젊은 나이에 장군이 되어([[1965년]]) 두 차례에 걸친 [[인도-파키스탄 전쟁]]과 [[시아첸 분쟁]], [[카길 전쟁]]에 참여하였다. 대장이 된 무샤라프의 권력을 두려워 한 [[나와즈 샤리프]] 총리가 군부를 몰아내려고 하였으나, 군부는 [[1999년]] 10월에 쿠데타를 일으켜 무샤라프는 권력을 장악한다. [[2001년]] 7월 20일에는 허수아비 대통령인 Muhammad Rafiq Tarar가 물러나고 무샤라프가 [[파키스탄]] 11대 대통령직에 오른다. <br />
<br />
독재정권을 유지하고, 경제성장을 시도하였으나 잘 되지 않았고, [[2005년]]에는 [[파키스탄 대지진]]이 일어나 큰 피해를 입었다. [[2001년]]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분으로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하자, 이를 적극 후원하였다. [[미국]]은 [[파키스탄]]의 도움 아래 손쉽게 [[아프가니스탄]]으로 진격할 수 있었다.<br />
<br />
[[2007년]] 대통령에 재선되었지만, 정치적 기반은 점점 협소해져갔다. 의회도 내주었고, 대법원을 중심으로 한 법조계는 애초부터 그를 비판적 바라보았다. [[2000년]]에도 대법원은 쿠데타를 추인하는 대신 3년 안에 민정이양을 명령하였다. 든든한 우방이던 [[미국]]도 중립으로 돌아서면서 무샤라프 대통령은 탄핵위기에 몰리자 [[2008년] 8월 18일 사임하였다. <br />
[[분류:파키스탄]]</div>Jklhttp://hdic.kr/index.php?title=%EB%AF%B8%EA%B5%AD&diff=1700미국2021-08-29T02:24:31Z<p>Jkl: 판 1개를 가져왔습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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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미국(표준어: 美國, 문화어: 米國)은 [[북아메리카]]에 위치한 연방 국가이다. 공식 명칭은 아메리카 합중국(아메리카 合衆國, United States of America)이다. 본토의 48개 주와 [[하와이]] 주, [[알래스카]] 주를 포함해 [[2006년]] 현재 총 50개 주와 1개 특별구(D.C.)로 구성되어 있다.<br />
<br />
==국가개요==<br />
*정부형태: [[연방제]], [[대통령]]제<br />
*수도: 워싱턴 D.C<br />
*공용어: (사실상)영어<br />
*면적: 9,631,420 km (3위)<br />
*인구: 301,154,000명 (2007년 집계)<br />
*GDP: $13조 1300억(2006년 집계, 1위)<br />
*1인당 국민소득: $43,555(3위)<br />
*노동인구: 1억 5140만명<br />
<br />
===미국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br />
*[[미국의 정치]]<br />
*[[미국의 경제]]<br />
*[[미국의 사회]]<br />
*[[미국의 문화]]<br />
==역사==<br />
===식민지시대===<br />
미국 지역에 맨 먼저 식민지를 세우려 한 사람들은 스페인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실패하였다. 영국도 여러 차례의 시행착오 끝에 1607년 당시 제임스타운(버지니아)식민지를 세웠다. <br />
<br />
이어 네덜란드의 신교도들이 종교박해를 피해, 플리머스 식민지(지금의 메사추세츠)를 세웠다. 이후 영국은 대서양 주 연안에 총 13개의 식민지를 개척하였다. <br />
<br />
그리고 프랑스의 식민지(캐나다 퀘벡)와 인디언 등 여러 세력이 미국 동해안에서 각축하였다. 이런 작은 다툼들의 최종승리를 영국이 가져갔으며, 영국이 대서양 연안의 주도권을 쥐었다.<br />
<br />
===독립혁명===<br />
영국의 식민지는 프랑스와 스페인과는 달리 국왕의 직접적인 통제 밖에 있었다. 따라서 상당한 자치를 누리고 있었다. <br />
<br />
그러나 영국 본국에서는 식민지인들의 동의 없이 세금을 부과하는 한편, 식민지인들의 서부로의 진출도 제한하였다. 이에 식민지인들은 반발하였으나, 처음부터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br />
<br />
그리하여 식민지인들은 온건파(왕당파)를 중심으로 영국왕 '조지 3세'에게 타협안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조지 3세는 그 타협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br />
<br />
영국군의 선제공격으로 전쟁은 시작되었고, 식민지 대표들이 모인 대륙회의에서는 전쟁을 결의하였다. 전쟁은 예상외로 식민지군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 영국 내부의 지지세력이 있었으며, 프랑스의 지원도 충분했다. 1776년 전쟁을 선포하고, 1783년 파리조약에서 공식적으로 독립이 승인되었다. <br />
<br />
각 식민지들은 이제 13개의 독립공화국으로 형성되었다. 13개의 공화국은 서로 뭉쳐야 살 수 있다는 것을 직시하고, 연방을 결성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이들은 일단 [[연합 정부]]를 결성하였고, 1787년 필라델피아에서 연방헌법을 제정하였다. <br />
<br />
1789년 3월 4일, 새로운 중앙정부인 '미합중국'이 탄생하였고, 13개의 공화국은 13개의 주로 연방에 가입하였다. 1789년 4월 30일에는 초대 대통령으로 조지 워싱턴을 선임하였다.<br />
<br />
===미국 정부의 수립===<br />
미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1790년대에 벌써 3개의 주가 추가로 가입하였다. 버몬트주(1791년), 켄터키주(1792년), 및 테네시주(1796년)가 바로 그들이다. 그리고 미국의 주요 기본 이념들이 형성되었다. 미국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은 퇴임사에서 "외부세계의 그 어떤 부분과도 항구적인 동맹을 맺는 일을 피하라"고 지적하고, 폐쇄적인 이념을 제시하였다. 이는 미국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br />
<br />
하지만 연방공화국이 만들어졌지만, 여전히 반 연방주의자들이 각 주의 권리와 독립을 주장하고 나섰다. 이들의 중심세력이 토마스 제퍼슨이었다. 반 연방주의자들은 농촌과 남부지역의 이익을 대변했다. <br />
<br />
반면 연방과 중앙정부의 권한을 강화하자는 연방주의자들이 반 연방주의자들과 맞섰다. 알렉산더 해밀턴을 중심으로 한 연방주의자들은 도시와 상공업자의 이익에 기반하였다. <br />
<br />
3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은 시민의 자유과 권리, 민주주의에 대한 기반을 다져놓았고, 루이지애나지역을 확보함으로서 미국 영토를 배로 늘렸다. <br />
<br />
4대 대통령인 제임스 메디슨 시기에 1812년 영국과의 전쟁에서도 승리를 거둠으로서 미국의 기반을 다져놓았다.<br />
<br />
===서부개척===<br />
19세기 중반이 되자 미국은 영토를 팽창하여 지금과 비슷한 판도를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광할한 영토를 개척하게 되었는데, 이것을 '프런티어'라고 부른다. 반면 북미 인디언들에게는 '멸족의 시기'였다. <br />
<br />
공백지나 다름없는 새 땅은 가난한 농민이 비교적 용이하게 토지를 획득할 수 있었고, 자작농이 될 가능성이 있었으므로, 동부의 노동자도 충분한 임금을 받지 못할 때는 서부를 비롯해 미개척지로 가서 새로운 개척을 할 수가 있었다. 따라서 기술을 가진 노동자는 고용주로부터 우대를 받아 그 사회적 지위도 유럽에 비하여 월등히 높아졌다. 1848년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이 발견되고 골드러시 선풍이 일기 시작하자 새로운 프런티어가 서부에서 동부를 향하여 이동하게 되었고, 이들은 서부로 진출하는 프런티어와 대개 로키산맥 지대에서 만나게 되었으며, 대륙횡단철도는 이 현상을 가속화시켰다. <br />
<br />
서부 개척으로 인구가 늘어나 미 연방에 가입할 수 있는 새로운 주들이 생겼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미국 대분열의 시초였다.<br />
<br />
===남북의 갈등===<br />
새로운 주들이 남부가 되느냐, 북부가 되느냐는 그들의 이해관계가 걸린 중요한 것이었다. 남부지역은 농업을 기반으로 대규모 노예 노동력과 개방정책을 기반으로 경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br />
<br />
반면 북부지역은 공업화가 가속되면서 값싼 노예 노동력이 필요했으며, 개방정책으로 인한 영국 철강산업의 침투는 북부 공업지역에 있어서 치명적이었다. 따라서 폐쇄적인 높은 관세를 요구하였다. <br />
<br />
1860년 링컨은 북부의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되었다. 그는 북부를 위한 정책을 시행하였다. 반발한 남부는 연방을 탈퇴하여 '남부연합'이라는 새로운 나라를 만들었다. 링컨은 새로운 나라를 반란군으로 규정하고 남부를 공격하였다. 남북전쟁의 시작이었다. <br />
<br />
예상 외로 남부지역이 선전하였지만, 결국 압도적인 물자와 경제력을 가진 북부를 당해낼 수는 없었다. 미국은 재통합되었고, 갈등의 불씨였던 흑인노예들은 형식적인 해방을 맞이했지만, 완전한 참정권을 얻는 데만도 100년이 걸릴 정도로 그들의 권리는 느리게 보장되었다.<br />
<br />
===미국의 성장===<br />
북부를 중심으로 한 미국 공업은 계속 발전하고, 그에 따라 대 재벌도 생겨나게 되었다. 석유업, 철강업을 기반으로 한 대 재벌들은 독점화 경향을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연방정부는 이들을 방치하였다. 1887년 '주간통상법'이라는 법률을 통해 처음으로 이들을 제어하였다. <br />
<br />
높은 관세로 인한 폐쇄정책으로 미국 공업은 외부자본의 압력 없이 순조롭게 발전하였다. 이렇게 축적된 기술과 생산력은 서서히 외부로 뻗어나갔다. <br />
<br />
미서전쟁을 시작으로 미국은 빠르게 외부세력으로 뻗어나갔다. 이 무렵, 독점자본에 반대하는 세력들과 노동조합운동이 생기기 시작하여 미국사회에서 혁신적인 세력을 이루게 되었다.<br />
<br />
===혁신시대===<br />
테오도르 루스벨트 대통령이 취임한 1901년부터 1919년까지 이른바 '혁신시대'라고 부른다. 이 시기에 독점에 반대하는 '반트러스트법'을 포함하여 대대적인 제한이 가해졌다. 누진소득세가 만들어졌으며, 공무원과 중앙정부가 확대되었다. <br />
<br />
대재벌들에게 주던 특혜는 폐지되었고, 대신 관세를 철폐하여 폐쇄무역(보호무역)체제를 해체시켜 대 재벌들이 세계로 진출할 수 있도록 하였다. <br />
<br />
그리고 금융에 대한 통제가 행해지고, 금융의 공공성을 강화시켰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제도가 '연방준비법'이다. 우리가 잘 아는 '연방준비제도 이사회'는 이 연방준비법에 의하여 각 연방은행들을 총괄하는 의결기구이다.<br />
<br />
노동자와 농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법들이 제정되었고, 퇴임한 테오도르 루스벨트 대통령은 '진보당'이라는 정당을 만들어 대통령직에 재도전할 정도였다.<br />
<br />
===1차 세계대전과 번영, 그리고 공황===<br />
미국은 1차 세계대전의 참전으로 엄청난 호황을 누렸다. 미국은 전쟁 당사국에게 엄청난 양의 무기와 군수물자를 팔았으며, 전쟁의 피해는 전혀 입지 않았다. <br />
<br />
1920년대 미국은 자동차, 영화 등 새로운 산업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엄청난 호황기를 누렸다. 대외적으로는 보호무역을 부활시키고, 대내적으로는 대재벌에게 부과하던 규제를 완화하여 다시 자유방임으로 돌아갔다. <br />
<br />
그러나 금융에 대한 과도한 투기는 주가폭락으로 인한 공황을 초래하였다. 1929년부터 시작된 미국의 대공황은 국민소득을 25%이상 하락시켰고, 노동자의 1/3은 실직상태에 빠졌다. 은행예금은 고갈되었다. <br />
<br />
미국 건국 이래 최대의 위기가 닥친 것이었다.<br />
<br />
===뉴딜정책과 2차 세계대전===<br />
1933년 집권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뉴딜정책을 시행하여, 국가가 직접적으로 경제에 개입하였다. 대규모 토목사업을 벌여서 일단 실직자를 구제하였고, 공기업을 만들어서 민간기업의 폭리를 제한하였으며, 동종산업의 독과점을 방지하고 경쟁구도를 만들면서 건전성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였다. <br />
<br />
1935년에 제정된 '바그너법'을 통해 노동조합은 크게 확대되었고(대신 보수화되었다.), 최저임금제, 노동시간 제한 등의 조치들이 강력하게 시행되었다. <br />
<br />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군을 증강하여 세계대전에 대비하였다. 그리고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도 2차 세계대전에 개입하게 되었다. <br />
<br />
미국은 유럽과 태평양에서 동시에 승리를 거두었으며, 민간기업은 군수산업으로 전환하여 급속한 성장을 이루었다. 유럽의 강대국이 초토화되는 동안 미국은 1차 세계대전과 마찬가지로 군수물자의 수출을 통해 경제적인 번영을 되찾았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미국은 세계 GNP의 40%를 차지할 정도였다.<br />
<br />
===냉전기의 미국===<br />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소련과의 냉전시기에 들어선다. 매카시즘을 위시한 반공 이데올로기가 널리 퍼지고,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 등에 참여할 뿐만 아니라, 각국에 좌파 정권이 들어서면 우파 정부의 쿠데타를 지원하여 전 세계에 미국이 개입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br />
<br />
미국은 초토화된 유럽과 일본을 재건시켜, 사회주의를 막는 방파제로 삼으려 하였다. 이 대규모 재건 계획을 '마샬플랜'이라고 한다. 마샬플랜으로 동유럽과 소련을 포위하는 구도를 만드려 하였다. <br />
<br />
이때 정치적, 외교적으로는 대단히 경직되고 살벌한 시기였지만, 경제적으로는 대단히 풍요로웠다. 텔레비전이 전국에 보급되었고, 뉴딜정책 이후 국가의 기업규제는 줄어들었다.<br />
<br />
===변화의 시대===<br />
보수적으로 흐르는 미국에 변화를 주기 위하여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당선되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과 스타일과는 달리 정부에 의한 규제와 복지는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br />
<br />
또한 미국 사회에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던 인종차별은 1950년대를 지나면서 폭발하여 흑인들의 권리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반전운동이 등장하여 미국의 패권주의에 제한을 걸려고 하였다. <br />
<br />
이 시기 젊은이들은 반항적인 사고를 대부분 가지고 있었으며, 적극적으로 행동하기도 하였다. 반면에 사회에 비판적이지만 행동하지 않고 회피하는 '히피'들도 이 시기 나타나기 시작했다.<br />
<br />
그리고 환경을 중시하는 환경주의자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br />
<br />
===유일 초강대국 미국===<br />
1980년대 레이건 대통령의 강력한 소련 압박 정책으로 잠시 신냉전질서가 구축되었으나, 소련의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개혁, 개방정책으로 냉전질서는 붕괴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개혁과 개방으로 치닫던 소련은 해체을 길을 걷고 말았으며, 사실상 미국 만이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남게 되었다. <br />
<br />
미국은 이 시기 공업중심에서 최첨단 IT산업으로 경제체질을 바꾸면서 다시 한 번 큰 성장을 일궈내었다. 미국은 세계화-신자유주의라는 이름 하에 미국식 시스템을 세계에 보급하고, 미국식 시스템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을 목표로 하게 되었다. 실로 유일 초강대국의 등장이었다. <br />
<br />
미국에 기반을 둔 엄청난 투기자본들은 전 세계를 돌면서 금융질서를 주물럭 거렸으며, 그 누구도 견제할 수 없는 군사력은 전 세계 분쟁지역에 모두 끼어들게 되었다. 사실상 지구상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지 않는 나라는 없게 되었다. <br />
<br />
그러나 미국 사회의 빈부격차, 독점경제, 지나친 투기자본의 대두는 미국사회와 경제를 불안하게 하는 중요 요인이며, 중국과 러시아 인도 등 신흥 강국들이 등장하면서 미국의 패권에 제동을 걸려고 하는 형국이다.<br />
<br />
==역대 대통령==<br />
#[[조지 워싱턴]]([[1789년~1797년]])<br />
#[[존 애덤스]]([[1797년~1801년]])<br />
#[[토머스 제퍼슨]]([[1801년~1809년]]) <br />
#[[제임스 매디슨]]([[1809년~1817년]]) <br />
#[[제임스 먼로]]([[1817년~1825년]]) <br />
#[[존 퀸시 애덤스]]([[1825년~1829년]]) <br />
#[[앤드루 잭슨]]([[1829년~1837년]]) <br />
#[[마틴 밴 뷰런]]([[1837년~1841년]]) <br />
#[[윌리엄 헨리 해리슨]]([[1841년]])<br />
#[[존 타일러]]([[1841년~1845년]]) <br />
#[[제임스 포크]]([[1845년~1849년]]) <br />
#[[재커리 테일러]]([[1849년~1850년]]) <br />
#[[밀러드 필모어]]([[1850년~1853년]]) <br />
#[[프랭클린 피어스]]([[1853년~1857년]]) <br />
#[[제임스 뷰캐넌]]([[1857년~1861년]]) <br />
#[[에이브라함 링컨]]([[1861년~1865년]]) <br />
#[[앤드류 존슨]]([[1865년~1869년]]) <br />
#[[율리시스 그랜트]]([[1869년~1877년]]) <br />
#[[러더퍼드 헤이스]]([[1877년~1881년]]) <br />
#[[제임스 가필드]]([[1881년]])<br />
#[[체스터 아서]]([[1881년~1885년]]) <br />
#[[그로버 클리블랜드]]([[1885년~1889년]]) <br />
#[[벤저민 해리슨]]([[1889년~1893년]]) <br />
#[[그로버 클리블랜드]]([[1893년~1897년]]) <br />
#[[윌리엄 매킨리]]([[1897년~1901년]]) <br />
#[[시어도어 루스벨트]]([[1901년~1909년]]) <br />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1909년~1913년]]) <br />
#[[우드로 윌슨]]([[1913년~1921년]]) <br />
#[[워런 하딩]]([[1921년~1923년]]) <br />
#[[캘빈 쿨리지]]([[1923년~1929년]]) <br />
#[[허버트 후버]]([[1929년~1933년]]) <br />
#[[프랭클린 루스벨트]]([[1933년~1945년]]) <br />
#[[해리 트루먼]]([[1945년~1953년]]) <br />
#[[드와이트 아이젠하워]]([[1953년~1961년]]) <br />
#[[존 F. 케네디]]([[1961년~1963년]]) <br />
#[[린든 존슨]]([[1963년~1969년]]) <br />
#[[리처드 닉슨]]([[1969년~1974년]]) <br />
#[[제럴드 포드]]([[1974년~1977년]]) <br />
#[[지미 카터]]([[1977년~1981년]]) <br />
#[[로널드 레이건]]([[1981년~1989년]]) <br />
#[[조지 H.W. 부시]]([[1989년~1993년]]) <br />
#[[빌 클린턴]]([[1993년~2001년]]) <br />
#[[조지 W. 부시]]([[2001년~2009년]]) <br />
#[[버락 오바마]](2009년~)<br />
<br />
==미국의 행정구역==<br />
<onlyinclude>{| class="toccolours" style="margin: 0.5em auto; clear: both;" align="center"<br />
! colspan = "2" align="center" style="background:#ccccff;" | [[미국]]의 행정 구역<br />
|- valign="top" <br />
! 미국의 주(가나다순)<br />
| 네바다 | 네브래스카 | 노스다코타 | 노스캐롤라이나 | 뉴멕시코 | 뉴욕 | 뉴저지 | 뉴햄프셔 | 델라웨어 | 로드아일랜드 | 루이지애나 | 매사추세츠 | 메릴랜드 | 메인 | 몬태나 | 미네소타 | 미시간 | 미시시피 | 미주리 | 버몬트 | 버지니아 | 사우스다코타 | 사우스캐롤라이나 | 아이다호 | 아이오와 | 아칸소 | 알래스카 | 애리조나 | 앨라배마 | 오리건 | 오클라호마 | 오하이오 | 와이오밍 | 워싱턴 | 웨스트버지니아 | 위스콘신 | 유타 | 인디애나 | 일리노이 | 조지아 | 캔자스 | 캘리포니아 | 캔터키 | 코네티컷 | 콜로라도 | 테네시 | 텍사스 | 펜실베니아 | 플로리다 | 하와이<br />
|-<br />
! width="50" | 특별구<br />
| 워싱턴 D.C.<br />
|-<br />
! 속령<br />
| 괌 | 나바사 섬 | 미국령 버진아일랜드 | 미드웨이 섬 | 베이커 섬 | 북마리아나 제도 | 아메리칸사모아 | 웨이크 섬 | 자비스 섬 | 존스턴 섬 | 킹맨 섬 | 팔미라 섬 | 푸에르토리코 | 하울랜드 섬<br />
|}</onlyinclude><br />
<br />
==참고링크==<br />
*[http://www.americanhistory.or.kr 미국사학회]<br />
<br />
[[분류:미국]]<br />
[[분류:아메리카사]]</div>Jklhttp://hdic.kr/index.php?title=%EB%B6%84%EB%A5%98:%EB%AF%B8%EA%B5%AD&diff=1702분류:미국2021-08-29T02:24:31Z<p>Jkl: 판 1개를 가져왔습니다</p>
<hr />
<div>미국과 관련된 모든 것. 역사 포함.</div>Jklhttp://hdic.kr/index.php?title=%EB%AF%B8%EA%B5%AD_%ED%8C%8C%EC%82%B0%EC%84%A4&diff=1704미국 파산설2021-08-29T02:24:31Z<p>Jkl: 판 1개를 가져왔습니다</p>
<hr />
<div>Source: http://www.truthdig.com/report/page2/20090614_the_american_empire_is_bankrupt/<br />
<br />
by Chris Hedges<br />
<br />
이번주는 세계 기축통화로써 달러의 지배가 끝났음을 나타낸다. 이는 미국에서 경제적, 정치적 쇠퇴의 끔찍한 기간의 시작임을 나타낸다. 이는 또한 미국제국의 마지막 헐떡거림을 의미한다. 이제는 끝이다. 되돌릴수 없다. 앞으로 다가올 일은 매우 고통스러울 것이다.<br />
<br />
역사에서 가장 거대한 경제적 붕괴를 우리가 겪고 있는 동안, 뉴스라며 공허한 잡담과 쓰레기 같은 이야기를 퍼트리기를 계속하는 공<br />
공언론에 의해 원조받고 있는 버락 오바마는 우리를 바보로 만들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계의 나머지 사람들은 우리가 파산한다<br />
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국가들은 만약 그들이 부풀려진 달러를 계속 지지하고 대량의 연방 예산부족-2조 달러 이상-<br />
을 유지해 간다면 비난받게 될 것이다. 이 비용은 유라시아와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미국제국의 확장에 사용되었다.<br />
<br />
월요일과 화요일에 러시아의 Yekaterinburg에서, 중국 주석 Hu Jintao와 러시아 대통력 Dmitry<br />
Medvedev 그리고 Shanghai Cooperation 조직의 6개 국가들의 최고 정부지도자들이 모임이 있었다. 모임의 참<br />
석을 요청한 미국은, 참석이 거부되었다. 거기서 무엇이 일어났는지 자세히 보라.<br />
<br />
경제학자 Michael Hudson의 말을 인용하면, 모임은 "21세기에서 지금까지 가장 중요한 모임"이었다. 그것은 세계의 기<br />
축통화로써 달러를 대체하기 위하여, 우리의 주요 무역 파트너들의 첫번째 공식적인 단계이다. 그들이 성공한다면, 달러는 현저하게가치를 잃을 것이다. 그리고 오일을 포함한 수입비용과 이자율은 상승할 것이고 일자리는 격감할 것이다. 주와 연방서비스는 자금의부족으로 감소되거나 중지될 것이다. 미국은 바이마르 공화국이나 짐바브웨를 닮아갈 것이다. 구원자의 모습으로 보인 오바마는 갑자기 가련하고 서투르고 약하게 보일 것이다.<br />
<br />
나는 Monday's Financial Times에서 'The Yekaterinburg 전환점: 탈 달러와 그리고 미국 경제-군<br />
사지배의 종말'이라는 기사를 쓴 Hudson에게 연락했다. Hudson는 기사에서 "Yekaterinburg는 독재자 뿐만 아니<br />
라 미국제국의 죽음의 장소이다." 고 말한다. 그의 기사는 5월 28일 London Review of Books에 실린 세계은행<br />
시스템에 대한 John Lanchester의 기사와 함께 읽을 가치가 있다.<br />
<br />
"이는 달러의 종말을 의미한다. " 고 Hudson은 나에게 말했다. "이는 중국, 러시아, 인도, 파키스탄, 이란이 유라시아에<br />
서 미국을 몰아내기 위해 공식적인 경제적 군사적 지역을 형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국제수지 부족은 주로 군사적인 부분이다. 미국의 임의의 소비반은 군사적인 부분이다. 부족액은 외국은행들들과 중앙은행의 손에서 끝난다. 그들은 미국정부의 빚을 사기 위한 돈을 재활용하기 위하여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들은 갚을 기회가 없는 달러를 받아들이도록 강요받는다. 그들은 그들에 대한 미국의군사적 침략을 지불하고 있다. 그들은 이것을 제거하려고 한다."<br />
<br />
<br />
이러한 세계적 변화의 구조는 만약 그들이 달러를 제거한다면, 그들이 또한 미국의 군사적 우위도 제거할 것이다는 것을 의미한다.<br />
우리의 군사적 소비는 과도한 차용 없이는 유지될 수 없다. 2008년 미국의 공식적인 방위예산은 6,230억 달러이다.<br />
Central Intelligence Agency에 의하면다음으로 중국의 군사예산은 650억 달러이다.<br />
<br />
<br />
여기에 국제수지 부족의 3가지 카테고리가 있다. 미국은 수출보다 수입을 많이 한다. 월 스트리트와 미국 법인은 외국회사를 사들인다. 이것은 자본의 이동이다. 마지막 세번째 가장 중요한 국제수지 부족은, 지난 50년동안 펜타곤의 해외에서의 소비이다. 지난5년동안 국제수지 부족은 주로 군사적 소비와 관계있다. Survery of Current Business에 게재된<br />
Balance of Payments 내용에서 5번 표를 보라. 그리고 군사소비를 보면 당신은 부족액을 알 수 있을 것이다.<br />
<br />
<br />
"우리는 우리 자신의 군사적 소비를 지불해야 할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한 유일한 방법은 고용율을 감소시키는 것이다. 월스트리트는 이것을 알고 있다. 부시와 오바마가 생존에 충분한 돈보다 더 많은 비용인 10조 달러를 준 이유이다. " 고 Hudson은<br />
말한다.<br />
<br />
<br />
경제적 붕괴를 막기위한 우리의 노력은 세계2차대전 이후로 보지 못한 중재상태로 촉발시키고 있다. 또한 그것은 우리를 알지못하는 상황으로 내몰고 있다.<br />
<br />
London Review of Books에서 Lanchester는 "우리는 우리의 경제시스템에 의해서 만들어진 구멍에서 벗어나<br />
기 위하여 전쟁을 선언해야 했던 효과를 받고 있다. 이러한 상황엔 모델이나 선례가 없고, 정말로 옳았는지 논할 방법이 없다. 왜<br />
냐하면 그와 같은 자본주의 모델 때문에... 그와 같은 모델은 없었다. 이와 같은 상황으로 작동할 것으로 예측되지 않았고, 어<br />
떤 일이 일어날 지에 대한 지도도 없다. " 고 말한다.<br />
<br />
의료혜택을 받거나 음식을 사는 것과 같은 일상생활의 지불은 어려워질 것이다. 주와 도시들은 그들의 연금자금이 유출되고 마침내 중지되는 것을 보게 될것이다. 정부는 도로, 운송수단, 사단법인과 같은 사회기반시설들을 팔도록 강요될 것이다. 우리가 대량의 손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실제 값으로 땅을 팔기가 어려울 것이다. 거리마다 빈 가게들이 생겨날 것이다. 저당권의 반환상실이 널리퍼질 것이다. 기업에 의해 조종되는 언론은 필요없는 이야기거리와 광경들, 그리고 성과 폭력, 공포와 속된 정치들로 우리를 마취시킬 것이다. 미국은 많은 파산자들의 하류층으로 구성될 것이고, 소수의 독재정치가 잔인하고 무자비한 신생 봉건제도 시스템을 운영할 것이다. 미국은 우리의 권력 엘리트들의 저속한 위법행위로 인해, 우리는 곧 값진 댓가를 치를 것이다.<br />
<br />
원문 주소 -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table=global&uid=113855<br />
[[분류:미국]]<br />
[[분류:아메리카사]]</div>Jklhttp://hdic.kr/index.php?title=%EC%95%84%EC%A6%88%ED%85%8D_%EB%AC%B8%EB%AA%85&diff=1706아즈텍 문명2021-08-29T02:24:31Z<p>Jkl: 판 1개를 가져왔습니다</p>
<hr />
<div>중앙아메리카 대륙에 있던 문명. <br />
[[분류:아메리카사]]</div>Jklhttp://hdic.kr/index.php?title=%EB%B6%84%EB%A5%98:%EA%B7%B8%EB%A3%A8%EC%A7%80%EC%95%BC&diff=1660분류:그루지야2021-08-29T02:24:31Z<p>Jkl: 판 1개를 가져왔습니다</p>
<hr />
<div>[[그루지야]] 관련 문서. [[소비에트 연방공화국]] 산하 [[그루지야]] 역사도 포함. <br />
[[분류:서양사]]</div>Jklhttp://hdic.kr/index.php?title=%EB%B6%84%EB%A5%98:%EB%9F%AC%EC%8B%9C%EC%95%84&diff=1662분류:러시아2021-08-29T02:24:31Z<p>Jkl: 판 1개를 가져왔습니다</p>
<hr />
<div>[[러시아]](고대 이후) 관련 역사 모음. 단, [[소비에트 연방공화국]] 관련 문서는 따로 분류를 만든다. <br />
[[분류:서양사]]</div>Jklhttp://hdic.kr/index.php?title=%EB%A0%88%EC%BD%A9%ED%82%A4%EC%8A%A4%ED%83%80&diff=1664레콩키스타2021-08-29T02:24:31Z<p>Jkl: 판 1개를 가져왔습니다</p>
<hr />
<div>[[711년]]~[[1492년]]까지 780년 동안 [[이베리아반도]]의 [[기독교]]도, 귀족세력이 이슬람 세력에 대항하여 벌인 국토 회복운동.<br />
<br />
===이슬람의 침공===<br />
<br />
===13세기 이전===<br />
<br />
===13세기 이후===<br />
<br />
===레콩키스타의 완성===<br />
<br />
[[분류:서양사]]<br />
[[분류:에스파냐]]</div>Jklhttp://hdic.kr/index.php?title=%EB%B6%84%EB%A5%98:%EB%A1%9C%EB%A7%88&diff=1666분류:로마2021-08-29T02:24:31Z<p>Jkl: 판 1개를 가져왔습니다</p>
<hr />
<div>고대 [[로마 제국]]과 관련된 역사 총정리. <br />
<br />
[[분류:서양사]]</div>Jklhttp://hdic.kr/index.php?title=%EB%B6%84%EB%A5%98:%EB%A3%A8%EB%A7%88%EB%8B%88%EC%95%84&diff=1668분류:루마니아2021-08-29T02:24:31Z<p>Jkl: 판 1개를 가져왔습니다</p>
<hr />
<div>[[분류:서양사]]</div>Jklhttp://hdic.kr/index.php?title=%EB%B6%84%EB%A5%98:%EC%86%8C%EB%A0%A8&diff=1670분류:소련2021-08-29T02:24:31Z<p>Jkl: 판 1개를 가져왔습니다</p>
<hr />
<div>[[소비에트 연방공화국]] 관련 문서.<br />
[[분류:서양사]]</div>Jklhttp://hdic.kr/index.php?title=%EC%95%84%ED%94%84%EA%B0%80%EB%8B%88%EC%8A%A4%ED%83%84&diff=1672아프가니스탄2021-08-29T02:24:31Z<p>Jkl: 판 1개를 가져왔습니다</p>
<hr />
<div>중앙아시아에 위치한 국가. <br />
<br />
==역사==<br />
<br />
==정치==<br />
<br />
==사회==<br />
<br />
==경제==<br />
<br />
==외교==<br />
<br />
==이슈==<br />
*[[소련 아프가니스탄 침공]]<br />
*[[미국 아프가니스탄 침공]]<br />
*[[아프간 피랍사태]]<br />
<br />
[[분류:서양사]]<br />
[[분류:아프가니스탄]]</div>Jklhttp://hdic.kr/index.php?title=%EB%B6%84%EB%A5%98:%EC%BD%9C%EB%A1%AC%EB%B9%84%EC%95%84&diff=1708분류:콜롬비아2021-08-29T02:24:31Z<p>Jkl: 판 1개를 가져왔습니다</p>
<hr />
<div>남미에 속해 있는 나라로써, [[콜롬비아]]와 관련된 역사는 모두 여기에 정리한다. <br />
[[분류:아메리카사]]</div>Jklhttp://hdic.kr/index.php?title=%EB%B6%84%EB%A5%98:%EC%95%84%ED%94%84%EA%B0%80%EB%8B%88%EC%8A%A4%ED%83%84&diff=1674분류:아프가니스탄2021-08-29T02:24:31Z<p>Jkl: 판 1개를 가져왔습니다</p>
<hr />
<div>[[분류:서양사]]</div>Jklhttp://hdic.kr/index.php?title=%EC%97%90%EC%8A%A4%ED%8C%8C%EB%83%90&diff=1676에스파냐2021-08-29T02:24:31Z<p>Jkl: 판 1개를 가져왔습니다</p>
<hr />
<div>유럽 서남부에 있는 국가<br />
<br />
===역사===<br />
<br />
[[분류:서양사]]<br />
[[분류:에스파냐]]</div>Jklhttp://hdic.kr/index.php?title=%EB%B6%84%EB%A5%98:%EC%97%90%EC%8A%A4%ED%8C%8C%EB%83%90&diff=1678분류:에스파냐2021-08-29T02:24:31Z<p>Jkl: 판 1개를 가져왔습니다</p>
<hr />
<div>[[분류:서양사]]</div>Jklhttp://hdic.kr/index.php?title=%EB%B6%84%EB%A5%98:%EC%98%81%EA%B5%AD&diff=1680분류:영국2021-08-29T02:24:31Z<p>Jkl: 판 1개를 가져왔습니다</p>
<hr />
<div>[[분류:서양사]]</div>Jklhttp://hdic.kr/index.php?title=%EB%B6%84%EB%A5%98:%EC%9A%B0%ED%81%AC%EB%9D%BC%EC%9D%B4%EB%82%98&diff=1682분류:우크라이나2021-08-29T02:24:31Z<p>Jkl: 판 1개를 가져왔습니다</p>
<hr />
<div>서양사 분류. [[우크라이나]]의 역사([[소비에트 연방공화국]] 시절 포함)<br />
[[분류:서양사]]</div>Jklhttp://hdic.kr/index.php?title=%EB%B6%84%EB%A5%98:%EC%9D%B4%EB%9D%BC%ED%81%AC&diff=1684분류:이라크2021-08-29T02:24:31Z<p>Jkl: 판 1개를 가져왔습니다</p>
<hr />
<div>[[이라크]] 관련문서.<br />
[[분류:서양사]]</div>Jklhttp://hdic.kr/index.php?title=%EC%9D%B4%EC%A7%91%ED%8A%B8&diff=1686이집트2021-08-29T02:24:31Z<p>Jkl: 판 1개를 가져왔습니다</p>
<hr />
<div>*[[아프리카]] 대륙 북동지역에 위치한 유서깊은 나라. <br />
==개요==<br />
*체제: [[대통령]] 중심제형 공화국<br />
*수도: [[카이로]]<br />
*언어: [[아랍어]]<br />
*면적: [[한반도]]의 5배 가량<br />
*인구: 약 7900만명([[2007년]])<br />
*GDP: 약 3200억 달러([[2006년]]. 세계 32위 내외)<br />
*1인당 소득: 약 4320달러([[2006년]]. 세계 112위 내외)<br />
*통화: 영국의 [[파운드화]]([[영국]]에 종속된 경제구조)<br />
*지리: 중앙은 나일강과 인근 평야지대, 좌우로는 사막지대.<br />
<br />
==역사==<br />
이집트의 역사를 정리하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고대 [[이집트 문명]]은 따로 정리한다. (→[[이집트 문명]])<br />
===고대===<br />
이집트는 약 31개의 왕조로 고대의 역사가 시작된다. 이집트 문명이 건립된 것은 [[기원전 4500년]]~4000년경으로 추정된다. 인류 역사상 가장 빠른 시기에 문명을 이룩하고, 국가를 건설하였다. 중간에 [[앗시리아]]의 침입과 [[신바빌로니아]]의 침입, [[페르시아 제국]]의 침입이 있었다. [[기원전 332년]]에는 알렉산드로스 3세([[알렉산더 대왕]])의 침략으로 [[마케도니아]]의 영역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마케도니아]]가 분열되면서 이집트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지배하는 독립국이 되었다. <br />
===중세===<br />
[[기원전 30년]]에 [[아우구스투스]]가 이집트를 점령했으며, 이후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간다. 그러다 [[642년]]에는 [[이슬람]] 세력이 [[동로마 제국]]을 물리치고 이집트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후 이집트는 사실상 이슬람 국가가 되었다. 서기 [[969년]]에는 [[파티마 왕조]]의 중심국이 되었으며, [[1250년]]에 [[맘루크]]들이 이집트를 지배하게 되었다. [[1517년]]에 이집트는 [[오스만 투르크]]에 점령되어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br />
===근대===<br />
[[1798년]]에 [[프랑스]]의 [[나폴레옹 1세]]가 이집트를 공격하고 함락하면서 이집트에서 [[오스만 투르크]]의 힘은 급격히 약해진다. 프랑스군이 떠난 뒤, [[무하마드 알리]]가 사실상 이집트를 지배하고, [[오스만 투르크]]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하마드 알리]]와 그 후손들은 이집트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고, [[수에즈 운하]]의 건설로 막대한 빚만 지게 되었다. 이는 [[영국]]에게 침략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1876년]]에 [[영국]]은 [[아라비 파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이집트를 보호령으로 하였으며, 사실상 이집트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br />
<br />
[[영국]]은 이집트를 완전한 식민지로 만드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1922년]]에 이집트 왕국으로 (명목상)독립을 허용했다. 그러나 [[수에즈 운하]] 경영권과 군사권은 여전히 [[영국]]에게 있었다. 이후 이들 권한들은 순차적으로 이집트에게 돌아갔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에 가담하였으며, [[1953년]]에 [[가말 아브델 나세르]]가 쿠데타로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당시 나세르는 [[사회주의]] 정책들을 시행하였다. 나세르의 후계자인 [[안와르 엘 사다트]]는 [[1973년]]부터 이집트를 다스렸으며, [[1981년]]에 암살당했다. 그의 뒤를 이어 [[호스니 무바라크]]가 [[1981년]]부터 현재까지 대통령직에 머물러 있다. <br />
====[[이스라엘]]과의 충돌====<br />
이집트는 [[1948년]]부터 이스라엘과 내내 충돌하였다. 이집트와 아랍세력은 [[1948년]]에 [[이스라엘]] 건국을 막고, [[팔레스타인]]의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해서 전쟁을 벌였다. 초기에는 아랍 연합군이 승리하는 것 같다가 곧 이스라엘에 패배하였다. [[1956년]]에는 [[수에즈 운하]]를 점령한 이집트에 대해서 [[이스라엘]]이 공격하여 [[시나이 반도]]와 [[수에즈 운하]] 동쪽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후 국제사회의 노력으로 이스라엘군은 철수하였다. 그리고 [[1967년]]과 [[1973년]]에도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전면전을 벌였으나 모두 이집트가 패배하였다. <br />
<br />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충돌은 [[1979년]] 3월 [[캠프데이비드 협정]]으로 불안정한 상태로 종식되었다. 이 협정과 추가 협의로 인해서 이집트는 이스라엘의 생존권을 인정하고, 이스라엘은 점령한 [[시나이 반도]]를 [[1982년]]에 되돌려 주었다. <br />
[[분류:서양사]]<br />
[[분류:이집트]]</div>Jklhttp://hdic.kr/index.php?title=%EB%B6%84%EB%A5%98:%ED%8C%8C%ED%82%A4%EC%8A%A4%ED%83%84&diff=1688분류:파키스탄2021-08-29T02:24:31Z<p>Jkl: 판 1개를 가져왔습니다</p>
<hr />
<div>[[파키스탄]]과 관련된 모든 자료와 문서. <br />
[[분류:서양사]]</div>Jklhttp://hdic.kr/index.php?title=%EC%95%8C%EB%A0%89%EC%82%B0%EB%93%9C%EB%A5%B4_%EC%86%94%EC%A0%9C%EB%8B%88%EC%B9%9C&diff=1690알렉산드르 솔제니친2021-08-29T02:24:31Z<p>Jkl: 판 1개를 가져왔습니다</p>
<hr />
<div>*[[러시아]]의 작가, 사상가. 생몰연대([[1918년]] 12월~[[2008년]] 8월 4일)<br />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대학을 마치고, 포병장교로 활동하다 [[동프러시아 전쟁]]의 잔학상을 알리는 것이 밝혀져 유형생활을 하게 된다. 이후 그가 엘리트라는 것이 밝혀져 특수 수용소로 옮겨졌다. [[1953년]], 형기 만료 후 중학교 수학교사로 부임하였다. 이후 [[니키타 흐루시쵸프|흐루시쵸프]] 연간에 완전사면이 되어 그는 작품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1962년]] 단편작인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집필한다. 참혹한 [[소련]] 수용소의 모습과 [[소련]]사회를 풍자한 이 소설은 그를 반체제 인사로 낙인찍히게 하였다. <br />
<br />
[[1970년]] 그는 [[노벨문학상]]을 수여받았으나, 시상하지 못하였다. [[소련]] 당국으로부터 추방당한 이후 [[1974년]]에 [[노벨문학상]] 시상식을 열 수 있었다. [[1994년]] 귀환하여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으나,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철저히 사회풍자와 비판으로만 응수했다. [[2007년]] [[러시아]] 국가문화공로상을 수여받았으며, [[2008년]] 8월에 사망했다. 대표작은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암병동, 마뜨료나의 집, 1914년 8월, 수용소 군도, 이 잔혹한 시대의 내 마지막 대화가 있다. <br />
<br />
*성향: 그는 [[민족주의]]적 성향으로서 부패 척결을 외쳤고 전통적 애국주의로의 회귀를 주장했다.<br />
<br />
[[분류:소련]]<br />
[[분류:러시아]]</div>Jklhttp://hdic.kr/index.php?title=%EB%A7%88%EC%88%98%EB%93%9C&diff=1692마수드2021-08-29T02:24:31Z<p>Jkl: 판 1개를 가져왔습니다</p>
<hr />
<div>* [[아프가니스탄]] 해방 운동세력. 본명 아흐마드 샤 마수드 (Ahmed Shah Massoud). 별명 판지셰르의 사자<br />
<br />
<br />
[[그림:마수드.jpg|frame]]<br />
===어린 시절===<br />
<br />
===소련의 침공===<br />
마수드는 [[소련]]과의 10년 전쟁([[1979년]]-[[1988년]])을 승리로 이끈 [[아프간]]의 전설적인 야전 사령관이었다. 천부적인 전략가, 탁월한 군사 전문가였던 마수드. 사람들은 그가 밥 딜런을 닮았다고도 말했고 체 게바라를 닮았다고도 했다. 그를 따르는 수식어는 수없이 많다. 그러나 아프간 사람들에게 신앙이자 전설인 마수드에게 가장 어울리는 이름은 <판지셰르의 사자>일 것이다. <br />
<br />
판지셰르 계곡은 마수드 군대의 본거지였다. 또한 판지셰르 계곡은 [[러시아]] 붉은 군대의 무덤이기도 했다. 최신 전투기와 장갑차 그리고 붉은 군대의 막강한 전력으로도 판지셰르 계곡에서 칼리슈니코프 소총 한자루를 들고 싸운 이 초라한 아프간 게릴라들을 이기지 못했다. [[소련]]군은 판지셰르 계곡에서 전멸 당했고, 아프간에서 철군했다. 그 후 사람들은 마수드를 판지세르의 사자라고 불렀다.<br />
<br />
===되찾은 아프가니스탄. 그러나===<br />
그러나 그는 [[아프간]] 내부의 또다른 적인 [[탈레반]]([[미국]]과 [[파키스탄]]이 지원하는)과 다시 전쟁을 시작해야 했다. 마수드는 테러리즘을 싫어했다. 그는 평생 [[아프간]]의 사막과 거친 계곡을 떠돌며 게릴라전을 펼쳤지만, 한번도 테러리즘을 인정하지 않았다. 게릴라전은 가난한 자들의 전쟁이지만 테러는 전쟁이 아니라 무고한 생명을 담보로 하는 협박이었다. 마수드는 [[소련]]이나 [[미국]] 같은 강대국과 불리한 전쟁을 치루면서도 한번도 테러를 저지르지 않았다. 자신의 정의를 위해 무고한 생명을 담보로 하지 않았다. 이것이 마수드가 [[탈레반]]에 맞선 이유다.<br />
<br />
마수드는 수도 [[카불]]에 입성해서 정권을 장악했지만 [[탈레반]]이 [[카불]]을 폭격한다고 협박하자 [[탈레반]]에게 무혈로 [[카불]]을 넘겨주고 다시 판지셰르로 돌아간다. [[카불]]의 무고한 시민들이 피해를 입을 것을 우려했던 까닭이다. 그러나 [[카불]]은 결국 [[탈레반]]에 의해 폐허가 되었다. [[1993년]], [[프랑스]]의 기자 퐁피이는 폐허가 된 [[카불]]의 거리에서 울고 있는 마수드를 보았다. 기자는 “그가 우는 것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어요”라고 말했다.<br />
<br />
===죽음===<br />
[[2001년]] 9월 9일 한 무리의 테러단에 의하여 암살. 그 테러단은 [[탈레반]]이라고도 하고, [[알카에다]]라고도 하고 [[미국]]이 뒤에 있다고도 한다. <br />
<br />
[[분류:아프가니스탄]]</div>Jklhttp://hdic.kr/index.php?title=9.11_%EC%82%AC%EA%B1%B4&diff=17109.11 사건2021-08-29T02:24:31Z<p>Jkl: 판 1개를 가져왔습니다</p>
<hr />
<div>*[[2001년]] 9월 11일. [[미국 국방성]]과 [[WTC]] 1·2번 건물, [[백악관]]을 겨냥하여 일어난 항공기 테러. 그러나 공식 발표에 대해서 많은 의혹이 일어나고 있다. <br />
===공식 발표([[미국]]정부, [[9.11 위원회]] 조사)===<br />
반미 테러 집단인 [[오사마 빈 라덴]]과 [[알 카에다]]는 [[미국]]을 충격에 빠뜨리고, 자신들의 세력을 과시하기 위해서 치밀한 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19명의 테러범을 조직하여, [[2001년]] 9월 11일 항공기 4대를 납치하여 1대는 [[미국 국방성]]에 충돌하였고, 다른 2대는 [[WTC]] 1·2번 건물에 충돌하였다. 마지막 1대는 [[백악관]]을 노렸으나, 몇몇 승객이 테러범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비행기는 [[섕크스빌]]에 추락하였다. <br />
<br />
4대의 비행기는 모두 충돌 시 일어난 고열로 증발하였으며, [[WTC]] 쌍둥이 건물은 강력한 화재로 인한 [[팬케이크 현상]]에 의해 붕괴하였다. 그리고 [[WTC]] 7번 건물은 화재가 옮겨 붙어 역시 붕괴하였다.<br />
===사건 이후 [[미국]]의 조치와 반응===<br />
미국 정부는 사건 직후 [[알 카에다]]와 [[오사마 빈 라덴]]이 저지른 일이라 규정하고, [[아프가니스탄]]에게 오사바 빈 라덴 체포를 위한 군사 협조를 요청했다. 이는 사실상 침략이므로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부는 이를 거절하였다. 이에 [[미국]]은 [[미국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일으켰다. 또한 [[알 카에다]]와 연계되어 대량 살상 무기를 개발한 [[이라크]]를 공격하여 [[사담 후세인]] 정부를 무너뜨렸다.<br />
<br />
대내적으로는 [[반 테러법]]을 통과시켜 미국 국민의 자유로운 권리가 상당 부분 제한당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테러에 대한 강경한 노선을 천명하였고, 미국인들은 이 노선에 지지하여 한때 [[조지 W. 부시]]의 지지율이 90%에 달하기도 했다. 사상 초유의 미국 본토 공격에 미국인들은 테러에 대한 공포에 시달렸으며, 이를 이용하여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여러 조치들을 손쉽게 해갈 수 있었다.<br />
<br />
===불거지는 의혹들===<br />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의혹들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br />
====[[부시]] 일가와 [[빈 라덴]] 일가====<br />
맨 먼저 포문은 연 사람은 `[[화씨 911]]`의 [[마이클 무어]] 감독이었다. 그는 [[부시]] 일가와 [[빈 라덴]] 일가가 얼마나 친한 사이인지 규명했다. 9.11 사건 직후 모든 비행기의 이착륙이 금지되었지만 몇몇 비행기의 이륙은 허용되었는데, 바로 [[빈 라덴]] 일가를 태운 비행기였다. 사건 조사관들은 [[빈 라덴]] 일가와 면접도 보지 못했다. 또한 [[조지 W. 부시]]의 매우 친한 친구인 [[제임스 배쓰]]는 [[빈 라덴]] 일가의 투자를 돕고, 이 과정에서 [[조지 W. 부시]]의 사업을 도운 이력도 밝혀 내었다. 9.11 사건 이후 [[빈 라덴]] 일가가 소속된 [[칼라일 그룹]]은 군수 물자 지원으로 큰 이익을 보았다. 또한 [[조지 W. 부시]]의 아버지 [[조지 H.W. 부시]]는 테러가 일어나는 날 오전에 [[빈 라덴]] 일가와 [[칼라일 그룹]] 관계자들과 함께 아침 회의를 열었다. 9월 11일은 [[칼라일 그룹]]의 정기 회의 날짜였다. <br />
====사전 정보가 없었다?====<br />
도널드 럼스펠드는 사전 경고가 있었다고 증언했다. 또한 조지 W. 부시가 7월에 휴가를 보내고 있을 때에도 테러 위협에 대한 보고서가 부시에게 전달되었으나, 조지 W. 부시는 제대로 검토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것을 제외하고서라도 미국 정부는 2001년 9월 11일 이전에 수 차례 비행기 납치 테러 훈련을 해왔다. 1999년 북미방공사령부는 납치된 여객기들이 WTC와 펜타곤을 들이받는 상황에 대한 가상훈련을 실시하였다. 2000년 10월 24일 국방부는 암호명 MASCAL이라는 2차분 훈련의 첫 훈련을 실시하는데 여기서 보잉 757기가 건물에 충돌하는 가상 상황이 연출된다. 국방부에서 근무하던 전직 해군 F-4기 조종사 찰스 벌링게임은 이 훈련에 참가한 뒤 전역하고서 아메리칸 항공사에 입사한다. 그리고 그가 몰던 보잉 757 비행기가 국방성에 들이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br />
<br />
2001년 7월 24일. WTC 7번 건물을 이미 소유중이었던 래리 실버스테인은 9/11테러 6주 전에 WTC단지 전체를 32억 달러에 99년간 임대하는 계약에 서명한다. 임대계약에는 테러 공격을 특정해 보장해주는 35억 달러짜리 보험이 포함되어 있었다. 2001년 9월 6일 유나이티드 항공사에 주식에 대해 일 평균의 4배인 3,150건의 풋옵션 거래가 이루어진다. 2001년 9월 7일 보잉사 주식에 대한 27,294건의 풋옵션 거래가 이루어진다. 이는 일간 평균의 5배가 넘는 수치이다. 2001년 9월 10일 아메리카 항공사에 대해서 아메리칸 항공사 주식에 대해 일간 평균치의 11배에 달하는 4,516건의 풋옵션 거래가 이루어진다.<br />
<br />
====미국 국방성을 공격한 것은 정말 비행기인가?====<br />
<br />
====쌍둥이 빌딩의 붕괴가 정말 팬케이크 현상 때문인가?====<br />
<br />
====섕크스빌 추락의 진실은 무엇인가?====<br />
<br />
====테러범 19명 가운데 살아있는 자가 있다?====<br />
<br />
====오사마 빈 라덴이 지휘했다?====<br />
<br />
<br />
<br />
[[분류:미국]]</div>Jklhttp://hdic.kr/index.php?title=%EB%B6%84%EB%A5%98:%EB%8B%B9%EB%82%98%EB%9D%BC&diff=1610분류:당나라2021-08-29T02:24:19Z<p>Jkl: 판 1개를 가져왔습니다</p>
<hr />
<div>[[분류:동양사]]</div>Jklhttp://hdic.kr/index.php?title=%EB%8F%99%EB%8B%A8%EA%B5%AD&diff=1612동단국2021-08-29T02:24:19Z<p>Jkl: 판 1개를 가져왔습니다</p>
<hr />
<div>*[[거란]](요나라)의 위성국가. [[발해]] 유민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발해 멸망 직후에 건국하였다. [[926년]] 건국하여 [[982년]]에 해체된 것으로 여겨진다. <br />
거란은 발해의 수도 [[상경용천부]]를 급습하여 멸망시켰지만, 발해의 넓은 영토를 완전히 점령하거나 다스리기는 어려웠다. 그리하여 발해의 나라이름을 동단국으로 바꾸고 거란의 황제 [[야율아보기]]의 동생을 동단국의 황제로 내세웠다. <br />
<br />
동단국의 정치체제는 발해의 제도를 그대로 이어받았으며, 구 발해인들을 그대로 등용하고 거란인들을 조정에 다수 등용하여 형식적으로는 발해와 큰 온도차가 없도록 하였다. 그러나 동단국의 전권은 사실상 거란의 황제에게 있었다. [[928년]]경 동단국은 발해 유민들의 거센 부흥운동에 밀려 수도를 [[요동]]지역 [[요양성]]으로 옮겼다. 이후 동단국은 허수아비 국가로 지내다 흐지부지 해체된 것으로 여겨진다. <br />
<br />
===[[발해]] 멸망과 계승 관련===<br />
*[[동단국]](거란이 세운 위성국가. 발해 유민들의 반발을 막기 위한 나라)<br />
*[[후발해국]](발해 멸망 직후 세워졌던 유민들이 세운 나라)<br />
*[[정안국]](가장 오랫동안 발해 부흥운동을 이끈 나라)<br />
*[[오사성 발해국]](최근 재야 학계와 북한에서 주장하는 나라)<br />
*[[흥요국]](발해 계승의 성격이 강한 나라)<br />
*[[대발해국]](발해 계승을 위한 마지막 나라)<br />
*[[백두산 화산 폭발설]]: 발해 멸망, 혹은 발해 부흥 세력에게 치명타를 입힌 사건이다. 아직 정설로 확정되지는 않았다. <br />
[[분류:발해]]<br />
[[분류:거란]]<br />
[[분류:동양사]]</div>Jklhttp://hdic.kr/index.php?title=%EB%A7%8C%EA%B5%AD%EA%B3%B5%EB%B2%95&diff=1614만국공법2021-08-29T02:24:19Z<p>Jkl: 판 1개를 가져왔습니다</p>
<hr />
<div>흔히 국제법의 옛 이름이다. <br />
<br />
만국공법은 중국의 어느 신부가 '국제법'을 만국공법으로 해석하면서 동아시아에 널리 퍼진 말이다. 그 신부는 만국공법을 이야기하면서 상당히 '윤리적'인 면을 부각시켰다. 이는 자연법 사상에 기초한 것이다. 초기 국제법은 분명 자연법 사상에 근거하여 윤리적인 측면이 있었다.<br />
<br />
그러나 실질적으로 19세기 후반 만국공법은 '현실적 관점의 국제법'이어서 힘의 강한 나라는 약한 나라와의 합의에 의해서 합병도 가능한 형태였다. 그리하여 당시 [[조선]]이 인식하고 있던 '자연법적 만국공법'과 당시 세계질서에서 통용되던 '현실적 국제법'과는 괴리가 있는 것이었다.<br />
<br />
[[분류:동양사]]</div>Jklhttp://hdic.kr/index.php?title=%EB%B6%84%EB%A5%98:%EB%AA%85%EB%82%98%EB%9D%BC&diff=1616분류:명나라2021-08-29T02:24:19Z<p>Jkl: 판 1개를 가져왔습니다</p>
<hr />
<div>[[분류:동양사]]</div>Jklhttp://hdic.kr/index.php?title=%EB%B2%84%EB%A7%88&diff=1618버마2021-08-29T02:24:19Z<p>Jkl: 판 1개를 가져왔습니다</p>
<hr />
<div>*인도차이나반도에 위치한 나라. 군부정권은 "미얀마"로, 민주화세력은 "버마"로 부른다. <br />
==개요==<br />
[[그림:버마-지도.gif|버마 지도|frame]]<br />
*정치체제: 군부독재, 연방제, 국가[[사회주의]]형 독재국가<br />
*인구: 5050만명<br />
*면적: 676,578 km<br />
*기후: 온난다습한 아열대성 기후<br />
*민족구성: 68%의 버마족, 샨족(9%), [[카렌족]](7%), 친족, 카친족, 몬족의 소수민족과 [[중국]]계, [[인도]]계 주민들로 이루어져 있다. <br />
*국가총생산: $937.7억 (59위) [[2006년]] 기준<br />
*1인당 국민소득: $1,691 (150위) [[2006년]] 기준<br />
<br />
==역사==<br />
<br />
===식민지 이전===<br />
<br />
===영국 식민지 시대와 독립===<br />
<br />
===기나긴 군부통치===<br />
버마는 1962년부터 줄곧 군사정권이 통치해 왔다. 천연가스, 목재 등 풍부한 천연자원을 보유했지만, 지나친 고립·폐쇄 정책으로 경제난을 겪어왔다.<br />
<br />
현 정권은 88년 민주화 시위를 유혈진압하며 성립된 정권이다. 당시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빈곤으로 누적된 불만은 ‘8888 항쟁’(1988년 8월8일 양곤에서 군부가 시위대에 발포한 사건), ‘랑군의 봄’ 등의 수식어를 동반하는 광범위한 민주화 시위로 이어졌다. 그러나 혼란 속에서 결과적으로 권력을 장악한 것은 다시 한번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였다. 군부의 국가법질서회복위원회(SLORC)는 무력으로 정권을 접수하고, 89년엔 계엄령을 선포했다.<br />
<br />
[[1990년]]엔 [[아웅산 수치]]가 이끄는 민족민주동맹(NLD)이 의회의 489석 가운데 392석을 차지하는 압도적인 승리를 얻었지만, 군부가 선거를 무효화하고 당선자 상당수를 투옥했다. 군부는 의회가 구성돼 새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는 군부가 계속 집권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그러나 새 헌법 논의는 아직 시작도 못 했다. [[1989년]] 계엄 당시 가택 연금된 [[아웅산 수치]] 여사는 지난 17년 가운데 11년 동안 집 밖으로 나서지 못했다.<br />
<br />
현 군부 정권은 안팎의 비난 여론에 처해 있다. 군정을 이끌고 있는 1인자 [[탄 슈웨]](73) 장군은 [[아웅산 수치]] 여사 및 그의 추종세력에 대한 강경 일변도의 탄압으로 악명이 높다. [[2006년]]엔 딸의 호화 결혼식으로 낭비벽이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2인자인 마웅 아예는 90년대 초 군정에 참여하기 전까지 ‘골든 트라이앵글’의 마약거래자들과 돈독한 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뒤를 잇는 소에 윈 장군 역시 국내 민주화 세력에 대한 강경 진압으로 유명한 인사다.<br />
<br />
미얀마 군부는 [[1962년]] 쿠데타를 일으키며 집권을 시작했다. 쿠데타로 집권한 우 네윈 전 대통령이 추구한 것은 ‘미얀마식 [[사회주의]]’였다. 군부 지도층은 혁명위원회를 조직하고, 주요 기업들을 모두 국유화시켰다. 사회주의 일당 독재체제 아래서 정당 활동도 통제됐다. 네윈 정권은 미얀마를 외부세계로부터 차단하고 고립화·공업화 정책을 실시했지만 실패했다. 60년대만 해도 필리핀과 더불어 아시아의 ‘경제강국’이었던 미얀마의 경제상황은 [[1987년]]에 이르러 ‘최빈국’ 수준까지 떨어졌다.<br />
<br />
미얀마는 [[1997년]] 동남아시아국가연합([[아세안]])에 가입해 일견 고립정책을 탈출하는 것으로 보였다. 아세안으로서도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는 묘안이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아세안에 미얀마 군정은 골칫거리다. 비민주적 인권 탄압이 서방과의 교역에서 발목을 잡았다. 최근 아세안-유럽연합의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에서도 미얀마 군정의 ‘비인권적 상황’이 도마에 올랐다. 유럽연합 쪽에서 수치 여사의 불법 연금 상태를 문제 삼았던 것이다.<br />
<br />
[[분류:동양사]]<br />
[[분류:버마]]</div>Jklhttp://hdic.kr/index.php?title=%EB%B6%84%EB%A5%98:%EB%B2%84%EB%A7%88&diff=1620분류:버마2021-08-29T02:24:19Z<p>Jkl: 판 1개를 가져왔습니다</p>
<hr />
<div>[[분류:동양사]]</div>Jklhttp://hdic.kr/index.php?title=%EC%82%AC%EB%A5%99%EB%B3%80%EB%A0%A4%EC%B2%B4&diff=1622사륙변려체2021-08-29T02:24:19Z<p>Jkl: 판 1개를 가져왔습니다</p>
<hr />
<div>*한문 문장체의 일종. <br />
<br />
문장이 4자와 6자를 기본으로 한 대구(對句)로 이루어져 수사적으로 미감(美感)을 주는 문체로, 변(騈)은 한 쌍의 말이 마차를 끈다는 뜻이고, 여(儷)는 부부라는 뜻이다. <br />
<br />
한나라 후기에 시작되어 [[위나라]]·[[진나라]]·[[남북조]]시대를 거쳐 [[당나라]] 중기까지 유행한 문체로, 변려문이라는 명칭은 [[당송 8대가]]의 한 사람인 [[유종원]]의 <걸교문> 중 “변사려륙금심수구(騈四儷六錦心繡口)”라는 구절에서 유래한다. [[당나라]] 이후 쇠퇴하였으나 [[청나라]] 때 다시 유행한다. 우리나라도 외교문서에서 수사법으로 자주 활용하였다. <br />
<br />
변려문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대구를 존중했다. 이것은 한문에 흔히 있는 일이다. 그렇지만 변려문에는 특별히 대구의 사용이 두드러졌다.<br />
<br />
둘째는 넉 자 또는 여섯 자의 구(句)를 많이 쓴다. 한문에는 원래 넉 자·여섯 자로 된 구가 많다. 그렇지만, 변려문에는 의식적으로 이것을 구사한 것이 특징이다. 셋째는 평측(平仄)과 압운(押韻)을 존중한다.<br />
<br />
넷째는 음조의 아름다움을 살린다. 다섯째는 전고(典故: 전례와 고사) 사용을 존중한다. 이렇게 해서 화려한 미문(아름다운 문장)의식을 높이는 것이 변려문의 총체적인 특징이라 할 수 있다.<br />
<br />
*변려체를 잘 사용한 인물들: [[한나라]] [[반고]], [[위나라]] 황제 [[조비]], [[진나라]](陳) [[서릉]]·[[유신]], [[신라]] [[최치원]] 등<br />
<br />
[[분류:동양사]]</div>Jklhttp://hdic.kr/index.php?title=%EB%B6%84%EB%A5%98:%EC%9C%84%EC%A7%84%EB%82%A8%EB%B6%81%EC%A1%B0&diff=1624분류:위진남북조2021-08-29T02:24:19Z<p>Jkl: 판 1개를 가져왔습니다</p>
<hr />
<div>이민족은 5호 16국으로 따로 분류한다. [[위나라]], [[촉나라]], [[오나라]]의 삼국시대와 [[서진]], [[동진]], 남조의 여러 나라들을 포함한다.<br />
<br />
[[분류:동양사]]</div>Jklhttp://hdic.kr/index.php?title=%EB%B6%84%EB%A5%98:%EC%9D%BC%EB%B3%B8&diff=1626분류:일본2021-08-29T02:24:19Z<p>Jkl: 판 1개를 가져왔습니다</p>
<hr />
<div>[[분류:동양사]]</div>Jklhttp://hdic.kr/index.php?title=%EC%9D%BC%EB%B3%B8%EC%A0%9C%EA%B5%AD%EC%A3%BC%EC%9D%98&diff=1628일본제국주의2021-08-29T02:24:19Z<p>Jkl: 판 1개를 가져왔습니다</p>
<hr />
<div>*19세기 후반부터 일본이 근대화의 물적 자원확보를 위한 침략행위를 일본제국주의라고 한다. <br />
==일본의 근대화 정책==<br />
<br />
==침략사==<br />
<br />
===유구국 침략===<br />
<br />
===대만 침략===<br />
<br />
===한반도 침략===<br />
<br />
===만주 침략===<br />
<br />
===중국 본토 침략===<br />
<br />
===동남아 및 태평양 지역 침략===<br />
<br />
===일본의 패전===<br />
[[분류:일본]]<br />
[[분류:동양사]]</div>Jklhttp://hdic.kr/index.php?title=%EC%A0%84%EC%97%B0&diff=1630전연2021-08-29T02:24:19Z<p>Jkl: 판 1개를 가져왔습니다</p>
<hr />
<div>*전연(前燕). [[중국]] [[5호 16국]] 중의 하나. 주로 중국 북부지역과 동북지역에서 활동하였다. [[337년]]에 건국하여 [[370년]] 멸망하였다.<br />
<br />
이미 3세기말 [[선비족]] 추장 [[모용외]]는 자립하여 일정한 세력을 갖춰 '대선우'라 칭하였다. [[337년]]에는 [[모용외]]의 아들 [[모용황]]이 '연왕(燕王)'이라고 칭하고 [[하북성]]에서 나라를 건국하였다. [[342년]]에는 [[고구려]]를 공격하여 [[국내성]]을 함락시키기도 하였다. <br />
<br />
전연은 [[345년]] [[동진]]의 연호를 쓰지 않으면서 독립국임을 확실히 하였고, '업'에 도읍을 하였다. 이후 [[산동성]]과 [[산서성]], [[하북성]], [[하남성]], [[요서]] 지역까지 그 영향력이 미쳤으나, [[370년]] [[전진]](前秦)의 [[부견]]에게 멸망당했다. <br />
<br />
[[분류:5호 16국]]<br />
[[분류:동양사]]</div>Jklhttp://hdic.kr/index.php?title=%EC%A4%91%EA%B5%AD&diff=1632중국2021-08-29T02:24:19Z<p>Jkl: 판 1개를 가져왔습니다</p>
<hr />
<div>동북아시아 대륙의 다수를 차지하고 13억의 인구를 거느린 나라. 공식국호는 중화인민공화국. China, 지나 등으로 불린다. [[대만]]과 관련된 항목을 보시려면 [[대만|여기]]를 클릭하십시오. <br />
<br />
==국가개요==<br />
중화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 of China) <br />
아래 통계치는 CIA world-factbook에서 근거하였습니다.[https://www.cia.gov/library/publications/the-world-factbook/geos/ch.html]<br />
*인구: 1,321,851,888명(2007년 7월 추정치)<br />
*면적: 957만 2900㎢(세계3위)<br />
*수도: 베이징(북경)<br />
*통화: 위안(Y)<br />
*GDP: 10조 1700억 달러(2006년 말, 세계2위)<br />
*1인당 국민소득: 7,700달러(2006년, 109위)<br />
*노동인구: 7억 9800만(2006년)<br />
<br />
===영토===<br />
북동쪽으로 [[북한]]·[[러시아 연방]], 서쪽으로는 [[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타지키스탄]], 남서쪽으로는 [[인도]]·[[파키스탄]]·[[네팔]]·[[부탄]], 남쪽으로는 [[미얀마]]·[[베트남]]·[[라오스]], 북쪽으로는 [[몽골]]·[[러시아 연방과]] 각각 국경을 이룬다. 행정구역은 22개성(省), 5개 자치구(自治區), 4개 직할시(直轄市), 2개 특별행정구로 되어 있다.<br />
<br />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바로가기===<br />
*[[중국의 정치]]<br />
*[[중국의 경제]]<br />
*[[중국의 사회]]<br />
*[[중국의 문화]]<br />
<br />
==역사==<br />
{{틀:중국사}}<br />
===[[하나라]], [[상나라]](은나라) 시대===<br />
[[요임금]]과 [[순임금]]의 뒤를 이어 [[우임금]]이 치수에 성공하여 선양받은 [[하나라]]는 [[섬서성]]·[[감숙성]] 일대의 [[앙소문화]]에서시작하여 강력한 통치세력을 갖춘 부족 공동체로 발전한 중국 최초의 나라이다.<br />
<br />
[[신석기 시대]] 말기와 [[청동기 시대]]에 해당하며 [[우임금]]이 사망한 후 그의 아들이 왕위를 이어 부자 상속을 기반으로 한 세습 왕조 체제를 열었다.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하나라]]의 실체가 서서히 밝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동기를 사용하였으나 여전히 석기가 보편적인 도구였으며 비교적 간단한 정치 체제를 유지하였고 역법을 최초로 사용하여 1년을 12개월로 나누었다. [[하나라]]는 [[기원전 1988년]] 경에 시작하여 [[기원전 1579년]] 경까지 존속하였다.<br />
<br />
중국은 [[상나라]] 시대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역사가 발전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는 [[청동기 시대|청동기 문화]]가 고도로 발달하고, 갑골문자를 활용하였으며, 사회적으로는 씨족공동체와 신분제가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br />
<br />
그러나 대규모 수리시설의 부족으로 농경지는 제한되어 있었으며, 주변에는 수렵민족이 농경민들을 노리고 있었다. 그들은 [[은족]]을 중심으로 연합하게 되고, 그 연합체가 [[상나라]]의 모태가 되었으리라 추정된다. 그러나 그 지위는 불안정하여 5번이나 수도를 옮긴 끝에 현재 [[은허]]([[하남성]] 안양현 인근)에 정착하게 되었다. <br />
<br />
[[상나라]]는 갑골을 불에 태워 신의 뜻을 묻는 신정정치를 통해서([[갑골문자]] 형성) 나라를 운영하였으며, 10개의 태양이 매일 하나씩 나타난다고 믿었다.(10간의 탄생.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 신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피정복민을 수 백, 수 천 명씩 제물로 바쳤으며, 농경지의 확대와 제물의 확보를 위하여 끊임없이 정복전쟁을 펼쳤다. [[상나라]]에서는 제사를 은족을 비롯한 각 부족이 공동으로 받들어, 그들의 동질성을 강조하여 나라를 유지하려 하였다. 이 시대에는 대규모 [[순장]]도 행해졌다.<br />
<br />
[[상나라]]는 피지배층에 대한 잔혹한 지배와(대게 제사를 위하여) 끊임없는 정복전쟁으로 인한 국력소모, 지배층의 낭비 등으로 인하여 [[주나라]]에게 멸망을 당하였다.<br />
<br />
[[상나라]]의 존속기간은 [[기원전 1600년]]경~[[기원전 1046년]]까지이다.<br />
<br />
*바로가기: [[하나라]], [[상나라]]<br />
<br />
===서주시대===<br />
[[주나라]]를 건국한 시조인 후직 이래 계속적인 발전을 계속하여 [[고공단보]]와 [[계력]] 때 그 세력이 크게 성장하였다. 주족은 목야에서 [[상나라]] [[주왕]]의 대군을 격파하고, [[주나라]]를 건국하였다. 수도는 [[호경]]으로 하였다. 천하를 장악한 [[주나라]]는 넓어진 영토와 많은 백성들을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한 방안을 고심하다 '봉건제'를 고안해 내었다. <br />
<br />
당시의 지배체제로서는 애초에 중앙에서 북중국 전역을 통치할 수 없으며, 그러면 그나마 믿을 수 있는 왕실의 혈통에게 전국토를 제후로 임명하고, 다스리게 하였다. 제후는 [[주나라]] 왕에 의해서 봉해졌으며, 공물과 병력을 바쳐서 충성을 맹세했다. 반면 [[주나라]] 왕실은 제후들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혈연과 제사를 강조하여 공동의 조상을 섬기는 한 집안임을 계속 인지시켰다. <br />
<br />
아울러 [[천명사상]]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유포하여 주왕실의 전통은 '하늘의 명령'이라고 강조하였다. [[주나라]]도 [[상나라]]와 마찬가지로 제사의식으로 지배체제를 확고히 하였으나, [[상나라]]와 같이 대규모 인신제물은 사라졌다. <br />
<br />
[[주나라]]는 [[기원전 770년]] 유목민 [[견융]]의 침입을 받았다. [[주나라]] [[유왕]]은 여산 기슭에서 살해당하고, [[주나라]]는 도읍을 동쪽의 [[낙읍]]([[낙양]] 인근)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 때부터 '[[동주시대]]'라고 부른다. [[호경]]에 비해서 [[낙읍]]은 상대적으로 동쪽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유목민의 침입으로 쫓기듯 수도를 옮긴 [[주나라]] 왕실은 이 사건으로 인해서 명백하게 한계를 드러내었고, 이는 힘있는 제후국들에게 '기회'를 제공하였다.<br />
*바로가기: [[주나라]]<br />
<br />
===[[춘추전국시대]](동주시대)===<br />
[[주나라]] 왕실의 나약함을 본 제후국들은 [[주나라]] 왕실에 대한 경외감이 사라지고, 사실상 [[주나라]] 왕실을 무시한 채 제후국들이 실력대결을 펼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춘추전국시대]]이다. <br />
<br />
춘추시대에서는 그나마 아직까지 [[주나라]] 왕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지켰으며, 이웃 나약한 제후국들에게도 '먼 친척'이기 때문에 국권을 유지해주었으나, 전국시대에 이르면 그마저도 사라지고 약육강식의 실력사회로 성장하게 된다. <br />
<br />
또한 이 시기에는 철기문화가 도입되어 부국강병을 꿈꾸는 여러 나라들에 의해서 적극적으로 보급, 활용되었다. 그로 인해서 [[우경]]의 시작한 것을 비롯하여 농업생산력이 크게 발전하였다. 그리고 강력한 제후국들은 넓어진 영토와 많은 인구, 대규모의 군대를 관리하기 위하여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정비하게 되었고, 이는 후에 중앙집권국가인 '[[진나라]]'의 등장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br />
<br />
춘추시대는 [[기원전 770년]]~[[기원전 453년]](혹은 [[기원전 403년]])이며, 전국시대는 [[기원전 453년]](혹은 [[기원전 403년]])~[[기원전 221년]] [[진나라]]의 천하통일 시점까지이다. 춘추시대를 대표하는 제후국들은 '제, 진(晉), 초, 송, 진(秦), 오, 월'이며 이들 중 5개 나라를 일컬어 '춘추 5패'라고 부른다. 전국시대에는 대다수의 제후국들이 큰 제후국들에게 흡수되고 최종적으로 7개국이 남는데, 이는 '진(秦), 한(韓), 위, 조, 초, 제, 연'이다. <br />
<br />
이 시기에는 다양한 사상들이 나와서 중국문명의 밑거름을 형성하는데, 이를 '[[제자백가]]'라고 한다. <br />
<br />
*바로가기:[[춘추전국시대]]<br />
<br />
===[[진나라]]===<br />
[[진나라]]는 [[중국]] 대륙에서 전반적으로 서북지역에 치우쳐 있는([[섬서성]] 일대) 제후국이었다. 이 지역은 [[주나라]]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진나라]]는 [[기원전 362년]] [[효공]]이 제위에 오르자 실적에 따라 신분을 조정하고, 군사조직과 토지제도를 혁신하여 조세(租稅)를 공평하게 했으며, 병농(兵農)을 일치시켰다. 그리하여 종래의 '읍'이 아닌 '현'이라는 행정단위가 발생하게 되었다. 현은 임금의 힘이 현내의 일반 백성과 직접 미칠 수 있으므로 중앙집권체제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이 당시 이와 같은 개혁안을 내놓은 사람이 [[상앙]](商鞅)이다.<br />
<br />
[[기원전 325년]] [[혜문왕]]은 스스로 '왕'을 선언하였다. [[진나라]]는 주나라를 멸망시키고(기원전 256년) 대대적인 팽창정책을 펼쳤다. 또한 내부적으로는 [[법가]]사상을 모태로 강력한 중앙집권책을 완성해 나갔다. [[기원전 230년]] [[한]](韓)나라를 시작으로 [[기원전 221년]]에는 [[제나라]]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모든 나라를 멸망시키고 최초로 [[중국]]대륙을 통일하였다. <br />
<br />
[[진나라]]는 천하를 통일한 이후 강력한 법치주의를 실천했으며, [[봉건제]]를 폐지하고 전국을 군(당시 36개군)과 현으로 재편하여 황제 직속으로 하였다. 또한 [[법가]]사상과 실용성 있는 학문을 제외하고는 모두 배척하는 [[분서갱유]]를 단행하였다. 영토를 더욱 넓혀서 [[흉노]]를 몰아내고 각국의 장성을 연결하여 '[[만리장성]]'을 구축했다. 남쪽으로는 북 [[베트남]]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현재 [[중국]]대륙의 기본적인 영역을 완성하였다. <br />
<br />
그러나 천하를 통일한 [[시황제]]가 죽고 나서, 가혹한 통치에 반발하는 농민들의 봉기, 옛 봉건제후들의 봉기, 궁정내부의 혼란 등으로 나라가 흔들리다 [[진왕 자영]]이 [[기원전 207년]] [[유방]]에게 항복함으로써 멸망하였다. [[진나라]]의 이름은 [[중국]]을 일컫는 '차이나(china)'의 어원이 되었다. <br />
<br />
*바로가기: [[진나라]]<br />
<br />
===[[한나라]]===<br />
[[기원전 206년]]에 [[유방]]에 의해서 [[장안]]을 도읍으로 하고 건국되었다. [[한나라]]는 당장 [[진나라]]와 같은 획일적인 중앙집권제를 실시하지 않고, [[장안]] 인근의 지역에는 황제의 직속령을 설치하고, 나머지 지역에는 제후들에게 분봉하는 소위 '[[군국제]]'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한나라]] 황제는 [[유방]] 이후 50년 간의 제후들과의 갈등을 극복하면서 끊임없이 중앙집권화를 시도하였고, [[한 무제]]시대에는 통일된 중앙집권국가를 공고히 하였다. [[한나라]] 전기에는 정치적으로는 전국적으로 고도의 집중과 통일을 실현하였으며, 경제적으로는 대규모의 수리공사를 일으켜 농업기술과 수공업 상업이 크게 발전하여 많은 중요한 도시가 출현하였다. 군사적으로는 북방의 [[흉노]]를 물리쳐서 서역으로 통하는 무역로를 개척하였으며, 영토를 확장하고 국제무역을 촉진시켰다. 과학 문화적으로는 많은 발명가와 사상가 문학가 역사학가들이 출현하였다. 이는 중국문명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br />
<br />
그러나 잦은 전쟁과 강력한 황제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재정이 필요하였으며, 이를 위해서 농민들에게 과도한 세금과 전매제를 통한 경제통제가 이루어졌다. 결국 농민들은 지방 [[호족]]들에게 경제력을 의탁하게 되었고, [[호족]]들이 지방권력을 장악함에 따라 중앙권력은 약해졌다. 게다가 강력한 황제권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키운 외척과 [[환관]]세력들은 곧 권력을 장악하여 허수아비 황제 아래 치열한 정쟁을 일삼는 등 정치, 사회, 경제적인 혼란이 이어졌다. 이를 기회로 삼아 [[왕망]]이 [[한나라]]를 일시적으로 폐지하고 [[신나라]]를 건국하였다.(서기 [[8년]]) <br />
<br />
그러나 [[신나라]]의 급진적인 정책은 [[호족]]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고, [[한나라]] 부흥세력과 [[호족]]세력의 연합으로 신나라는 붕괴되고, 다시 [[한나라]]가 복권되었다.(후한 건국: 서기 [[25년]]) <br />
<br />
후한왕조가 통치한 195년간 중국의 봉건사회는 계속적으로 발전하였지만 여러 가지 모순도 더욱 심화되었다. 후한 후기에는 중앙집권 세력이 약화되고 군웅할거 세력이 강대해졌으며, 군웅들 사이에 격렬한 권력쟁탈이 일어난 동시에 황건적의 난이 발발하였다. 후에 군웅들은 황건적의 난을 무력으로 진압하였지만 중앙권력은 유명무실해지고, 군벌의 대혼전이 일어났다. 여러 군벌들의 대혼전을 거쳐 최후에 [[위]](魏) [[촉]](蜀) [[오]](吳) 세 나라가 정립하는 국면이 형성되어 [[삼국시대]]가 시작되었다. <br />
*바로가기: [[한나라]]<br />
<br />
====왕망의 '[[신나라]]'====<br />
[[왕망]]은 외척으로서 9살인 [[평제]](平帝)를 옹립하고 자신의 딸을 황후로 만들어 정치의 실권을 잡았다. 그는 어린 황제를 보필한 공로를 인정받아 안한공(安漢公)이라는 칭호를 받았지만 서기 [[5년]]에 반란을 일으켜 [[평제]]를 살해했다. 서기 [[8년]] 자신이 제위에 올라 국호를 신(新)이라 하고 당시 유행하던 [[참위설]](讖緯說)로 제위찬탈을 정당화했다. <br />
<br />
[[유학]]을 열렬히 신봉했던 [[왕망]]은 제위에 오르자 고대 [[주나라]]의 제도를 모방한 유교주의적인 이상국가를 건설하고자 각종 개혁에 착수했다. 고대 [[주나라]]와 같이 삼공(三公)과 구경(九卿) 이하의 관직을 제정하고, 토지문제에서는 [[왕토사상]](王土思想)에 기초하여 토지소유를 제한하고(토지국유화) 토지와 노비의 매매를 금지했다. 화폐는 기존에 통용되던 [[오수전]]을 폐지하고 새로 대전(大錢)을 주조했으며, 도화(刀貨)·포화(布貨)·화천(貨泉) 등의 수십 가지 화폐를 발행했다. 이상의 여러 개혁들로 인해 경제적 혼란이 일어나 곳곳에서 농민반란이 발생했다. 또한 [[흉노]]족의 침입을 허용하는 등 대외정책에 있어서도 많은 문제가 나타났다.<br />
<br />
결정적으로 서기 [[18년]] [[산동성]] 낭야(琅邪)에서 일어난 '[[적미의 난]]'은 [[번숭]](樊崇)의 지휘 아래 거대한 집단을 형성하고 [[장안]]까지 침입했다. [[호족]]들은 스스로의 보호를 위해 무장했는데 그 가운데에는 농민군과 협력하여 [[왕망]] 정권에 반기를 든 사람들도 다수 있었다.<br />
<br />
[[호족]]들과 농민들의 반란으로 휘청하던 [[신나라]]는 서기 [[23년]], 불과 15년 만에 붕괴되고 만다. 혹자는 [[왕망]]의 [[신나라]]를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라고 칭하기도 한다.<br />
<br />
*바로가기: [[신나라]]<br />
<br />
===삼국시대, 서진시대===<br />
후한 말엽, 황건적의 난과 중앙정부의 혼란으로 한나라는 뿌리 채 흔들리게 된다. 이 틈을 타서 지방 토호들이 자립하였다. 이들은 크게 3개의 세력으로 결집되는데, 하나는 중원에 위치한 조조의 "위나라", 또 하나는 대륙 서부에 위치한 유비의 "촉나라", 나머지 하나는 양자강 이남을 차지한 "오나라"였다. <br />
<br />
이들은 각자 나라를 발전시켜가면서 주변 민족들을 토벌하여 한족의 영향력을 넓혔다. [[오나라]]는 저장·장시 등의 산지에 사는 [[산월]](山越)을 굴복시켰고, [[촉나라]]는 재상 [[제갈량]](諸葛亮)이 국정을 보좌하여 윈난[雲南] 지방의 원주민을 복속시켰다. 그러나 이 두 나라보다는 중원에 위치하여 세력을 키운 [[위나라]](魏)의 국력이 가장 강했다. [[위나라]]는 [[사마의]](司馬懿)의 아들인 [[사마소]](司馬昭)의 계획에 따라 [[263년]] 촉으로 토벌군을 보내 항복시켰다. [[사마의]]의 손자 [[사마염]](司馬炎)은 [[265년]] 제위를 물려받아 [[서진]](晉)을 세웠다. [[서진]]은 [[280년]] [[오나라]]를 평정하여 천하통일을 달성했다. <br />
<br />
통일 후 [[진 무제|무제]], 즉 [[사마염]]은 자신의 일족을 여러 나라의 왕으로 봉했다. 또한 봉왕(封王)의 권한을 강화하기 위해 그들에게 병권을 주어 지방관을 다스리도록 했다. 이것은 관리들에게 봉왕에 대한 충성심을 갖게 하고 봉왕은 황제에게 충성하도록 하여 관리들에 대한 황제의 지배를 강화하려는 의도에서 나왔다. 그러나 사실상 봉왕제의 강화가 도리어 동족간의 싸움을 격화시켜 '[[8왕의 난]](팔왕의 난)'([[291년]]~[[306년]])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이때 여러 왕들이 [[흉노]]를 비롯한 북방민족의 무력을 이용함으로써 이들 민족은 본격적으로 중원의 분쟁에 개입하게 되었다. 결국 [[316년]] 흉노의 유씨(劉氏)에 의해 [[낙양]]과 [[장안]]이 함락됨으로써 [[서진]]은 멸망했다.<br />
<br />
*바로가기 [[중국 삼국시대]]<br />
<br />
===5호 16국 시대===<br />
[[서진]]이 멸망하자, [[사마예]]가 "[[건업]]"(지금의 "[[남경]]")에서 나라를 세우니, 이 나라가 바로 "[[동진]]"이다. 그러나 중국대륙의 중북부 지역은 5개의 이민족에 의해서 16개의 나라들이 차례로 일어서고 무너지는 대 혼돈이 벌어졌다. "5호"는 [[몽골]]계의 [[흉노]], [[갈족]], [[티베트]]계의 [[저족]], [[강족]], [[투르크]]계의 [[선비족]] 등 다섯 이민족들을 말한다.<br />
<br />
이 무렵, 이민족이 지배한 중북부 지역은 다양한 문화와 유입되고, 이민족들도 '한족화' 되는 등 중국 역사가 발전해가는 시기였다. 또한 [[양자강]] 이남 지역은 비교적 우수한 문물을 지니고 있었던 사람들이 내려오면서 경제적·정치적으로 발전해 나갔다.<br />
<br />
북쪽에 위치한 이민족들은 예상과 달리 [[사대부]]를 존중하고, 정통성을 강조했으며, 한족의 문화를 받아들였다. 또한 많은 이민족들이 [[불교]]를 받아들이고, 통치이념으로 세우면서 [[불교]]문화가 대량으로 유입되었다.<br />
<br />
===남북조시대===<br />
*북조: [[북위]](北魏)-[[동위]](東魏)-[[서위]](西魏)-[[북제]](北齊)-[[북주]](北周)-> [[수나라]]로 통일.<br />
*남조: [[송나라]](宋)-[[제나라]](齊)-[[양나라]](梁)-[[진나라]](陳)-> [[수나라]]로 통일.<br />
<br />
남쪽의 한족 왕조와 북쪽의 이민족 왕조가 공존한 시기이다. 먼저 북쪽은 [[선비족]] 출신인 '[[북위]]'가 강성하였는데, [[북위]]의 [[태무제]]가 강북지역을 통합([[439년]])하고, 정치적 안정을 이룬다. 그러나 [[북위]]는 [[동위]]와 [[서위]]로 분열되고, [[동위]]는 [[북제]]로, [[서위]]는 [[북주]]로 왕조가 교체되었다. [[북주]]가 [[북제]]를 멸망시키고 강북지방을 잠시 통일하였으나, 곧 외척인 [[양견]]이 왕조를 교체하고 [[수나라]]를 건국한다([[581년]]). 이 [[수나라]]가 남쪽의 '[[진나라]]'를 멸망시킴으로서 중국을 통일하였다([[589년]]). <br />
<br />
이 시기 남조에서는 귀족정치가 강화되어 황제권은 바닥에 떨어졌으며, 그런 결과로 별다른 이유 없이 왕조가 쉽게 교체되었다. 반면 북조에서는 황제권이 강화되는 현상이 보였다. 이 무렵 남북조 할 것 없이, 모두 [[불교]]를 숭상하였다. 차이가 있다면 북조의 [[불교]]는 '국가통치이념'으로서의 [[불교]]였다. 또한 [[도교]]도 숭상되었다. <br />
<br />
남조의 귀족문화는 화려함과 사치의 절정에 달했다. 반면 북조에서는 [[윈강석굴]]과 같은 대규모 불교건축을 장려하여 불교문화의 큰 발전을 일궈내었다.<br />
<br />
===[[수나라]]===<br />
[[581년]] [[북주]](北周)의 외척 [[수 문제|양견]](楊堅: [[수 문제]])이 [[북주]]를 멸망시키고 [[수나라]]를 건립하였다. [[수 문제]] 양견은 검소한 정치를 단행한 황제이다. 그는 중국의 남북통일을 새롭게 실현시키고 [[서진]](西晋) 이래 약 300년간 지속된 동란과 분열의 국면을 종결시켰으며, 통일을 공고히 하기 위한 여러 가지 조치를 통하여 전국을 안정시킴으로써 사회는 번영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특히 그는 유명한 [[과거제]]를 실시하여 유교이념으로 무장한 신하·다양한 출신의 인재를 등용하여 황제권을 강화시키고, 나라를 안정화시켰다. 이 [[과거제]]는 동아시아 전체에 퍼지게 된다.<br />
<br />
문제의 뒤를 이은 [[수 양제]]는 대[[운하]]를 건설하여 하북과 하남지역의 경제적 통합을 이루려 하였다. 또한 천하통일을 목표로 [[고구려]] 대원정을 일으키는 등 의욕적으로 사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대운하 건설과 [[고구려]] 원정으로 [[수나라]]의 국력을 피폐해졌고, [[수나라]]의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이때 사방에서 토호들이 일어나니 수나라는 고작 37년 만에 무너지고 말았다.([[618년]])<br />
<br />
*바로가기 [[수나라]]<br />
<br />
===[[당나라]]===<br />
[[수나라]] 말엽에 일어난 여러 토호를 제압하고 [[당 태조]] 이연이 [[당나라]]를 세웠다.([[618년]]) 이연의 뒤를 이은 [[당 태종]] 이세민은 "[[정관의 치]]"를 일궈내 [[당나라]]의 기반을 다지고, 이어 [[측천무후]]의 통치, [[당 현종]]의 치세 등이 이어지면서 [[당나라]]는 명실상부 동아시아 최강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br />
<br />
이 시기 당나라에서는 '[[과거제]]'가 안정적으로 정착되고, [[3성 6부]]제, [[균전제]], [[조용조]], [[부병제]](국민개병제의 일종) 등이 맞물려 돌아가면서 한족 역사상 최고의 국가체제를 일궈낸다. 이 시스템은 중국에서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에서도 국가체제의 표본으로 불릴 만큼 큰 영향을 끼쳤다. <br />
<br />
그러나 [[안사의 난]] 이후 기울기 시작한 [[당나라]]는 사방에 난립한 절도사들의 독립, [[조용조]] 제도의 붕괴 등으로 서서히 몰락해간다. 그러다 결정적으로 [[황소의 난]]을 겪고 나서 치명타를 입게 된다. 그리고 [[907년]] [[주전충]]에 의해서 멸망당하게 된다.<br />
<br />
===5대 10국시대===<br />
<br />
===송나라===<br />
<br />
===금나라, 남송시대===<br />
<br />
===원나라===<br />
<br />
===명나라===<br />
<br />
===청나라===<br />
<br />
===중화민국과 군벌시대===<br />
<br />
===중화인민공화국(현대)===<br />
<br />
==행정구역==<br />
<br />
===각 성===<br />
===직할시===<br />
===자치구===<br />
===특별 행정구===<br />
<br />
[[분류:동양사]]</div>Jklhttp://hdic.kr/index.php?title=%EB%B6%84%EB%A5%98:%EC%B2%AD%EB%82%98%EB%9D%BC&diff=1634분류:청나라2021-08-29T02:24:19Z<p>Jkl: 판 1개를 가져왔습니다</p>
<hr />
<div>[[분류:동양사]]</div>Jklhttp://hdic.kr/index.php?title=%EB%B6%84%EB%A5%98:%ED%83%9C%EA%B5%AD&diff=1636분류:태국2021-08-29T02:24:19Z<p>Jkl: 판 1개를 가져왔습니다</p>
<hr />
<div>[[태국]](타이)와 관련된 모든 역사용어. <br />
[[분류:동양사]]</div>Jklhttp://hdic.kr/index.php?title=%EB%B6%84%EB%A5%98:%ED%95%9C%EB%82%98%EB%9D%BC&diff=1638분류:한나라2021-08-29T02:24:19Z<p>Jkl: 판 1개를 가져왔습니다</p>
<hr />
<div>[[분류:동양사]]</div>Jklhttp://hdic.kr/index.php?title=%ED%95%9C%EB%82%98%EB%9D%BC&diff=1640한나라2021-08-29T02:24:19Z<p>Jkl: 판 1개를 가져왔습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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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틀:중국사}}<br />
*[[중국]] 고대 통일왕조. 존속기간([[기원전 206년]]~서기 [[220년]]) <br />
===전한(서한)===<br />
[[진나라]]가 멸망하자, [[유방]]은 파촉과 한중 지역에서 힘을 길러 [[기원전 202년]] [[항우]]를 깨뜨리고 천하를 통일하였다. 수도는 [[장안]]으로 하였다. 진나라가 너무 완고한 [[법치주의]]를 실시하다가 실패하였으므로 한 고조는 법제를 느슨하게 하고, 부분적으로는 봉건제를 부활하고 주요 지역에는 군현제를 실시하는 `[[군국제]]`를 바탕으로 나라를 안정시켰다.<br />
<br />
3대 황제인 [[한 문제]]와 4대 황제인 [[한 경제]] 시대 착실하게 국력을 닦았다. 한편 봉건 제후세력의 힘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추은령]]`을 내려, 그들의 세력을 분할하고 삭감하였으며, 이에 반발하는 [[오초칠국의 난]]을 잘 막아내어 중앙집권체제 강화의 기회를 맞이하였다. [[한 무제]] 때에 이르러서는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고, [[유교]]를 중시하며, [[법치주의]]를 부활시켰다. 또한 제후들의 힘을 지속적으로 약화시켰다. <br />
<br />
한편 한 무제는 [[서역]] 원정 및 남방, [[고조선]] 원정으로 한나라의 국력을 떨치고, [[흉노]]족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났다. 하지만 이때부터 시작된 재정난과 황권이 강해짐에 따라 황제 측근에 위치한 외척과 [[환관]]들의 발호가 시작되었다. 이후 계속된 정치적 혼란으로 외척세력이 정권을 장악하였고, [[기원전 8년]]에는 외척 출신인 [[왕망]]이 정권을 탈취하고 [[신나라]]를 세우게 된다. <br />
===후한(동한)===<br />
왕망의 통치는 호족세력과의 충돌로 인해서 오래 가지 못하고 [[한 광무제]] 유수가 후한을 건국하고, [[낙양]]을 수도로 하였다. 후한 왕조는 사실상 [[호족]] 연합체 왕조였다. 따라서 황권은 한계가 있었다. 서기 [[100년]]이 지나면서 다시 외척들이 정치에 간섭하기 시작했으며, 황제는 외척을 견제하기 위해서 [[환관]]을 등용하는 등 정치적인 악수가 이어졌다. 이에 [[유교]]적 교양을 지닌 관리와 학자들의 대반격이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당고의 화]]`이다. 이때 환관들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게 되었고, 한나라의 정치는 엉망이 되어갔다. <br />
<br />
또한 이민족의 침입과 힘겹게 살아가던 농민들의 반란([[황건적의 난]])은 비틀거리는 한나라에 일격을 가했다([[180년]] 무렵). 그리하여 중앙정치는 사실상 상실되었고, 지방 호족들이 군웅을 겨루게 되었다. 치열한 군웅쟁탈전 끝에 중국 중북부를 통일한 [[조조]]와 남동부를 장악한 [[손권]], 서부를 차지한 [[유비]]가 대립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중국 삼국시대이다. <br />
<br />
한나라는 이미 [[190년]] 무렵에 멸망한 것이나 다름 없었지만 공식적으로 멸망한 것은 서기 [[220년]] 조조의 아들 [[조비]]가 황위를 찬탈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br />
[[분류:한나라]]<br />
[[분류:동양사]]</div>Jklhttp://hdic.kr/index.php?title=%ED%9B%84%EC%97%B0&diff=1642후연2021-08-29T02:24:19Z<p>Jkl: 판 1개를 가져왔습니다</p>
<hr />
<div>[[384년]]~[[409년]] [[선비족]]의 한 갈래이다. [[모용수]]가 [[384년]]에 '연왕'이라고 자칭하고 [[하북성]] 일대를 중심으로 나라를 건국하였다. 후연은 전성기에는 [[하북성]], [[산동]]성, [[산서성]]과 [[하남성]] 일대를 지배하였으나 강성해지는 [[북위]]와 [[고구려]]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나라가 흔들렸다. 이후 [[394년]] [[북위]]에게 수도 [[중산]]이 함락되여 큰 타격을 입었다. [[407년]] [[고구려]]의 후손인 [[모용운]]이 5대 임금으로 왕위에 올랐으나, [[409년]] [[풍발]]이 [[모용운]]을 죽이고 왕조를 찬탈하였다. <br />
<br />
[[분류:5호 16국]]</div>Jklhttp://hdic.kr/index.php?title=%EA%B1%B0%EB%9E%80&diff=1644거란2021-08-29T02:24:19Z<p>Jkl: 판 1개를 가져왔습니다</p>
<hr />
<div>{{틀:중국사}}<br />
*[[외몽고]]지역에 위치한 북방유목민족. 서기 4세기~[[1219년]]<br />
초기에는 전형적인 부족연맹체제로 시작하였다. 8부족이 있다고 전해진다. [[고구려]]와의 충돌이 있었지만 [[광개토 대왕]]의 공격 이후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이후 [[돌궐]]에 복속되었다. [[628년]] [[돌궐]]에서 자립하여 [[당나라]]에 복속하였으며, [[696년]] [[당나라]]로부터 독립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이진충의 난]]), 실패하였다. 이후 [[당나라]]가 힘이 약해지자 자립하여 [[907년]]에는 [[야율아보기]]가 칸의 자리에 오른다. [[야율아보기]]는 종래의 느슨한 부족연맹체제를 붕괴시키고 전제왕권을 구축하였다. [[야율아보기]]는 [[916년]] 천황제로 즉위하고, [[926년]] [[발해]]를 멸망시켜 북방의 패자로 군림하였다. <br />
<br />
[[936년]] [[석경당]]의 요청에 따라 [[후진]](後晉)을 건국하는데 도움을 주었으며, 이 대가로 [[연운 16주]]를 얻게 되었다. 거란은 한족을 지배하기 위하여 나라 이름을 '대요(요나라)'라고 중국식 이름으로 바꿨다. 이후 [[947년]]에는 중국 내륙 깊숙히 쳐들어가 [[개봉]]을 점령하였지만, 한족 통치의 어려움을 느끼고 후퇴하였다. 요나라는 남쪽 중국영토를 지배하기 위해서 '[[남면관]]'을 설치하고 [[당나라]]의 군현제를 모방하였으며, 북쪽영토는 '[[북면관]]'이라 하여 자신들의 고유통치방식을 사용하였다. 이와 같은 이원적 통치방법은 훗날 많은 유목민 정복왕조에게 활용되었다. <br />
<br />
요나라는 [[요 성종]] 시기에 국력이 최전성기에 달했으며, [[송나라]]에 유리한 조건으로 화친을 맺었다. 이를 [[전연지맹]](澶淵之盟)이라고 한다. [[요 성종]]은 또한 [[고려]]를 3차례 침입하였으나 실패하였다.([[거란 침공]]) 이후 황위를 둘러싼 갈등으로 나라가 어수선 해졌으며, 만주지역의 [[여진족]]에게 기회를 제공하였다. 이후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와 [[송나라]]의 협공에 의해 나라가 흔들렸으며, 최종적으로 [[1125년]]에 [[요나라]]는 [[금나라]]의 공격에 멸망하였다. <br />
<br />
[[야율대석]](耶律大石)은 남은 세력을 이끌고 서쪽으로 이동해 [[1132년]]에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서요]](西遼)를 건국하였다. 흑거란(黑契丹), 카라키타이(Karakitai)라고도 불리는 [[서요]](西遼)는 3대에 걸쳐 존속했지만, [[1211년]] [[칭기즈칸]]에 밀려난 [[나이만]](Naiman) 부족의 쿠츨루크(Kuchlug)에게 점령되었다가, [[1218년]] [[몽고]]에 복속되어 멸망하였다. [[1219년]] 남아 있던 마지막 세력은 만주지역에서 [[고려]]와 [[몽고]]의 연합공격에 의해서 멸망하였다. <br />
<br />
[[분류:거란]]</div>Jklhttp://hdic.kr/index.php?title=%EB%8B%B9%EB%82%98%EB%9D%BC&diff=1646당나라2021-08-29T02:24:19Z<p>Jkl: 판 1개를 가져왔습니다</p>
<hr />
<div>*[[618년]], [[당 고조]] 이연이 세운 [[중국]]통일왕조. <br />
<br />
당 고조 이연의 뒤를 이은 [[당 태종]](이세민)대에 이르러 당나라는 크게 융성하였다. 당 태종 이세민은 [[고창국]]과 [[비단길]] 일대를 장악하고 [[돌궐]]을 정복하여 당나라의 영토를 크게 넓혔다. 또한 조세제도와 토지제도, 군사제도도 정비하였다. ([[조용조]]) 이러한 것들이 복합적으로 이뤄져 당나라 시대의 [[율령]] 체제가 완성되었다. [[당 태종]]의 이러한 치세를 두고 [[정관의 치]](貞觀-治)라고 부른다. 당나라는 이후 잠시 쇠퇴 하였다가 [[당 현종|현종]]이 즉위하자 당나라는 다시 전성기를 누리는 데 이를 [[개원의 치]](開元-治)라고 한다. 이 시기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경교]])가 [[불교]]와 더불어 꽃을 피울 정도로 문화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당 현종|현종]]은 안으로는 민생안정을 꾀하고 조운(漕運) 개량과 [[둔전]](屯田) 개발 등으로 경제를 충실히 하였으며, [[부병제]](府兵制)의 붕괴에 대처하여 신병제를 정비하여 다시 나라를 일으켰다. 또한 밖으로는 [[동돌궐]](東突厥), [[토번]](吐蕃), [[거란]](契丹) 등의 국경지대 방비를 튼튼히 하여, 수십 년의 태평천하를 구가하였다. <br />
<br />
그러나 [[당 현종|현종]] 재위 말기부터 귀족들의 장원토지가 증가하여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755년]]에는 [[안사의 난]]이 일어났는데 이 사건은 중앙 정부의 통치력을 매우 약화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많은 농민들이 소작농이 되었다. 결국 당나라는 조세 제도는 [[양세법]], 군사 제도는 [[모병제]]로 바꾸었다. 수 많은 반란 속에서 [[절도사]]세력이 성장하였고 중앙정부에서는 [[환관]]과 외척들이 권력다툼을 벌였다. 결국 [[황소의 난]]을 거쳐 당나라는 [[절도사]]인 [[주전충]]에게 멸망하였다. <br />
<br />
당나라의 중앙관제인 [[3성 6부]]제는 아시아 각국에서 활용되었으며, [[율령]]체제와 [[조용조]] 조세제도 등도 각 국의 모범이 되었다. <br />
<br />
[[수나라]]때 실시 된 [[과거제]]도가 본격적으로 활성화되어 주요 관리들은 과거로 뽑았다. [[과거제]]에서는 [[유교]]에 관련된 서적에 대한 지식을 테스트했다. 그래서 [[유학]]과 문학이 크게 발달하였는데 당나라 때에는 [[훈고학]]이라는 것이 크게 발달하였다. 이로 인해 사상의 획일화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br />
<br />
문학 역시 귀족 중심의 시가 발달하였는데 [[이백]]과 [[두보]]가 대표적인 시인이다. <br />
<br />
종교적으로는 [[불교]]가 매우 발전하였고 [[현장]]이 지은 [[대당서역기]]라는 책은 [[인도]]와 동남 아시아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당나라 때는 무역이 크게 발달하였기 때문에 [[조로아스터교]],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마니교]] 등도 전파되었다. [[도교]]는 황실의 지원을 받았다. <br />
<br />
아시아 각국에 영향을 미쳤으며 일본에서도 [[나라 시대]]와 [[헤이안 시대]]에 [[견당사]](遣唐使)를 파견하여 당나라 문물을 수입해갔다.<br />
<br />
[[분류:당나라]]</div>Jklhttp://hdic.kr/index.php?title=%EC%86%8C%EC%A0%95%EB%B0%A9&diff=1648소정방2021-08-29T02:24:19Z<p>Jkl: 판 1개를 가져왔습니다</p>
<hr />
<div>*蘇定方. [[당나라]]의 장군. 생몰연대([[595년]]~[[667년]]?)<br />
동[[돌궐]]과 서[[돌궐]]을 정벌하여, 높은 작위를 받았다. [[660년]]에는 [[돌궐]]왕을 사로잡아 다시금 주목을 받았다. <br />
<br />
소정방은 [[660년]] [[나당 연합군]]의 총 사령관으로서 13만 [[당나라]] 대군을 이끌고 [[백제]]를 공격하였다. 이 과정에서 [[신라]]와의 여러 마찰이 있었다. 그는 이미 [[백제]] 말고도 [[신라]]의 공격까지 계산에 두고 있었다. [[660년]] 7월, [[백제]]를 멸망시키고 [[의자왕]]을 비롯한 [[백제]] 포로들을 데리고 [[당나라]]로 귀환하였다. 이때, 좌효위대장군과 형국공이라는 높은 지위를 받았다.<br />
<br />
한편 귀환한 소정방에게 [[당 고종]] 황제는 "왜 [[신라]]는 공격하지 않았는가?"라고 묻자, 소정방은 "[[신라]]의 임금은 백성들을 사랑하고, 단결이 잘 되어 있기 때문에 치기가 어려웠습니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따라서 소정방은 [[고구려]]·[[백제]]·[[신라]] 모두를 공격하기 위한 총 사령관인 셈이다. <br />
<br />
[[661년]]에는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옛 [[백제]] 땅으로 내려왔다. [[664년]] [[부여융]]과 [[문무왕]]을 불러 형제의 맹약을 맺게 하면서 [[한반도]] 통제를 위해서 노력하였다. [[670년]]경 소정방은 [[신라]]를 공격하기 위하여 군대를 이끌고, 계립령([[문경시]] 부근)을 넘어 당교 인근에서 [[김유신]]에게 죽임을 당했다.<ref>[[삼국유사]] 기이편</ref> 그러나 [[중국]] 사서에서는 [[667년]]에 갑자기 죽었다고만 전한다. 그러나 소정방의 무덤은 [[중국]]에 없으며, 그의 죽음에 대해 석연찮은 기록 때문에 [[신라]]에서 죽임을 당했다는 설이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ref>역사스페셜 44회, 미스터리 추적 소정방 피살사건</ref><br />
<br />
소정방이 당교에서 죽자, [[고려]]시대의 문인 [[이규보]]는 「[[동국이상국집]]」에서 "제소정방장군문"이라는 추모시를 지었다. <br />
===주석===<br />
<references/><br />
[[분류:당나라]]</div>Jklhttp://hdic.kr/index.php?title=%EC%9D%B4%EC%9E%90%EC%84%B1&diff=1650이자성2021-08-29T02:24:19Z<p>Jkl: 판 1개를 가져왔습니다</p>
<hr />
<div>*명말의 농민봉기의 지도자. [[1644년]]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황제를 칭하였으나 [[청나라]]군에 쫓겨 불과 일년만에 자살하였다. <br />
[[분류:명나라]]</div>Jklhttp://hdic.kr/index.php?title=%EC%95%84%EC%86%8C_%EB%8B%A4%EB%A1%9C&diff=1652아소 다로2021-08-29T02:24:19Z<p>Jkl: 판 1개를 가져왔습니다</p>
<hr />
<div>*92대 [[일본]] [[일본 총리|총리]]. [[2008년]] 9월부터 임기를 시작할 예정이다. <br />
[[1940년]]생으로 부친은 [[일제강점기]]에 1만여명의 [[조선인]] 징용자를 끌고가 강제노역시킨 규슈(九州)의 아소탄광을 경영했으며 자신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32세에 아소시멘트의 사장을 지냈다. 학력은 귀족 학교로 통하는 [[가큐슈인 대학교|가쿠슈인(學習院)대학]]을 졸업하고 [[스탠퍼드대학교]]과 [[런던대학교]] 대학원에서 유학생활도 했다.<br />
<br />
9선(후쿠오카 8구) 의원인 그는 일본청년회의소 회장을 거쳐 [[1979년]]에 중의원에 첫 당선됐다. [[2001년]] 당 총재선거에서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총리]]에게 도전했다 패했다. [[2006년]] 총재선거에 다시 출마, [[아베 신조]] [[일본 총리|총리]]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자유민주당|자민당]] 간사장을 지내고 있으며, 지난해 총재 선거에서는 높은 지지도에도 불구하고 계파간 담합 결과 [[후쿠다 야쓰오]] [[일본 총리|총리]]에게 역시 패하고 말았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시절 외무장관과 총무상을 역임했다. 한일의원연맹 소속이며, [[한일해저터널]]을 지지하고 있다. <br />
<br />
===성향과 품성===<br />
그는 [[일본]] 현대정치의 뿌리로 꼽히는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전 [[일본 총리|총리]]의 외손자이자 [[스즈키 젠코]](鈴木善幸) 전 [[일본 총리|총리]]의 사위이므로 일찍부터 정계에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br />
<br />
그러나 그의 성향은 [[극우주의]] 중에서도 극우적 성향이다. 일왕은 [[야쓰쿠니 신사]]에 참배해야 한다는 망언을 하였으며, [[창씨개명]]은 [[조선인]]의 희망에 따라 이뤄졌다는 발언도 하였다. 실언을 많이 하기로 유명하며, 이로 인해서 국내외적으로 잦은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3&aid=0002285128</ref><br />
===각주===<br />
<references/><br />
[[분류:일본]]</div>Jklhttp://hdic.kr/index.php?title=%EC%9D%BC%EB%B3%B8&diff=1654일본2021-08-29T02:24:19Z<p>Jkl: 판 1개를 가져왔습니다</p>
<hr />
<div>일본은 동아시아에서 태평양으로 접어드는 열도에 위치해 있다. 국가체제는 입헌군주정이다. <br />
<br />
==역사==<br />
*역사 흐름: [[조몬 문화]]→[[나라 시대]]→[[헤이안 시대]](중앙집권화. 8~9세기)→[[쇼군]]이 나타나고(12~13세기)→[[막부]]시대(왕권약화)→[[일본 전국시대]](수많은 전쟁으로 쇼군 쟁탈전)→[[도요토미 히데요시]]→[[도쿠가와 이에야스]](열도 통일)→[[도쿠가와 막부]]→개항과 [[메이지 유신]]→[[일본 제국주의 시대]]→현대 일본<br />
<br />
===고대===<br />
일본의 신석기 시대는 '[[조몬 문화]]'라고 하여 농경과 수렵을 중심으로 경제 생활을 유지하였다. 그러다 기원전 2~3세기에 한반도로부터 선진 철기문화가 도래되면서 [[야요이 문화]]기에 접어들었다. 이 시기에 야마타이코쿠라는 나라를 비롯하여 수 십개의 소국이 성립되기 시작하였다. <br />
<br />
4세기가 되면서부터 일본은 본격적으로 역사가 발달하기 시작한다. 국가체제가 조금씩 형성되고, 한반도 고대왕조들의 영향 아래 일본에서는 소국이 흡수·통합되는 과정을 겪는다. 전방후원분을 위시로 한 대규모 고분은 강력한 권력체제가 등장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준다. 그리하여 이 시기를 '[[고분 문화]]'라고 한다. <br />
<br />
일본 내에서 [[신라]]계와 [[백제]]계의 치열한 다툼 끝에 결국 [[백제]]계가 승리하고, [[백제]]계를 중심으로 한 [[고대국가]]가 성립된다. 이 시기를 '[[아스카 시대]]'라고 한다. 명실상부한 국가체제가 성립되고, [[율령]]체제도 정립된다. [[중국]]과의 교류도 활발해져 [[견수사]]와 [[견당사]]가 연이어 파견되었다. <br />
<br />
다이카 개신을 통하여 [[천황]]중심의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고, 연호와 일본이라는 국호도 만들었다. 8세기경 토지가 개척되고, 문벌가문의 대토지 소유가 일상화되면서 일본식 [[장원]]체제가 성립되었다. 이로 인해서 지방의 호족과 토호세력이 성장하고, 중앙집권체제는 붕괴되면서 기나긴 분열의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br />
===중세===<br />
[[장원]]체제가 완성되자, [[장원]]체제를 수호할 무사집단이 형성되었다. [[사무라이]]들이 바로 그들이다. 사무라이라는 무력기반과 장원이라는 경제기반은 사실상 호족들의 자립을 가져다주었고, 중앙집권의 붕괴를 의미했다. 호족 가운데서 강력한 호족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무늬만 남은 천황으로부터 '[[쇼군]]'의 칭호를 받고 전국을 제패하니, 이것이 바로 '막부시대'의 시작이다. 12세기말 [[가마쿠라 막부]]에서 시작된 막부시대는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가 이뤄질 때까지 지속된다. <br />
<br />
13, 14세기에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이 막부에 다시 도전하는 시도가 있었으나, 오히려 실패하고 [[남북조 시대|일본 남북조 시대]]를 거치면서 천황가는 완전히 껍데기만 남아 근근히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완벽한 호족 무사집단의 우위가 확정되는 순간이다. 막부는 전국을 통치하기 위하여 봉건제를 실시하고, 막부가 각 지역의 영주를 통치하고, 영주들이 소영주인 가신들을 통치하는 피라미드 형태로 전국을 운영하려 하였으나, 이런 간접적인 통제로는 전국을 장악하기 어려웠다. 곧이어 전국에서 오로지 힘이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지배하는 시대가 열리니, 이것이 바로 [[전국시대|일본 전국시대]]이다. <br />
<br />
16세기 후반 일본의 [[전국시대|일본 전국시대]]는 몇몇의 강력한 세력으로 정리된다. 이들은 [[다케다 신겐]],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의 순으로 전국을 장악하였으며, [[오다 노부나가]]가 실질적으로 최초로 전국을 통일하였으나 오래가지 못하였고, 그의 가신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공격하였으나([[임진왜란]]), 실패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오랫동안 기회를 노리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전국을 재통일하고, 통치를 굳건히 하여 '[[에도 막부]]'를 건설하게 된다. 이 무렵, [[네덜란드]]를 비롯한 유럽 열강들과 최초의 접촉이 있었으며, 이들에게 [[기독교]]와 총포 등을 수입하여 훗날 일본 근대화의 씨앗을 뿌리게 된다. <br />
<br />
[[에도 막부]]는 전국을 250개의 영지로 분리(사실상 소국)하고, [[다이묘]](영주)들에게 분배하였다. 이것은 얼핏 보기에는 지방권력을 강화시킨 것처럼 보이지만 강력한 무력을 바탕으로 다이묘를 끊임없이 감시하고, 백성들끼리도 연대책임을 묻는 등 지방권력을 적절히 통제하였다. 또한 쇄국정책을 사용하여 지방세력이 강력해지는 것을 통제하였다. 하지만 이 쇄국정책은 언제든지 열릴 가능성이 있는 쇄국정책이었다. <br />
<br />
에도 막부는 자신의 지배이념을 확립하기 위하여 천황 중심으로 한 관념체계를 설정하였다. 하지만 그 천황은 형이상학적 위치에 존재할 뿐, 현실에 있어서는 책임지지 않는 그런 존재일 뿐이다. [[에도 막부]]는 천황을 위시한 충효 관념을 바탕으로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확보하였다. <br />
===근현대===<br />
[[1853년]] [[미국]]의 [[메튜 캘브레이스 페리|페리]] 제독이 이끄는 함대가 일본을 침공하였다. 일본은 이 함대의 공격에 무릎을 꿇고, 개항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막부체제는 혼돈에 휩싸였다. 당시 19세기에 들어서 민중의 저항이 거세지면서 에도 막부는 몇 차례의 개혁을 발표하였으나, 구체제를 유지하려는 낡은 개혁에 불과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외압에 의한 개항은 막부의 권위를 크게 떨어뜨렸고, 젊은 막부타도세력들이 결집하여 메이지 천황을 중심으로 막부를 타도하니, 이것이 바로 [[메이지 유신]]이다. <br />
<br />
유신 이후 천황을 중심으로 한 권력체제로 재편되고, 강력한 산업화 정책으로 일본은 재빠르게 근대국가로 나아가게 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농촌경제 등의 수많은 모순들을 낳게 되자, 이를 타도하기 위하여 조선을 강제로 개항시키면서 스스로 제국주의의 길로 나아가게 되었다. <br />
<br />
[[1889년]] [[대일본제국헌법]]이 반포되고, 천황주권을 바탕으로 귀족세력이 의회를 장악하는 [[입헌군주제]]의 일면을 갖췄다. 일본은 군사력을 바탕으로 계속 팽창을 시도하여 [[청일전쟁]]으로 [[조선]]의 지배권을 확립하고([[1894년]]), [[대만]]과 유구([[오끼나와 제도]])를 지배하여 제국주의 국가로서 위상을 갖추게 되었다. 최종적으로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만주일대까지 그 세력을 뻗침으로서 제국주의 열강으로서 기반을 확고히 하였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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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가시적인 성과와는 달리 내부적으로는 사회모순과 민생피폐로 사회가 휘청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일본사회의 대안으로 [[사회주의]] 세력이 급성장하였으나, 철저한 탄압으로 [[사회주의]] 세력의 확대는 한계가 있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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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내부적으로 여러 문제를 고민하고 있을 무렵, 세계 [[대공황]]이 닥쳤다. 일본은 [[독일]]과 마찬가지로 이것을 [[파시즘]]으로 극복하려 하였다. 군부세력은 각종 정치사변과 쿠데타로 정치세력을 말살시키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으로 대외팽창을 시도하였다. [[1940년]], 군부파시즘 세력은 내각을 총사퇴시키고 사실상 전쟁체제로 국가를 이끌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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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독일]]·[[이탈리아]]와 함께 [[삼국동맹]]을 맺어 [[2차 세계대전]]의 주축국이 되었다. 이에 [[미국]]과 [[영국]], [[네덜란드]]의 대일본 봉쇄가 시작되었고, 이를 해소하기 위하여 일본은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태평양 전쟁 초기에는 연전연승하여 전 동남아 지역과 일부 오세아니아 지역을 비롯하여 태평양 일대를 휩쓰는가 하였지만 [[미국]]의 거센반격으로 [[미드웨이 해전]] 이후에는 패퇴는 거듭하였다. 그리고 [[1945년]] 8월 15일에 무조건 항복을 하기에 이른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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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항복이 조인된 [[1945년]] 9월 2일부터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미 군정]] 하에 있었다. 군대와 재벌을 해체하고, 천황은 정무에서 손을 떼고, [[자유민주주의]]적 체제로 나아갔다. 이것은 일본을 중심으로 [[소련]]에 대한 방어선을 깔려고 하는 미국의 의도에서 이뤄진 것이다. 미국은 일본을 지원하여 경제적 성장을 도왔으며, 철저히 미국의 우산 아래에서 미국의 통제권 아래 두려고 하였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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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국권을 회복한 이후 다양한 세력이 참여하는 정당정치를 이루었다. 그러나 [[파시즘]]을 기반으로 한 [[극우주의|일본 극우주의]]세력은 타 세력을 억압하고 [[자민당|자유민주당]]이 전후 지속적으로 정권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왔으며, 재벌중심의 경제체제를 다시 일구었다. 또한 군대보유를 금지하는 헌법 9조의 개정을 노력하면서 다시금 제국주의 국가로 발돋음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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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br />
*[[일본의 정치]]<br />
==사회==<br />
*[[일본의 사회]]<br />
==경제==<br />
*[[일본의 경제]]<br />
==문화==<br />
*[[일본의 문화]]<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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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일본 총리]]. [[2007년]] 9월 26일~[[2008년]] 9월 2일까지 [[일본]] 91대 [[일본 총리|총리]]로 재임하였다. <br />
[[1936년]]생이다. 아버지는 67대 [[일본]] [[일본 총리|총리]]를 재임한 [[후쿠다 다케오]]이다. [[와세다대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아버지가 [[일본 총리|총리]] 재임시절 비서관을 지냈고, [[1990년]]에 [[중의원]] 선거에 당선되었다. [[2000년]]부터 [[2004년]]까지 [[일본]] [[관방장관]]을 맡았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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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자민당]] 22대 총재가 되었으며, [[아베 신조]] [[일본 총리|총리]]의 갑작스런 퇴진으로 [[중의원]] 투표로 [[일본 총리|총리]]직에 올랐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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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다 [[일본 총리|총리]]는 취임 후 [[국민연금]]과 정치자금 문제 등 잇따라 불거진 각종 악재로 인한 저조한 내각 지지율과 야당이 다수파를 차지하고 있는 [[참의원]] 문제로 인한 국정혼란 등으로 시종 고전을 면치 못해왔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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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다 [[일본 총리|총리]]는 지난 7월 [[홋카이도]](北海道)에서 개최된 주요 [[G8 정상회의]](주요선진 8개국 정상회의)의 성공적 개최와 지난달 대폭적인 당정 개편으로 지지율 만회를 노렸으나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차기 [[중의원]] 선거 등을 고려, 사임을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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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임 과정에서도 무책임하게 [[일본 총리|총리]]직을 내던지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국민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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